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문화 체험기 8] Fully Booked가 필리핀의 지성을 꽃피워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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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문화 체험기 8]
Fully Booked가 필리핀의 지성을 꽃피워주기를…
이 웅 재
6:00 임서방이 퇴근을 하자마자 아파트 앞쪽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잔다. 이번에는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아파트와 붙어있는 건물의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이름은 “ZAO”, 인터넷에는 Bonifacio Global City의 Serendra에 위치한 곳으로 나오는 Vietnamese Bistro다. 그러니까 베트남식 요리점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ZAO’는 한자로 ‘早’, 곧 ‘아침’이라는 뜻이라서, ‘아침’이라는 곳에 와서 ‘저녁’을 먹는 셈인데, 베트남식 음식점이니까 그런 것과는 무관한 일이다.
외국 여행을 다닐 때 다른 지방 음식들을 먹어보면 사실상 음식점이 있는 지방의 입맛에 많이 동화되어 있다는 점을 종종 느끼게 된다. 매출을 위해서는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을 터다. 그러니까 좀더 엄격하게 말한자면 원래 그 음식이 있던 나라의 맛에다가 현지의 맛이 서로 습합(習合)되었다는 말이다. ‘습합(習合)’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다른 학설이나 교리를 절충’한다는 뜻이니, 다른 말로 바꾼다면, ‘퓨전(fusion)’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렇다. 세상은 온통 ‘퓨전’으로 바뀌고 있는 시대다. ‘맛’만 그러한 게 아니다. 먹는 시간마저도 그렇다. 예전엔 고기가 귀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푸성귀로만 식사를 하였으니 ‘아침’을 잘 먹어야했다. 그래야 힘을 쓸 수 있으니까. 그런데 모든 게 서구화되면서 ‘디너(dinner)’가 정찬(正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게다가 육류 소비도 늘어나다 보니, 이젠 ‘아침’을 배불리 먹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더군다나 정년퇴직까지 하고 난 백수(白手)들은 아예 점심때쯤 되어 아침을 겸하여 먹는 ‘아점’이 대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것은 어쨌든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그 이름들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종한이가 빵 종류도 시켰던 것 같고, 아, 밥은 빠뜨리지 않았다. 아무리 출처가 분명치 않은 외국 음식을 먹더라도 ‘한국인의 정체성’은 지킨 셈이었다.
그렇게 저녁을 먹은 후에는 다시 어제도 걸었던 Bonifacio High Streeet를 걸었다. 거리는 걷고 싶은 거리였다. 어제도 지나치며 보았던 책방에는 직접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책방은 상당히 큰 편이었는데, 2층으로 올라가면서 1층을 내려다 보니 그 중간에 커다란 젊은 여성의 얼굴 모습이 보였다. 책으로 만들어 놓은 형상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한 모양이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작년에 “사목회”(넷째 목요일마다 모이는 모임) 나들이 때, 충무로에서 남산한옥마을 올라가는 골목에 이와 비슷한 형태의 그림으로 장식한 건물 외벽을 보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이곳 Bonifacio의 책방 이전에도 있을 법한 기법인데, 들어본 기억은 없었다.
내가 본 책방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서점은 일본 키노쿠니야[紀伊國屋, kinokuniya]서점이었다. 나는 키노쿠니야 서점의 책들을, 구경하는 데만도 반나절 이상을 소비하였었다. 저속한 문화가 판을 치는 나라라고 얕잡아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본의 힘은 뭐니뭐니 해도 책이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여기 Bonifacio Streeet의 “Fully Booked”도 앞으로 필리핀을 발전시켜 나갈 견인차 노릇을 하는 곳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책세상’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Fully Booked”, 앞으로 필리핀의 지성을 꽃피워주기를 빌어본다. 2층의 어린이용 책들이 있는 곳의 공간에는 상어를 닮은 커다란 조형물과 물고기 모양의 작은 모형들, 그리고 옛 성을 방불케 하는 조형물들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거리에는 야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리 넓은 대로도 아니지만, 교통경찰이 수신호로 바쁘게 차량들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만큼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전력 사정 때문일까? 번화가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약간 어두운 느낌을 주었다. 양쪽 인도 사이, 가운데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끌여들여 광고 사진을 찍으라는 이벤트도 벌어지고 있었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옛날 성(城)의 그림과 그리고 ‘Once Upon a time’으로 시작되는 설명문을 적어놓은 조형물도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고 있어서 우리도 찍기는 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도자기로 된 길 옆의 조형물도 눈길을 끌었다. 길거리에 책상다리를 하고 외롭게 앉아서 무릎 위에는 커피잔을 올려 놓고 있는 모습인데, 얼핏 구걸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 옆쪽으로 퍼져 나가는 생각의 형상들은 아주 풍요로우면서도 낭만적이며 구름처럼 가벼운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어느 가게에서는 발렌타인데이를 겨냥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상품 진열로 구매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게를 찾는 손님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아서 공연히 내 마음까지 아프기도 하였다.
좀더 지나니, 하트 모양 속에 꽃머리 장식을 한 여인이 한 손 위에 공작새처럼 꼬리가 있는 새를 잡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LOVEISLOVE’라는 글씨가 씌어있는 조형물도 새로워 보였다. 그곳을 지나니, 어제 저녁을 먹었던 중국 만두집인 ‘딘타이펑(鼎泰豐)’이 보였고, 거기서 눈을 돌리니, 이곳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라고 하는, ‘마음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을 지닌 ‘지상낙원’을 가리키는 말로 알려진 ‘Shagri-La’가 보였다.
거기서 우리는 걸음을 돌렸다. 오는 도중에 ‘Pablo coffee’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하여 그 여유로운 맛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아파트로 돌아오니 9:18이었다. 귀가 후에는 노트북으로 한국 방송 “한 끼 줍쇼(사당동 편)”를 보다가 11:30쯤 취침하였다. 이곳에서는 한국에서 방송한 후 2시간 정도 지나면 그 프로를 볼 수가 있다고 한다. (18.3.21.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