경북 인물열전 (86)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폭로하였다가 파직되었던 명필 안침(安琛)
경북 인물열전 (86)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폭로하였다가 파직되었던 명필 안침(安琛).hwp
경북 인물열전 (86)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폭로하였다가 파직되었던 명필 안침(安琛)
[大東野乘 第19卷 海東雜錄 1 安琛 條]
이 웅 재
안침(安琛: 1445[세종 27]∼1515[중종10])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경북 영주시)으로, 자는 자진(子珍)이요, 호는 죽창(竹窓), 죽계(竹溪), 죽재(竹齋)요, 시호는 공평(恭平)이다.
증 조부는 증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안종약(安從約)이고, 조부는 증 가정대부(嘉靖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 안구(安玖)이며, 추증(追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안지귀(安知歸)의 3남으로 어머니는 형조참판을 지낸 상주 박씨(尙州朴氏) 박이창(朴以昌)의 딸이고, 부인은 광주 이씨(廣州李氏) 이수철(李守哲)의 딸이요, 예조참의을 지낸 안호(安瑚)가 형이다.
1462년(세조 8)에 중형 안선(安璿)과 함께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66년에 왕이 강원도에 행차하여 시행한 고성별시문과(高城別試文科)에 2등으로 급제하여, 환로(宦路)에 들어 1469년(예종 원년)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으로 의정부 사록(議政府事錄)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였고, 『세조실록』을 만들 때에는 예문관 부수찬(藝文館副修撰)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의 직책으로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으며, 『예종실록』에는 예문관 부수찬 지제고(藝文館副修撰知制誥)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으로 기주관(記注官)을 맡아 일하였다.
1471년(성종 2)에는 신설된 예문관에 당대의 명사로 뽑혀 등용되었고, 이듬해 예문관 수찬(藝文館修撰)이 되었다가 다시 다음해에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1475년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로 외직으로 나갔다가 1477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
1479년에는 평안도 경차관(平安道敬差官)으로 관서(關西)를 순회하고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으로 승차하였고, 1481년에는 성균관 사성이 되었다.
한때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폭로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임사홍이 물러난 뒤에 다시 등용되어 군기시 정(軍器寺正)이 되었고 곧 홍문관 직제학, 이듬해에는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로 승차되었다.
1485년에는 우승지가 되었다가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나가고, 1491년 예조참의를 거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1493년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옮겼다가, 같은 해 천추사(千秋使)의 직함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옮겼다. 1494년에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가 이조참판이 되었고, 이어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어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495년(연산 1)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고, 1497년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옮기었으며, 이듬해에는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같은 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1499년에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어 내직으로 돌아왔으나, 곧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로 다시 외직으로 나갔다.
1502년에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어 내직으로 돌아왔고, 동년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1504년에 또다시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으나, 이듬해 장악원 제조(掌樂院 提調)가 되었다. 같은 해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06년에는 외직인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509년(중종 4)에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차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으며, 1514년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에 특채되었으나 바로 병사하였다.
성품이 단아하고 소탈하며 조용하였다. 그러므로 젊을 때부터 함께 교유하던 자들에게서 추앙을 받았고, 함께 어울려 노는 이는 모두 한 세대의 명사들이었다. 영의정을 지낸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 유순(柳洵)과 한산군(漢山君) 이손(李蓀)이 남학(南學)의 친우들과 기년회(耆年會)를 만들 때 공은 나이가 아직 일흔이 되지 않았지만, 사마(司馬)의 고사(故事)로써 공을 맞아 동회(同會)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문장에서는 뜻이 잘 전달되는 것을 숭상하여 사물에 대해 구상을 할 경우 음운(音韻)이 저절로 맞았다. 필적(筆跡)은 전중(典重)하여 명필로 이름이 났고, 송설체(松雪體)에 능하며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써서, 비석이나 병풍의 글씨를 부탁하는 많았는데, 성종이 크게 장려하고 여러 차례 내탕고(內帑庫)의 종이를 내려 글씨를 써서 올릴 것을 명하기까지 하였으며, 문정공 한계희 선생 묘비, 황희 선생(黃喜先生) 신도비, 맹충 황치신(孟忠 黃致身) 신도비, 문안공 성임(成任) 신도비, 박흔 묘갈(朴昕 墓碣),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 신도비 등 그의 글씨로 씌어진 묘비석이 많다.
묘소는 분당구 율동 산 28번지 신좌(辛坐)에 정부인(貞夫人)과 쌍분(雙墳)으로 남아 있으며,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산 413-1에는 순흥 안씨의 추원단(追遠壇)이 있다. (15.12.18.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