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발가락의 때

거북이3 2018. 8. 7.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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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가락의 때

                                                                                                                                       이 웅 재

  탄천 산책, 매일같이 빼먹지 않는, 빼먹어서는 안 되는 내 일과 중의 하나다. 사실 이것은 내 자발적인 일과가 아니었다. 평생 ‘운동’하고는 담을 쌓아온 처지이지만, 나이를 먹다 보니 마나님과 아이들이 ‘걷는 것 이상 좋은 운동이 없다’면서 반 강권하여 마지못해 시작한 일과였다. 그러던 것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고 한 구약 성서의 한 구절을 닮아, 이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같이 실행해야 하는 일로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오늘도 탄천 산책을 하였다. 헌데, 이제는 전과 같지 않아서 걷는 속도도 좀 느려졌거니와 걷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자질구레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그전 같으면 돌아온 즉시 샤워를 하였는데, 이젠 그게 귀찮아진 것이다.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산책에서 돌아온 후 샤워는 조금 쉬고 난 다음에 하기로 하고, 먼저 양말을 벗고는 그 양말로 발가락 사이의 때를 훑어내고 있었다.

  “웬 궁상이에요, 궁상이….”

  당연한 지청구가 뒷덜미를 후려친다. 나는 꼼짝도 못하고 화장실로 직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어제 ‘매화랑’ 모임을 끝내고 모란역 지하철 맞이방을 지나가던 때의 일을 떠올렸다. 지팡이를 짚고 가던 어느 노인 한 분이 벼락같이 화를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던 것이다.

  “이 발가락의 때보다도 못한 놈!”

  무엇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나셨을까? 하도 궁금해서 따라가서 여쭤보았다. 지하철 임산부석 앞에서였단다. 핑크빛 자리임을 알고 불편한 다리를 지팡이에 버티고 서 있었는데, 갑자기 청년 하나가 그 자리에 잽싸게 앉더라는 것이다. 전동차는 멈춰섰고, 자신은 빨리 내려야 하는 터라 미처 그 청년에게 일갈할 짬이 없어서, 지금에야 터져오는 속 풀이를 하고 있는 터수란다.

노인은 가 버렸고, 내게는 그 노인의 고함소리만이 남았었는데, 그 소리가 새삼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발가락의 때?’ 왜 ‘손가락의 때’라는 말은 없을까? 아마도 손은 항상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보니, 손가락 사이에는 때가 끼일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일까? 아니, 그보다도 사람들이 손가락보다는 발가락을 더 업신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손가락은 다섯 손가락 모두 명칭이 따로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여, ‘그림자 놀이’도 할 수가 있는데, 발가락은 통상 엄지와 새끼만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도 손가락만큼의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던가?

  발가락 자체로만 해도 이처럼 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존재인데, 거기에 ‘더러움’의 대명사인 ‘때’까지 합세한 것이 ‘발가락의 때’가 아닌가? 놈은 냄새도 고약하다. 퀴퀴하기 그지없는 그 냄새는 ‘썩는 냄새’임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호주 여행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버스로 이동하는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술안주로 오징어를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그랬더니 현지 기사 양반이 무어라고 소리를 꽥 지르더니 버스 운행을 멈추고 문을 열고 내려가서는 한 두어 시간쯤이나 지나서야 다시 나타났다. 그에게는 그 냄새가 그토록 고약했던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그들에게는 그 냄새가 ‘시체 썪는 냄새’로 느껴지더라고 했다. 그 이후로 외국 여행을 할 때에는 절대로 오징어, 김치, 깻잎 장아찌 같은 냄새나는 것들은 ‘지참 불가 식품’으로 규정해 놓았다. 말하자면 ‘발가락의 때’와 엇비슷한 처우를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발가락의 때보다도 못한 놈’이라니? 그것은 ‘발가락의 때’보다도 훨씬 더 형편없는 존재라는 말이 아닌가?

  아내 덕에 발가락의 때를 씻었더니 기분이 상쾌하다. 역시 ‘아내의 말은 들어야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 씻으면 계속 깨끗하고 상쾌한 느낌도 지속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때’란, 특히 ‘발가락의 때’란, 하루만 지나도 다시 끼게 마련인 것이 문제다.

  우리 ‘사람살이’도 그런 것이 아닐까? ‘때’란 ‘더러움’이 아니던가? ‘사람살이’에서 그것은 ‘허물’이요 ‘잘못’이면서, 때에 따라서는 ‘범죄’일 수도 있는 일일 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늘 씻어 없애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건 ‘발가락의 때’처럼 한 번 씻었다고 오랜 동안 개운해지지는 않는다.

  나는 한 때 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허구헌날 예수님의 이름으로 ‘속죄’를 반복하고 있는지를 납득하지 못했었다. 어쩌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회개 한 번 한 다음, 다시 그에 맞먹는 잘못은 저지르지 않으면 될 법한데, 왜 두고두고 속죄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으면 잘못이 없어지는 일이니까 까짓것 한 번 더 회개하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또다시 좋지 못한 일을 범하는 것은 아닐까 여겼었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될 일을, 왜 또 잘못을 저지르고서 속죄를 하곤 하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발가락의 때, 그거, 한 번 씻었다고 늘 깨끗한 채로 지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한 번 속죄를 하였다고 늘 ‘원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 알게 모르게 우리는 늘 잘못을 저지르면서 사는 존재라는 점을 뒤늦게야 깨우쳤다는 말이다. 그런 게 바로 인생살이가 아닌가?

  또 한 가지. ‘때’가 ‘때’를 뛰어넘을 때도 있으니, ‘때’를 ‘때’로만 여기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남들이 타기하는 일을 극복하고 자신의 능력을 성취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에게서 삶의 예지를 배워야만 할 것이다. 남보다 훨씬 많은 발가락의 때를 만들면서 성공한 사람들을 잊지 말자는 얘기다.

  강수진, 박지성의 발가락을 생각하면서, 새삼스레 ‘때’도 ‘때’ 나름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18.6.23.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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