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에 나타난 다산의 생각
18.7.20. "수필문학" 세미나 (양평군 평생학습센터 2층 대강당)에서 발표한 내용임.
『목민심서』에 나타난 다산의 생각
이 웅 재
1.들어가는 말
오늘의 이 모임은 “수필의 날”을 기념하기 위한 모임이다. 아시다시피 “수필의 날”은 연암 선생(1737~1805)이 『일신수필(馹迅隨筆)』을 처음 쓰기 시작한 날인 (1780년) 7월 15일이었다. 해서 “수필문학사”에서는 해마다 이날을 전후해서 하계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그럴 때마다 연암 선생에 대한 논의가 있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외연을 확대해 보자는 의견들이 있었다. 마침 금년이 『목민심서』가 저술(1818년)된 지 꼭 200주년이 되는 해인데다가, 하계 세미나도 마침 다산의 고향인 양평에서 열리게 되어, 그 외연을 『목민심서』로 넓혀보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대양서적(大洋書籍)의 『목민심서』(1973) 해제에서 남만성(南晩星)은 말했다.
“근세 한국의 학문은 유학(儒學)의 기초 위에 두 줄기의 학통(學統)이 있으니 하나는 성리학(性理學)이고 하나는 실학(實學)이다.…실학을 크게 나누어 두 갈래로 볼 수가 있다. 하나는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인 성호 이익(李瀷)의 학파요, 다른 하나는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인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학파이다.…다산은 어디까지나 성호학파에 기본을 두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연암학파의 이용후생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연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연암학의 외연으로서 다산학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특히 다산이 주교(舟橋)의 가설, 수원성 축조 시 고정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녹로(轆轤)와 거기에 움직 도르래의 원리까지 이용한 거중기(擧重機)의 고안 등을 하였다는 점은 바로 이용후생학의 발현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거중기는 40근의 힘으로 그의 625배인 2만 천근의 무게를 들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등은 중국 고증학(考證學)의 영향으로 실증을 통하여 경전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에 입각하여 사물을 탐구할 것을 주장하던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로 이해하기도 한다.
2. 다산의 생애(‘다산학술문화재단’의 것을 기초로 함)
1) 출생과 성장기(1762~1782)
다산은 1762년(영조 38년) 6월 16일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미용(美庸), 용보(頌甫), 귀농(歸農)이고, 호는 삼미자(三眉子), 사암(俟庵), 열수(洌水), 다산 (茶山)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 시호는 문탁(文度)이다.
2세 때 완두창을 앓아 눈썹 위에 천연두 자국이 남아 눈썹이 3개로 나뉘어 삼미자(三眉子)란 호를 썼다. 10세 때에는『삼미자집』을 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16세에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저서를 접한 후, 실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정치 참여의 시기(1783~1800)
22세 때인 1783년(정조 7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고 이때부터 정조의 눈에 띠어 총애를 받았다. 23세 때 천주교를 처음으로 접하고, 한때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곧 손을 떼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28세 때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경기도 암행어사,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31세 때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이 되고, 당시 진주목사로 있던 부친이 별세하였다. 수원성을 설계하고 녹로(轆轤)와 거중기(擧重機) 고안, 수원성 축조에 이용하여 경비 4만량을 절약하였다. 38세에 형조참의가 되었다.
3) 강진 유배 생활의 시기(1801~1818)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유배형을 받게 되고, 이어서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사건으로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康津)으로 귀양을 갔다. 이후 차츰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되면서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짓고, 제자 18명을 교육하였다.
4) 고향에 돌아와 생활한 시기(1819~1836)
57세 되던 해인 1818년(순조 18년)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18년 만에1836년(헌종 2년) 7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목민심서』의 뜻
다산은 말했다.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한국고전종합 DB, 자서(自序)
다산은 어려서부터 수령을 지내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백성들의 실정을 눈으로 보기도 했었고, 또 정조의 어명으로 경기도 암행어사로 지내면서 농민들의 고통을 직접 겪어본 일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오랜 유배생활를 하면서 지방관들의 횡포와 교활한 아전들의 농간으로 인하여 겪는 농민들의 억울한 모습을 직접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목민의 도’를 밝혔지만, 기나긴 유배생활이 끝날 무렵에야 초고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심서(心書)」라는 제목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유배에서 해배되어 고향 마현(馬峴)으로 돌아온 후, 손질하고 보완하여 1821년 12부 72조의 『목민심서』를 완성했다.
4. 목민관은 구하여 얻어서는 안 된다
『목민심서』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부임 6조’인데, 그 첫 마디를 보자.(인용은 ‘한국고전종합 DB’을 주로 하였고, 필요에 따라서 ‘대양서적’의 것을 이용하였다.)
“다른 벼슬은 스스로 희망하여 얻어도 좋으나 목민관은 스스로 구하여 얻어서는 안 된다.…오늘날의 수령은 홀로 만민의 위에 우뚝 서서 간사한 백성 세 사람(좌수ㆍ좌별감ㆍ우별감을 말하는 듯하다)을 좌(佐)로 삼고, 간사한 아전 60~70명을 보(輔)로 삼으며, 사나운 자 몇 사람을 막빈(幕賓:비장, 또는 막하에서 가까이 믿는 사람)으로 삼고, 패악한 무리 10명을 복례(僕隷)로 삼았다. 이들은 서로 끼리끼리 뭉치어 수령 한 사람의 총명을 가리우고, 사기와 농간을 일삼아서 만백성을 못살게 한다.…비록 덕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위엄이 없으면 하기 어렵고, 비록 하고 싶은 뜻이 있다 하더라도 밝지 못하면 하지 못한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박심(朴心)’이니 ‘문심(文心)’이니 하는 말을 슬쩍 끼워넣거나 타천(他薦)을 가장한 자천(自薦)으로 목민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사(莅事:관리, 즉 수령이 부임하여 실무를 맡아보는 일) 조(條)에서는 말했다. “관청의 일은 기한이 있는데, 기한을 믿지 않는 것은 백성들이 명령을 희롱하는 것이니, 기한은 믿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기한을 지키라는 것은 신의를 지키라는 말이다. 조선 건국 당시, 한양의 도성을 쌓을 때도 인의예지를 의미하는 4대문을 세우고 그 중앙에 믿음을 뜻하는 보신각(普信閣)을 세우지 않았던가?
제2편은 ‘율기 6조’이다. 율기(律己)란 자신을 가다듬는 일이다. 여기서는 시(詩)나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는 일도 경계하였으며, 특히 청렴한 마음가짐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목민관은 스스로 구하여 얻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다른 사람의 청탁도 물리쳐야 한다고 하였다.
5.세금은 어느 정도를 내는 것이 적당할까?
제4편은 ‘애민(愛民) 6조’이다.
양로(養老), 자유(慈幼)와 사궁(四窮) 곧 환과고독(鰥寡孤獨) 등을 구제하는 진궁(振窮), 상사를 당한 사람을 보살펴 주는 애상(哀喪), 그리고 요새 실정으로 말한다면 장애인의 복지라고 할 수 있는 관질(寬疾), 그리고 구재(救災)가 여기에 속한다.
제6편은 ‘호전(戶典) 6조’이다. 호전은 토지관리 및 조세규정 등을 적은 내용으로, 수령의 직분 54조 중에 전정(田政)이 가장 어렵다고 하였다.
은결(隱結)과 여결(餘結)이 해마다 불어나고 궁결(宮結: 각 궁에 내려준 결세)과 둔결(屯結:지방 관청의 경비나 군량 충당을 위해서 하사한 결세)도 해마다 늘어나서 국가에 납부되는 원전(原田)의 세액이 해마다 줄어드니, 장차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를 걱정하였다. 잡초가 우거진 황폐한 전지, 물에 잠기고 사태가 난 전지, 백성이 떠나가서 버려진 전지가 원전의 총수에 채워지고, 기름진 전지가 모두 은결이 되어 있다고 했다. 여결은 양전(量田) 때 전답의 결수를 실제보다 줄여서 토지대장에 기록해놓고 그 나머지가 여결이 되는데, 그 여결은 관리가 개별적으로 전세를 수납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정(田政)은 정지구일법(井地九一法), 곧 정전법(井田法)을 회복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전법’이란, 하나의 농지를 ‘井’자 식으로 나누면 모두 9등분이 되는 셈인데 그 중 가운데 것 하나를 세금으로 바치던 법이었다. 그러니까 소득의 1/9을 내는 셈이었다. 서양에서는 어떠했을까? 가장 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기독교에서의 ‘십일조(十一租)’라고 하겠다. 1/9이나 1/10, 이것이 과거의 일반적인 세율이었다. 현대에 와서는 ‘복지’ 개념이 더해져야 한다. 최소한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생활을 책임져야 된다는 말이다. 곧 소득의 2/10, 20%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은 2007년 22.7%로 상승하였고 국민부담률은 매년 상승세를 지속한다고 한다. 아직은 OECD 30개 회원국 평균 조세부담률(26.8%)에 비해 낮은 수준(조세부담률 25위)이라고 하지만(기획재정부의 공식 블로그http://bluemarbles.tistory.com/486 [몬이의 블루마블]), 20%를 넘는다는 것은 세금이 쓸데없는 곳으로 빠져나가고 있기도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전의 부정을 잘 살피”라는 『목민심서』의 말이 새삼스레 크게 울린다. 더군다나 최근에 와서는 예전의 ‘아전’에 해당하는 공무원들보다도 오히려 지방관 자신들의 인기를 위하여 ‘선심 행정’마저 남발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곡부(穀簿)에서는 환상(還上= 환곡, 환자)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차츰 연 1~2할의 이식을 징수함으로써 구제가 아니라 과세나 이식의 수단으로 변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허위장부를 작성하는 번질(反作), 저축해야 할 양곡을 사사로이 대여한 가분(加分), 겨나 돌을 섞어서 한 섬을 두 섬으로 불리는 분석(分石), 창고에 없는데 실물이 있는 듯이 보고하는 허류(虛留) 등의 폐습도 지적하였다. 또한 호적을 부요(賦徭≒부역)의 근원으로 보고 호적이 올바로 작성되어야 부요가 공평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부역이 공평치 않아, 만 집이 있는 고을에 9천 집은 부역을 도피하고 오직 홀아비와 과부, 병들고 불구가 된 사람들만이 부역에 응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남만성(南晩星)은 대양서적의『목민심서』해제에서 말했다.
“『목민심서』의 도도한 수천 마디의 이야기도 실은 이 호전 6조의 일과 아래에 나오는 병전 6조 중의 첨정(簽丁)에 대한 일만 올바르게 처리한다면 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이다.”(p.43.)
6.스스로 자신의 양물(陽物)을 자르다
제8편은 ‘병전(兵典) 6조’이다. 그 첫 대목은 첨정(簽丁:장정을 병적에 올리는 일)이다. 국초에 호포(戶布)는 있었어도 군포(軍布)는 없었으나 중종조에 이르러 군적이 있는 자에게 복역하는 대신에 포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군포라는 이름 자체가 벌써 바르지 못하다고 하였다. 군사란 유사시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일인데, 그러한 책임을 지우면서 먼저 재물을 내라고 하니 그런 이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배가 불룩한 것만 보고도 이름을 짓는가 하면 여자를 남자로 바꾸기도 하며, 더욱 심한 것은 강아지 이름을 군안(軍案)에 기록하기도 하고, 절굿공이의 이름이 관첩(官帖)에 나오기도 한다고 하였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중 『다산시문집 』에는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가 있다.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나갔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이 집 삼대 이름 모두 군적(軍籍)에 실렸네…/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군적에 오르면 세금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죽은 지 3년 지난 사람도, 방금 태어난 아이도 군적에 올라서, 남편이 ‘아이 낳은 죄’라면서 스스로 자신의 양물(陽物)을 잘랐다는 것이다.
첨정(簽丁) 다음에 나오는 항목은 연졸(練卒)이다.
“장차 목숨을 바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넉넉하게 살도록 하여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군부(軍簿)에 들어가는 것을 마치 벼슬에 오르는 것처럼 생각하여 물리침을 당할까 걱정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이른바 속오(束伍:평시에는 군포를 바치게 하고 유사시에 군역을 치르게 하는 법)는 사노(私奴)와 천민들로 구차하게 그 숫자만 채운 것이라, 어린아이와 늙은이들을 섞어 대오를 편성하였다. 게다가 대오가 오래 비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함께 섞여 있으므로 임시로 사람을 사서 하루의 병역에 응하도록 한다.… 이미 이렇게 되고 보면 연졸(練卒)이란 모두 헛된 일이다.”
“군중에서 금품을 추렴하면 마땅히 군령을 쓰되 효시하는 대신에 죽기 한하고 곤장을 칠 것이요,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모두 중벌을 입을 것이다.”
수병(修兵) 조에서는 “병(兵)이란 병기(兵器)를 말한다. 병기는 백 년 동안 쓰지 않아도 좋으나 하루라도 준비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병기를 관리하는 것은 곧 수령의 직무”라고 했다.
응변(應變) 조에서는 “수령은 곧 병부를 가진 관원이다. 일에는 예측하지 못하는 변화가 많으니, 임기응변의 방법을 미리 강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기도 하였다.
어구(禦寇:외적을 방어함) 조에서는 ‘허(虛)한데 실(實)한 것으로 보여 주며, 실한데 허한 것으로 보여 준다.’ 했으니, 이것 또한 수어(守禦)하는 자로서 알아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대북, 대미 관계를 보면 어느 쪽이거나 우리는 늘 ‘허한 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월드컵 축구를 보아도 ‘허하지만 실한 것’을 추구하니, 우승 후보로 알려진 독일마저도 꺾어서 16강 진출을 막지 않았던가?
7.솔로몬의 명판결
제9편은 ‘형전(刑典) 6조’로서, 소송(訴訟)과 형옥(刑獄) 등에 관한 내용이다. 『한국고전종합DB』의 해설에서는, “형(刑)이란 결국 백성을 다스리는 마지막 방법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칫 남형(濫刑)이 시행될 수 있고 또 농간이 개입되기 쉽다. 그러므로 수령으로서는 널리 살펴 원만히 처리할 수 있는 지략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청송(聽訟;송사를 들어 처리함) 조에서는 “청송의 근본은 성의(誠意)에 있고, 성의의 근본은 신독(愼獨:혼자 있을 때의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
청송(聽訟) 조에서는 진짜 엄마를 가려주는 ‘솔로몬의 명판결’과 같은 얘기도 나온다.
“황패(黃覇)가 영천 태수(潁川太守)가 되었다. 어느 부잣집에 형제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두 동서가 똑같이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맏동서는 낙태한 것을 숨기고 있다가 제부(弟婦)가 아들을 낳자 제부가 낳은 아들을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삼아서 이를 다투어 소송한 지 3년이 되었다. 황패가 사람을 시켜서 아이를 뜰 안에 안고 있게 한 다음에 제부와 맏동서로 하여금 서로 빼앗아 가져가게 하니, 맏동서는 빼앗기를 매우 맹렬히 하는데, 제부는 아이가 다칠까 무서워하는 그 정상이 매우 언짢고 측은해 보였다. 황패가 이에 맏동서를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집안 재산을 탐내어 이 아이를 얻으려 하였다. 어찌 다칠 것을 염려하겠느냐.’ 하니, 맏동서가 그만 죄를 자백하였다.”
8.묘지에 관한 송사가 적폐다.
그런가 하면, “묘지(墓地)에 관한 송사는 지금 폐속(弊俗)이 되고 말았다. 격투 구타의 살상 사건이 절반이나 여기서 일어나며, 남의 분묘를 발굴하여 옮기는 괴변을 스스로 효도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의 묘지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걱정하는 대목도 나오고, 풍수설에 대한 비판적인 표현도 나온다.
“세상 사람들이 곽박(郭璞)의 풍수설(風水說)에 혹하여 길지(吉地)를 탐내 구하느라 몇 해가 가도록 어버이를 장사 지내지 않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이미 장사 지낸 무덤도 불길하다 하여 한 번 파 옮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3~4차 옮기는 자가 있다.”면서,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길가의 분묘들이 모두 담장으로 둘러졌는데, 그 둘레가 수백 보이며 송백(松栢)과 양류(楊柳)를 둘러 심어 그 줄이 아주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요즘에도 몇몇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출마를 하는 높으신 양반들, 그리고 돈 많은 부자들의 경우에는 조상의 묘지를 너무 호화롭게 치장하는 일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중국의 등소평(鄧小平)처럼 화장을 하거나, 얼마 전 별세한 LG그룹의 구본무(具本茂) 회장처럼 화장한 뒤 수목장을 하는 일 등을 본받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런가 하면, 다음과 같은 말들도 새겨들을 만한 것이라 여겨진다.
“중세(조선 중기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주석이 달림) 이전에는 비첩(婢妾)의 소생은 사람으로 치지 않아서 벼슬에 나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과거 응시까지 막았으니 이것은 고금 천하에 없는 법이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었다.”
“무고(誣告)로 옥사를 일으키는 것을 이름하여 도뢰(圖賴)라 하는데, 이런 것은 엄중히 다스려 용서하지 말고 반좌율(反坐律:무고를 입은 사람에게 과[科:형벌을 지우다])한 죄만큼 과죄[科罪]하는 것)로 처결해야 한다.”
“살인(殺人)하여 몰래 매장한 것은 모두 파내서 검시해야 한다.”
한편, 당시 태형의 남발도 거론하였으니, “수령으로서 시행할 수 있는 형벌은 태형(笞刑:작은 광대싸리 가지로 만든 형구 사용) 50을 스스로 결정하는 데 불과할 뿐이니 여기서 넘는 것은 모두 남형이다.…그런데 근래에는 풍속이 거칠어지고 법례를 알지 못하여 태장(笞杖)은 다 폐하고 오직 곤장(棍杖:버드나무로 만든 형구 사용)만을 사용한다.”라고 하였다.
9.약자에 대한 배려
또한 “부녀자는 비록 살옥죄를 범하였더라도 그 태아(胎兒)의 유무를 살피고 나서 형벌을 시행하는 법인데 하물며 다른 죄에 있어서랴?…”면서, “양민의 처가 범죄하면 마땅히 그 남편을 대신 다스려야 하며…”라 한 것도 음미해야 할 말이다.
그런가 하면, “나이 70세 이상과 15세 이하 및 불치의 병으로 폐인이 된 자를 고문 취조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면서, “지금부터 15세 이하와 70세 이상은 살인 강도를 제외하고는 구금(拘禁)을 허락하지 않으며…”라는 세종 12년 교서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대명률』을 인용한 다음과 같은 구절도 보인다.
“무릇 관리로서 창가에서 자는 자는 장육십(杖六十)에 처한다.”, “기생을 데리고 술 마시는 자도 이 법률 조문에 해당된다.”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술주정을 하는 자는 장일백(杖一百)에 처한다.”고도 하였다.
제해(除害) 조(條)에서는 “백성을 위하여 피해를 제거하는 일은 목민관의 임무이니 그 첫째는 도적이요, 둘째는 귀신붙이요, 셋째는 호랑이다.”라는 표현이 있어, 당시 호환(虎患)이 심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남만성(南晩星)은 “형벌의 시행에 대하여는 따로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저술하였다.”고 하였다.
10.운치있는 경관, 꽃을 심고 나무를 심는 일도 필요하다
제10편은 ‘공전(工典) 6조’다. 공전(工典)은 모든 산림(山林)ㆍ천택(川澤)에 대한 수호 관리와 도로(道路)ㆍ성곽(城廓)의 수리ㆍ보수, 그리고 모든 공제품(工製品)의 제작ㆍ관리 등을 들어 논한 것이다. 여기에는 직접 국가 재용(財用)의 이해가 달려 있기 때문에 특히 지방의 수령이 된 자는 이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여 유실이나 훼손이 없어야 함은 물론, 모든 영역에 있어 흥왕을 기할 것을 강조하였다.
산림 조(條)에서는 특히 소나무와 인삼과 관련된 언급이 많은 점이 두드러진다.
『속대전』을 인용한 대목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산허리로부터 그 위는 개간 경작하는 것을 엄금한다. 산허리 이하의 구전(舊田)은 불문에 부치고 새로 나무를 베어내고 밭을 만드는 것은 일체 금지한다.”
이는 북한의 산림정책을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천택(川澤) 조에서는 “냇물이 흘러서 고을을 지나면 도랑을 파서 그 물을 끌어다가 전지(田地)에 대”야 하는데, “도랑을 내는 데는 반드시 먼저 물 흐름을 막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큰 돌을 사용하여야 큰 물이 날 때에도 보가 붕괴되지 않을 것이다. 무릇 큰 돌을 운반할 때는 반드시 기중법(起重法)을 써야 한다.”고 하면서, ‘유형차(游衡車:일종의 수레)’, 기중가(起重架: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내리는 기계), 용미(龍尾: 물을 끌어올리거나 물을 빼는 용구), 옥형(玉衡:우물에 고인 물을 푸는 용기) 등을 이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면서, 이용후생을 역설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누정(樓亭)의 한가하고 운치있는 경관 또한 성읍(城邑)에 없을 수 없는 것”이라든가, “청사의 관리가 잘 된 뒤에는 꽃을 심고 나무를 심는 것도 또한 맑은 선비의 사적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원리원칙에만 얽매인 고루함을 벗어나는 여유도 보여주고 있었다.
선해(繕廨) 조에서, “이교(吏校:서리와 장교를 통틀어 이르던 말. 중인 신분으로 양반과 양민의 중간)와 노예 등속은 마땅히 부역에 나가게 해야 하며, 중들을 불러 모아 공사를 돕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하여, 조선조가 숭유억불의 유교국임을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11.자발적이지 못한 권분은 예가 아니다
제11편 ‘진황(賑荒) 6조’의 권분(勸分:고을 수령이 관내의 부자들에게 권하여 극빈자를 구제하던 일) 조의 “상을 주어 권하였고 위협으로 하지 않았으니 오늘날의 권분(勸分)이란, 예가 아님이 극심하다.”는 표현을 보면, 강권(强勸)하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수재의연금이나 성금 따위가 자발적이지 못한 경우들이 종종 있는 듯이 보여서 문제가 되기도 하질 않은가? 그런가 하면 성금의 배분이 투명하지 못하다든가, 성금을 뇌물로 치부한다든가 하는 일들도 있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지막 제12편 ‘해관(解官) 6조’는 수령이 해면되었을 때의 태도와 치적 등을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수령은 이때를 위하여 더욱 자중하고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해야 한다.
한편, 문순태의 장편소설 『다산 정약용』(큰산, 1992.10.20.)에서는, “다산(茶山)을 생각하면 그의 유배생활이 그리워진다.…내게도 유배생활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다산의 유배생활에 대한 그리움은 부러움으로 변했다.”(p.6.)라는 표현도 보였다. 그만큼 다산을 실학계의 우뚝한 봉우리로 만들어준 일이 바로 유배생활이었다는 뜻이겠다. (18.7.13.6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