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국내)

정동진의 배반2

거북이3 2016. 10. 9. 21:47


정동진의 배반2.hwp

                      정동진의 배반2 

                                                                                                          이 웅 재

   묵호등대 근처의 풍광들을 더 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일정상 어쩔 수 없기도 하고 또 뱃속을 채워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서, 우리는 두타산(頭陀山) 무릉계곡으로 이동했다. ‘두타’란 범어 ‘Dhuta’의 음역이다. 닦고 털고 버린다는 뜻으로 세속의 의식주에 대한 탐심(貪心)과 집착(執着)을 버리고 심신을 닦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계곡 어구에 있는 ‘두타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뱃속을 채우는데, 앞자리에 앉아있던 젊은 아낙네가 맛보라면서 오징어 회를 앞접시 가득 덜어서 준다. 여고 동창들끼리 왔다는 그녀들 일행은 여섯 명, 한 식탁에 4명씩 앉아야 하다 보니 어쩌다 우리가 그들 중 2명과 식탁을 함께 하게 되었던 것인데, 뜻밖의 횡재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점심을 먹은 후, 드디어 무릉계곡 트레킹(trekking)엘 나섰다. 먼저 우리를 맞아주는 것은 봉래(蓬萊) 양사언(陽士彦)이 강릉부사로 있을 때에 새겼다는 암각서(巖刻書)였다. 오랜 세월 글자가 마모되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모형 석각(石刻)을 제작하여 놓았다는 것이다. 모형 석각을 지나니 오른쪽으로 무릉반석이 보인다. 금란정(金蘭亭)이 있는 곳으로부터 삼화사(三和寺)에 이르는 1,500여 평이나 되는 너럭바위가 무릉반석이다. 양사언의 석각뿐만 아니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을 비롯한 많은 시인묵객들이 시가 새겨져 있는 넓고 평평한 바위 위로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요즘 같으면 저렇게 암각해 놓는 사람이 있다면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겠지만, 반면에 역사적으로도 널리 이름이 알려진 우리 옛 할아버지들의 필적이라 생각하니 그 흔적이 닳아 없어질까 걱정되는 마음도 일어난다. 정조의 어명으로 김홍도(金弘道)가 44세 때에 그린 것이라는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의 사진도 게시되어 있었다.

   드디어 삼화사, 앞쪽에는 12지신상이 일렬로 도열해 있어 자신의 띠에 해당하는 동물의 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았다. 삼화사 경내도 두루 둘러보았다. 그 중 마지막 템플 스테이 아래쪽의 ‘해우소’ 건물이 너무 고급스러워 보였다. 계곡으로 올라가면서 ‘병풍바위까지는 못 가도 쌍폭포와 용추(龍湫)폭포 정도는 보고 가야지’ 생각하면서 이정표를 보고 있는데 그만 후두둑!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금방 그치겠지 생각하면서 조금 더 올라가는데, 빗방울이 점점 커지고 잦아지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우산과 우비도 가지고 오긴 했는데, 이렇게 날씨가 변할 줄은 모르고 버스에 놓아두고 내렸으니, 유비(有備)했으나 유환(有患)이로다. 오호, 애재라, 그만 발길을 돌려 내려오노라니, 너무 심심할 것 같다고 거수(巨樹) 몇 그루가 명찰을 달고 거수경례를 하면서 앞길을 막아선다. 굴참나무와 갈참나무였다. 이름표에 덧붙여진 간략한 설명을 보니 굴참나무는 그 껍질로 너와집을 짓는다면서 그래서 너와집을 굴피집이라고도 한다 하였고, 갈참나무는 가을까지 잎이 남아 있어 갈참나무라 한다면서 자랑하고 있었다. 절 앞쪽까지 내려오니 반석교(磐石橋)가 있고, 그 위 아래쪽의 계곡 풍경이 그냥 떠나기 아까워 핸드폰을 꺼내 사진 몇 장을 남기고 아쉬운 대로 무릉계곡 탐방을 마무리하였다.

   4:30, 이제는 동해역에서 영동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대망의 정동진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가이드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2호차의 아무 좌석이나 골라 앉으란다. 열차 칸칸마다 TV 모니터가 있으며 좌석 배치가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끔 되어 있는 동해안 바다열차는 아니지만 똑 같은 곳을 지나가는 열차라고 했다. 단지 모든 사람에게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좌석 배치가 아니기 때문에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를 잘 판단해서 앉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좌우 어느 쪽 좌석이 그런 자리인지는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람들이 역무원에게 물어보았다.

   “좌우, 어느 쪽 좌석에 앉아야 바다를 볼 수 있나요?”

   그 소리를 들은 가이드가 말했다.

   “절대, 절대, 절대로 가르쳐드리면 안 됩니다.”

   동시에 역무원이 말했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지요.”

   가이드가 만족한 듯 고래를 주억거리는데, 입이 가로로 쭉 찢어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 역무원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나는 오른손잡이라서 그런지 오른쪽이 늘 중요하게 생각되더라고요.”

   열차가 도착하자 우리 내외는 오른쪽 좌석으로 앉았다. 덕분에 바다는 실컷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정동진역에 내리자 거센 파도가 밀려오듯 실망감이 덮쳐왔다. 볼 게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신봉승 씨의 ‘정동진’이라는 시비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정작 나는 그마저도 생략을 한 채 둑 아래의 조형물 몇 가지만 핸드폰에 담아들고 돌아서고 말았다. 나중 알고 보니, 모래시계가 그 아래쪽에서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는데 나는 그마저도 보질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정동진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돌아서 오는 길에 열차 차창 밖으로 ‘함정체험장’ 사진을 찍으면서 깨달았다. 정동진은 거기 그렇게 있었는데, 내가 내 생각만으로 ‘정동진은 볼 게 하나도 없다’고 판단하고 말았다는 것을…. 사람들마다 바다를 바라다볼 수 있는 좌석을 중시했듯이 정동진은 광화문에서부터 정 동쪽에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16.10.3. 15매)

 

 

 


정동진의 배반2.hwp
0.0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