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문화 체험기

‘(대마도 문화 체험기 8[끝]) 108+4’

거북이3 2017. 7. 3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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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문화 체험기 8[끝])

                         108+4 

                                                                                                                              이 웅 재

 

 우리는 이제 ‘와타즈미신사’에서 마지막 관광지인 ‘한국전망대’로 이동하고 있다. 가장 일본적인 장소에서, 채 50km도 못 되는 한국과 제일 가까운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일본인들, 그들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만의 울타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개인 접시를 사용하는 버릇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자들은 특히 더하다. 그러다 보니 부부지간에 쌓이고 쌓인 불만이 인생의 말년에 이르면 분출해 버린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낯설지 않은 ‘황혼이혼’이라는 말은 그렇게 일본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에서는 황혼이혼을 하더라도 크게 어려움이 뒤따르지 않는다. 연금으로 살아가면 되니까. 우리나라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아직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연금으로 생활해 나가기에는 벅찬 사람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 그들은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은 싫어하지만, 반대로 남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아내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질이 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기네에게 맞게 변형시킨다. 세계의 최신 학설들을 가장 먼저 자국어로 번역하는 나라가 일본이요, 모든 문물을 자국화시키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 음식 중에 ‘돈가스’가 있다. 먹고 살아가야 할 음식물, 특히 육류가 부족하여 1800년대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때까지는 육식 금지를 지켜왔다. 이후 서양 문물이 개방되면서 작은 체구를 개선시키고자 육식을 권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쇠고기는 고가품이라서 그것을 돼지고기로 바꾸어 만든 음식이 ‘돈가스’이다.

  돈(豚)은 돼지, ‘가스’는 서양의 요리 ‘커틀릿(cutlet)’을 일본식 발음으로 ‘카츠레츠(カツレツ)’라고 부르다가 그것이 줄어들어 ‘카츠’, ‘까스’, ‘가스’로 불린 것이다. 곧 돼지고기로 만든 ‘얇게 저민 고기’, 그것을 튀긴 음식의 이름이 된 것인데, ‘돈가스’가 유행하게 된 것은 ‘가츠(かつ)’가 일본어로 ‘이긴다[勝]’는 뜻이 있어서 수험생이나 운동선수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위키백과’ 등 참조)

  우리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무조건 배일(排日), 극일(克日)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에서 일본인의 속성 하나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중국에서 받아들였으면서도 중국에는 없는 ‘짜장면’이 있는가 하면, 이탈리아의 음식보다도 맛있는 파스타나 피자 따위가 있어서 일본에게 뒤지고만 있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이제는 대마도에서 실제 거리상 한국과 제일 가까운 곳으로 가 볼 차례가 되었다. 버스로 이동하는 중에는 제법 빗줄기가 굻어지더니, 도중에 화장실이 있는 곳에서 잠시 쉬는 시간부터는 우산 없이도 다닐 만해졌다. 차가 멈춰선 곳은 ‘미타케[어악(御樂)]공원’이었다. 이곳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서인지 도로 양쪽에 있는 등산로에는 인적이 없었다.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거침없이 쭉쭉 자란 나무들 사이의 임도(林道)를 걸어서 산정에 오를 수만 있다면 얼마나 기분이 상쾌할까 싶었지만, 나에게는 그럴 만한 시간도 체력도 없었다. 해서 나 혼자 임도의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 보는 흉내만 내 본 다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비(施肥)를 하고는 내려와, 화장실 앞 먼나무를 한번 껴안아 주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는 것으로 대신하고는 자리를 떴다.

  버스는 달려 드디어 한국전망소엘 도착했다. 대마도 최북단인 히타카츠 와니우라[악포(鰐浦)]의 한국전망대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부산을 비롯하여 거제와 통영까지도 육안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나의 방문을 그렇게도 반기지 않던 대마도가 내게 그런 즐거움까지 제공하지 않은 일은 당연지사가 아니었을까? 총각 시절에 각각 1년씩 머물렀던 부산과 통영을 여기서 볼 수 있었다면 정말로 감회가 깊었을 터였는데 말이다.

  전망대 주변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언덕으로 된 잔디밭을 올라가면 앞쪽으로 탁 트여있는 바다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전망대, 전망소 두 가지 명칭을 다 쓰고 있었는데, 아마도 전망대는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는 팔각정 건물을 따로 구별하여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나 싶었다. 한국전망대는 1997년에 세워진 것이다. 기와지붕의 팔각정 형태는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정자를 본떠서 지은 것이라 한다.

  전망대 아래쪽으로는 ‘조선국역관사순난비(朝鮮國譯官使殉難碑)’가 있었다. 1703년 조선 통신사 일행이 배 3척으로 일본을 향해서 오다가 대마도 앞 바다에서 난파되어 역관사 108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인간 세계 번뇌의 총수가 108가지라는데 어쩌다 108명이었을까? 최남선은 그 ‘백팔번뇌(百八煩惱)’를 시조집 이름으로 썼다. 그래서 전문가들까지도 그 시조집에 실린 작품의 편수가 108편인 줄로 알고들 있다. 하지만 ‘백팔번뇌’는 잘못된 제목이다. 아니, 시조집 제목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108편의 시조를 모아놓았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그 시조집에는 3편으로 된 연시조 하나가 더 들어가 있어서 실제 편수는 111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순난비를 보면 이때 죽은 사람은 기실 112명이었다. 조선역관단을 안내하기 위해 예인선을 타고 나온 쓰시마 번사(藩士: 藩主의 가신) 4명도 함께 사망했던 것이다. 비단(碑壇)에는 이때 사망한 사람들의 수효와 같은 숫자의 돌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부분의 사진은 찍었는데, 정작 그 위에 있는 비석은 핸드폰이 말을 안 듣고 시간은 없고 해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순난(殉難)을 당하신 분들께 죄송한 마음 그지없다. (17.7.30. 15매 사진 19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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