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사화집(2016년 제26호) 평설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사화집(2016년 제26호) 평설
이 웅 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연간사화집의 평을 쓰기 위하여 수록 작품들을 읽어 보았다. 실은 며칠 전에 교정을 위하여 몇몇 사람이 분량을 나누어 읽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주로 앞부분에 실린 작품들을 읽어 보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체의 작품을 읽으면서 하나하나의 작품들이 내게 걸어오는 말들을 들어 보았다.
어떤 작품은 모르던 사실을 알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작품도 있었고(정연가 ‘독서는 간접 체험이다’), 또 어떤 작품은 비슷한 경험이라도 자신만의 특별한 체험으로 받아들여서 새로움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글(박종숙 ‘내 생애 최고가 되었던 날’)도 있었다. 제목에 끌려서 나도 모르게 읽게 된 글(황장진 ‘공짜 땡비 침 맞기’)도 있어서 반가웠는가 하면, ‘제대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알아야할 것이 참 많은 세상’이라는 삶의 지혜를 말해 주는 작품(허근, ‘보는 법, 듣는 법’)도 있어 든든했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몇몇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공동제 수필’에서의 2작품을 눈여겨보았다. 우리 추천작가회에서 가장 원로로 활약하고 있는 이병수의 ‘사서교사에게 문학의 길 열어준 신문칼럼’을 보면 우리는 문학의 여러 가지 순기능 중에서 ‘이모작 삶의 보람’이라는 또 하나의 기능도 무시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을 단적으로 지적해주고 있었다.
나의 ‘일모작 인생’은 교육을 위해, ‘이모작 인생’은 문학을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 생각된다. 문학은 확실히 나의 인생을 윤택하고 영글게 하였으며, 이모작 삶의 보람까지 안겨주었으니 금상첨화 격이었다 하겠다.
다음 이자야의 ‘수필문학이 지향해야 할 점’에서는 수필문학의 영역을 보다 확대해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필자 나름의 강한 주장이 감지되었다.
똑 같은 체험을 했더라도 쓰는 사람마다 글이 달라진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성격과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표현 방법 역시 다르다. 사람마다 사고와 사물을 보는 시각도 다르고 지적수준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다시 말해 수필에서 말하는 체험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가상현실, 즉 픽션이다.
다음, 소들의 눈망울에서 그들의 절규를 느낀다는 박순혜의 ‘소’는 자동화 기기에게 대부분의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어 실업자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인공지능까지 등장해서 쓸모가 없어지게 되어가는 우리 인간의 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해 준 듯한 느낌이 들어 저절로 우리의 가슴을 찔러오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고역입니다. 원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우리였는데 어쩌다가 세상에서 제일 편한 동물이 되었습니다. 편한 게 편한 것이 아니란 걸 절실히 느낍니다. 할일 없는 게 너무 힘듭니다.…이랴 쯧쯧 하는 주인의 채찍 받으며 논갈이 밭갈이를 하고 싶고 달구지 메어 짐도 실어 나르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우리 소도 한 번씩 신선한 공기 마시며 바깥 구경을 하고 싶습니다. 일이 하고 싶습니다.’
김길자의 ‘중년의 변(辯)’은 곱게 늙어가고 있는 필자의 마음을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어주는 글이어서 반가웠다.
사람이 건강하게 곱게 늙는다는 것, 늙을수록 내면의 세계가 빛을 발한다는 것, 그것은 신의 뜻이며, 모든 인간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소망이고 가치이며 생의 의미다.
비록 삶의 훈장인 양 생기는 주름살이야 깊을지언정, 지혜와 우아한 품위가 갖추어진 노인을 보라. 그는 자연히 모든 이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서경희의 ‘순풍에 돛 달고’는 남보다 앞서가는 사람에게는 적이 많으니, 조심하며 살아가라는 교훈을 체험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값진 글이라 하겠다. 요즘 정계를 보면 무척이나 실감나는 현상을, 역겹게 느껴지는 정치인들의 얘기는 쏙 빼어버린 채 은근히 풍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흔히 하는 말로 잘 나갈 때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잘 굴러갈 때, 즉 순풍에 돛단 듯이 일이 잘 흘러갈 때 들뜨지 말라는 뜻이다. 순풍에 돛을 달았으니 역풍에 닻을 내려야 할 때도 있지 않겠는가. 마음이 들뜨면 평상심을 잃고 평상심을 잃으면 일을 그르치기 쉽다. 그런데 문제는 일이 잘 굴러가면 나도 모르게 들뜨게 되고 나도 모르게 교만심에 빠지게 된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 해도 내 마음 나도 모르는 것이 내 마음 아닌가.
음춘야의 ‘두 마음’은 외국 여행을 떠나는 손자에게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는 게 무엇보다 큰 선물이라고 누누이 읊었’으면서도 막상 빈손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는 섭섭해 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들킬세라 숨겨가며 하는 얘기 같아서 슬그머니 공감을 주고 있는 글이다.
해외여행을 떠날 때마다 할아버지는 꼬박꼬박 여행비를 챙겨주고, 할머니는 기숙사 생활한다고 주말에 오면 혼신을 다해 밥을 해주는데. 제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게 안쓰러워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다 쏟고 있는데. 하다못해 비행기에서 초콜릿이라도 사와야지. 스웨터는 그만두고라도 그 흔하디흔한 양말짝이라도 들고 와야 하지 않았을까. 섭섭한 마음이 자꾸만 일렁인다.
최홍식의 ‘두 남자의 표정’은 전시회에 전시된 흑백사진을 보며 쓴 글이다. 작가는 두 남자 중 한 남자를 두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고달픈 아버지들의 모습 아닐까’라고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그 ‘고달픈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도 함께 보도록 하자.
헐렁한 작업복 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의 한 사람은 아직도 작업 헬멧을 쓰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서 노동에 절은 땀 냄새가 났다. 인간은 특히, 남자는 노동을 스스로 찾아 해야만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리고 노동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는 신성한 일이다. 그는 한 동안의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잠시 쉬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아마도 일차로 일을 끝내고, 먼저 시원한 물 한 모금을 마셨을 것이다.
최홍식은 그 고달픈 아버지에게 담배도 권해 보고 시원한 물 한 모금도 마시게 해 주고 있었다. 나까지도 그에게 커피라도 한 잔 마시게 해 주고 싶은 심정이 일고 있었다.
다음, 김학인의 ‘계절의 여운’은 계절이 바뀜에 따른 꽃나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의 삶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마음이 돋보인다.
꽃이 피었다고 모두가 열매를 맺었을까. 혼신을 다해 꽃을 피우고 방긋거리다가 한 줄기 바람에 떨어진 여린 꽃잎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을 터. 뒤엉켜 살랑거리던 이파리가 벌레의 침범으로 색동옷 한 번 못 입어보고 힘없이 떨어진 잎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한 폭의 수채화를 완성하기 위해 밑그림으로 깔린 숫한 사연들.
인생도 마찬가지일 터. 밑그림으로 깔린 ‘숫한 사연들’에 의해 하나의 삶이 이룩되는 것이다. ‘숫한 사연들’의 ‘숫한’이 걸린다. 처음 교정 볼 때 내가 본 글이 아니라서 바로잡혔는지는 모르겠는데, ‘숱한’이라야 할 것이다.
조한순의 ‘한 마디 말’도 재미있었다. 버스를 탔는데, 교통카드는 잔액이 부족했고 아무리 뒤져도 천 원짜리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 앞으로 갔다.
“만 원짜리 밖에 없습니다.”
“백 원짜리로 거슬러드립니다.”
“백 원짜리로요?
순간 나의 표정이 어땠는지? 바라보던 기사는 잠시 후 부드러운 소리로 ‘다음번에 타실 때 내세요.’ 하면서 웃는다.
그러나 다시 여기저기 찾아보니 천 원짜리가 있었다. 그런데 갈등이 생긴다. 우리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분명 차비는 감면받았으니 이 돈은 지금 꺼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속으로 계산을 해보았다. 분명 다음에 내라고 했는데 내가 지금 차비를 안준다고 해도 큰 잘못은 아닌데 뭘…?
조한순은 어찌했을까? 자못 궁금하지 않는가?
김상분의 ‘녹색글방’을 보자. 글쓰기를 씨를 뿌리는 데에 비유하고, 다시 정반대로 나무가 웃자라면 가지치기를 하듯이 글을 쓴다는 것이다. 서로 닮았다. 우리도 글을 쓸 때, 나무를 기르듯 정성을 다하면 어떨까?
한 자 한 자 글을 심듯이 씨를 뿌리고 문장과 문단을 이어가며 한 편의 글을 구성하듯이 고랑을 내며 밭을 일구었다. 나무가 웃자라면 가지치기를 하듯이 지나친 수식이나 표현들을 가려내며 퇴고를 했다. 제법 그럴듯한 문장이어도 주제에서 어긋나면 길 한가운데 솟아있는 잡초를 솎아내듯이 미련 없이 잘라내면서….
그런데 우리는 늘 그러한 정성을 무시하고 툭하면 ‘욕망의 덫’에 걸린다. 김동순의 ‘욕망의 덫’은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망각이라는 항생제를 바르고 발라도 내 안에 상처는 쉽게 새살이 돋지 않았다. 내 그릇이 종지도 못되면서 사발에 그득한 음식을 탐내었으니 당연히 넘친 것이다.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어느 사람은 열심히 벌어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나는 개미처럼 벌어서 젊은 사기꾼에게 탁 털어 주었으니 주었다는 뜻은 같다고 내가 나에게 위로를 하며 세월가기만 기다렸다.
나는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장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몇 줄 글에 내 마음을 기대어 본다. 그것은 올해의 사화집이 내게 가져다주는 안정제라 하겠다.
지금은 잃어버린 천 냥에 연연하지 않는다. 내 주머니에 남은 한 냥을 소중히 여긴다.
(16.10.21. 26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