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든 ‘Lighter’든 ‘라이터’로 살아가고자 [필리핀 문화 체험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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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문화 체험기 14]
‘Writer’든 ‘Lighter’든 ‘라이터’로 살아가고자
이 웅 재
2월 11일(일) 맑음.
8시에 식당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했다. 유럽의 호텔 식사와는 달리 여기서는 손님들이 줄을 서서 호텔 여직원 몇 명이 배식해주는 음식을 받아서 먹도록 되어 있었다. 후진국의 호텔답게 음식은 소박했다. 밥과 계란볶음, 생선튀김, 고기 다진 것에다가 소스를 얹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먹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떨떠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식사하는 모습은 정말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먹는다는 일 자체를 매우 고마운 일로 여기는 모습이었다. 식후에 셀프로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야 나도 그들처럼 행복한 척하는 분위기에 휩쓸릴 수가 있었다.
배를 채웠으니, 이제는 정말로 행복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바다로 나갔다. 오늘은 아이들만 바다수영을 하도록 하고, 어른들은 수영장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수영을 하고 있는 것을 보거나, 아니면 수영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돌아다녔다. 이곳에는 어제 호텔로 들어올 때 보았던 바다독나무가 많이 있어서 좀더 자세하게 관찰을 해 보았다. 혹시 그 마름모꼴의 열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여 쪼개 보려 하였으나 너무 단단하여 쉽게 쪼개지지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본 바로는 이 나무에는 독성이 많아서 새들도 잘 날아와 앉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힘 들이지 않고 쪼개졌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바다에서 나와 합류했다. 서영이가 말했다.
“바다 속에 손바닥만 한 물고기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그럼 잡지?”
“살아있는 걸 어떻게 잡아요?”
“난 서영이가 무척 동작이 빠른 줄 알았는데? 서영이 덕에 생선회를 먹을 수 있을 뻔하다가 말았네…. 그래, 무슨 고기든?”
“이름도 몰라요. 처음 보는 놈들인데….”
“그래, 앞으로는 물고기 이름도 좀 알아두고, 나무나 풀이름 따위도 많이 기억해 두어라.”
“왜요?”
“엊그제 마닐라 대성당엘 구경 갔었는데 말이다. 거기 약초와 식용 작물들 그림이 많더누나. 블랑코라는 사람이 연구하고 그려 놓은 것들이었는데, 그런 것들이 필리핀 사람들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무얼 하나 보더라도 그냥 지나치지 말고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해 놓도록 하려무나.”
“우리나라엔 그런 사람이 없었나요?”
“왜,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 세종 때에는 강희안(姜希顔)이라는 어른이 ‘양화소록(養花小錄)’이라는 책을 써서 꽃나무에 대한 지식을 넓혀 주었고, 아, 그래, 정조 때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이란 분의 이름은 들어보았겠지?”
“예, 들어봤어요.”
“그분 형님으로 정약전(丁若銓)이란 분이 계셨는데, 천주교 박해사건 때 흑산도(黑山島)로 귀양을 가서 지내면서 그 지역의 물고기 등에 대한 책을 쓰시기도 했단다.”
얘기가 길어지면서, 딸내미와 사위도 얘기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는 대로 좀더 부연설명을 했다.
“그분이 쓴 책 이름을 흔히 ‘자산어보(玆山魚譜)’라고 하는데, 나는 ‘현산어보’라고 읽기도 한다. 검을 현(玄) 자가 두 개인 이 ‘자(玆)’ 자는 ‘검다’는 뜻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된다는 말이다. 그가 귀양 가 있던 곳이 바로 ‘흑산도’였으니까, ‘흑산’을 조금 다른 표현으로 ‘현산’이라고 한 것이지.”
한문선생을 하다가 휴직을 하고 남편을 따라온 딸내미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종한이가 엉뚱한 말을 하면서 끼어들었다.
“아빠, 할아버지는 직업이 뭐예요?”
글쎄다, 무어라고 대답을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사위가 받았다.
“작가시란다.”
틀린 말은 아닌데 조금은 생소한 느낌이었다. 작가라는 말로 지칭되어 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는 정년퇴직을 했으니 현직 교수는 아니고, 지금은 수필을 계속 쓰고 있으니 작가라고 했을 것인데, 글쎄, 수필가라는 소리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작가라는 소리는 낯선 느낌이었다. 종한이는 저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큰아들이 입국신고서 등 작성법을 가르쳐줄 때, 직업란에 ‘Writer(작가)’라고 써 주는 것을 보고, 그거 발음을 좀 잘못하면 ‘Lighter(라이터)’가 되어버리겠다고 생각하며 웃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점화 기구인 ‘라이터’만큼 잠깐이라도 불빛을 번쩍! 발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담뱃불을 붙이기 위한 라이터는 사양하겠지만 말이다. 가끔 한밤중에 느닷없이 전기가 나갔을 때, 그래서 두꺼비집을 찾아 퓨즈를 이어주려 할 때, 라이터는 얼마나 요긴한 물건이 되던가? 그래, 앞으로는 ‘Writer’든 ‘Lighter’든 ‘라이터’로 살아가고자 노력을 해야겠다.
12시가 되기 전 체크아웃을 했다. 그때 보니 체크인하려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체크아웃 후 차를 몰고 근처 바닷가 별장들이 있는 사유지를 찾아보았다. 근처에는 이렇게 철문이 굳게 닫혀있는 사유지가 많은 까닭에, 우리가 묵었던 호텔 말고는 이곳 해수욕장을 이용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고 있구나 싶었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필리핀은 아직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빈부의 차이가 문화의 차이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나라로구나 하는 생각이 고정관념처럼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18.4.1.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