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당하는 남편들
사육당하는 남편들
이 웅 재
“梅花랑” 모임에 나가려고 예쁜 물방울무늬의 넥타이를 골라 매고 거실로 나갔더니,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아내가 한 마디 한다.
“넥타이 좀 바꿔 매요! 빗금무늬나 세로 줄무늬를 매어야 좀더 시원해 보이지.”
시원해 보인다는 것은 키가 좀 커 보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내는 늘 내 키가 조금 더 컸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세대로 따지면 내 키가 그렇게 작은 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아내보다 약 1cm 정도 컸지만, 그런 현실적 수치는 별무소용이다. 그 정도의 차이로는 남자의 키가 여자의 키보다 작아 보이는 게 관습적인 인식이다. 아내는 평소 하이힐은 넘어지기도 쉽고 불편하다면서 신지를 않는데, 혹시 그것도 내 키가 더욱 작게 보일까봐 그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나는 가끔 혼자서 해 본다.
“梅花랑”이란 매주 화요일에 만나는 모임의 이름이다. ‘梅花’는 기실 ‘每火’의 변형이다. 매주 화요일마다 만난다는 뜻이다. ‘랑’은 ‘郞’도 되고 ‘娘’도 된다. 회원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어서 두 가지 의미를 다 포괄할 수 있는 ‘랑’은 한글로 쓰기로 했다. 게다가 ‘랑’은 ‘너랑 나랑’이라고 할 때의 ‘랑’이 될 수도 있는데다가, 그 소리가 ‘유음+모음+비음’으로 구르는 듯한 부드러움에다가 밝은 모음, 그리고 명랑하다 못해 애교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콧소리의 조합이라서 매우 마음에 콕 드는 이름이었다. ‘유음+모음+비음’은 모두가 성대를 울리면서 나오는 유성음이라서 무성음의 어둑어둑한 소리보다는 듣는 사람의 기분을 밝고 맑고 가볍게 만들어주는 장점도 있었다.
그런 것은 어쨌든,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세로 줄무늬 넥타이로 바꿔 매고 나왔다.
“어때?”
“응, 훨씬 멋있네.”
그런데 영 맑은 목소리는 아니다. 무언가 아직도 마뜩찮다는 듯하였다.
“왜 또, 무엇이 문젠데?”
아내는, 조금 멈칫하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그 하아얀 양말이….”
맞는 말이었다. 까만 구두 바로 위쪽을 차지하는 하이얀 양말…완전 흑백의 대결이다. 더더군다나 파란 색의 양복과 까만 구두, 그 사이에 홀로 ‘독야백백(獨也白白)’, 한 마디로 양말 혼자서 너무 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야만 했다. 그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약속시간에 늦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다. 내 별명 ‘거북이’를 또 들먹일 수밖에….
모임엔 20분쯤 늦었다. 사연을 들은 친구들이 말한다.
“완전히 사육되고 있구먼.”
저런 무례. 하지만 그건 ‘郞’들의 적극적인 동류의식의 발로에서 나온 소리였다. ‘娘’들은 달랐다.
“사모님 말씀이 ‘전적으로’, ‘100%’ 옳은 말씀이네요.”
결국 ‘郞’과 ‘娘’의 의견은 50:50, 그러니까 아내의 행동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것이었다.
가끔 가다가 주말에 큰아들 내외가 찾아온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새로 개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분위기는 좋았는데, 내게는 맛이 ‘별로’였다.
“맛이 없는데….”
아내의 이마가 찡그려진 것 같았는데 나는 그걸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고 아들 내외가 가고 난 뒤였다.
“당신, 왜 그래?”
느닷없었다. 다음 순간, 나는 내 ‘죄’를 알았다. 아내가 그걸 확인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사 주는 사람 기분은 어떻겠어?”
옳은 소리였다. ‘아내의 말은 언제나 옳다.’ 나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듯 말했다. 다다음 주에 아들 내외가 또 와서 외식을 했다.
나는 무조건 “맛있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맛이 있었다. 이후 나는 무조건 아내의 생각은 옳다고 여기게 되었다.
가끔 아내와 함께 물건을 사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대형 마트에 갈 때가 있다. 보통 두 개의 길을 이용하는데, 하나는 차가 다니는 대로요, 다는 하나는 야탑천 보도1교를 건너서 가는 길이다. 나는 주로 대로 행을 택하는 편인데 아내가 말한다.
“이 길로 가자. 이 길이 좋아.”
아내는 나와는 달리 야탑천교를 통해 가는 길을 선호한다. 아내의 말을 들으니 정말 그 길이 더 좋아 보인다. 흘러가는 시냇물도 친근하게 느껴지고 아파트를 관통하는 사잇길도 정겹게 여겨진다. 거리로 보아서는 대로로 가는 것이 조금 더 가까운데 말이다. 아무래도 사육되어 가는 모양이다.
나는 거의 매일같이 1시간가량 탄천을 산책한다. 요즈음은 예전 같지가 않아 조금만 걸어도 힘이 들고 등줄기에 땀이 흥건히 밴다. 산책길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아내가 말한다.
“그 티셔츠 벗어 놓아요! 빨게.”
“왜? 오늘 하루밖에 안 입은 건데….”
“이거 봐요, 이거 땀 때문이라구요.”
티셔츠의 등줄기에는 흰 색의 불규칙한 무늬들로 얼룩이 들어 있었다.
아내 말이 옳다. 아내가 사 주는 옷이나 모자, 워킹 화 등등. 내 맘에는 안 들지만 아내가 좋다고 사 주는 것이니, ‘좋아 좋아.’를 녹음기 틀듯 뱉어내며 감지덕지해야 한다. 같이 다닐 때 후줄근해 보이면 안 되니까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예전 짐꾼의 개념에서 나이가 들면서 애완물이나 액세서리 개념으로 변했으니 놀랄 만큼의 신분 상승이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유기 견처럼 귀찮을 땐 언제라도 버릴 수 있다는 점, 웬만큼 비싼 액세서리도 오래 사용하다 보면 싫증이 나서 새것으로 바꿔칠 수도 있다는 점은, 우리 삼식이들이여, 언제라도 명심, 명심하고 지내야만 할 일이다. (2016.1.23.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