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늙은 남편의 용도

거북이3 2018. 11. 3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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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남편의 용도

                                                                                                                                      이 웅 재

 

  안방에서 아직 기상을 하지 않은 나는, 거실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잠이 깼다. 일단 화장실로 가서 눈을 씻고, 머리를 빗은 다음 거실로 나갔다. 거실로 나갈 때 눈곱이 끼어 있거나 머리가 부스스하면 늘 한 마디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누가 늙은이 아니랄까봐 눈곱까지 늘 달고 다녀요? 머리는 또 귀신처럼 산발을 해 가지고.”

  그런데 뜻밖이다. 거실에는 온통 잡동사니로 난장판이었고, 내가 나왔는지 어쨌는지는 전혀 관심 밖이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내가 물었다. 다른 때 같으면 웬 참견이냐?’는 핀잔이 나왔음 직한데 묵묵부답, 계속 무엇을 찾고 있었다.

  “무얼 찾는데?”

  나는 겁도 없이 다시 물었다.

  “열쇠!”

  “열쇠?”

  우리 집엔 열쇠로 열어야 할 물건들이 별로 없다. 있어 보았자 어쩌다 해외여행을 갈 때나 사용하는 여행가방 말고는 열쇠를 필요로 하는 금고따위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열쇠가 없어졌다고 저 난리다. 알고 보니, 수영장 사물함 열쇠란다. 지난달에는 수영장의 물을 새로 갈아야 한다고 한 동안 쉬고, 내일부터 다시 새 단장을 하고 열기 시작한다는데, 그곳 사물함 열쇠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어디에 있었는데?”

  “이 백팩(backpack) 쟈꾸(일본식 말 Chakku:영어로는 지퍼[zipper]) 매달아 놓았다가 한 동안 사용하지 않을 것인데 덜렁대는 게 귀찮아서 어디에다 떼어 놓았었는데.”

  아내는 대답을 하면서도 여기저기 가방이며 물건들을 계속 흩으려놓으며 찾고 있었다.

  “이 백팩 찾아 보았어?”

  나는 아내가 수영장 갈 때면 늘 메고 다니던 백팩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골백번을 더 찾아보았지.”

  “골백번? 백 번이면 백 번이지 은 또 뭔데?”

  드디어 사단이 났다.

  “남은 신경질이 나 죽겠는데, 지금 말장난 할 때야?”

  그랬다. 내가 생각해도 그랬다.

  “‘은 말이야, ‘을 뜻하는 순국어라구.”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제풀에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그래, 내가 꼭 찾아주마.’ 그래서 나도 같이 찾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내가 늘 메고 다니던 백팩부터 수색을 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백을 열었다. 온갖 여성들의 화장품 용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건 왜 꺼집어내구 야단이야!”

  아내의 지청구가 목덜미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말거나, 나는 계속 그 잡동사니들을 뒤져 보았다. 없었다. 있을 턱이 없었다. 이미 아내가 여러 번 뒤져본 곳이 아닌가?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동안은 수영장엘 갈 일이 없으니까 걸치적거린다고 어디에 떼어 보관하기는 했겠지만, 아주 엉뚱한 곳으로 옮기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백 안쪽에 있는 조그마한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그런 주머니는 두 개가 있었는데, 한쪽에서는 요구르트 따위를 퍼 먹을 때 사용하는 자그마한 플라스틱 숟가락이 나왔다. ‘이런 건 왜 넣고 다니누.’ 한 마디 하고는 싶었지만 꾸욱 참았다. 다시 그 아래쪽을 뒤져 보니 이번에는 십 원짜리와 백 원짜리 동전이 나왔다. ‘에구, 버스 토큰 같은 거면 희소가치라도 있을 텐데, 이런 건 꺼내 놓아야 써 버리지 여기 이렇게 묵혀두면 뭐하누.’ 역시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다른 주머니를 또 뒤져 보았다. 무슨 영수증 나부랭이, 은행 대기번호표 등속이 나왔다. ‘거의 쓰레기통 수준이로구먼.’ 다시 속으로만 중얼거리는 혼잣말.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 아래쪽에서 무슨 길쭉한 끈 같은 것이 손가락에 걸려나오질 않는가? 야호! 드디어 찾았다. 그 끈의 맨 끄트머리에 자그마한 열쇠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서 현신(現身)을 하고 있었다.

  “찾았어!”

  내 목소리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딴 선수 같았다.

  “찾았다구!”

  “어디서?”

  “여기, 백팩 안쪽의 작은 주머니에서!”

  “다 뒤져 보았었는데.”

  “설렁설렁 뒤지니까 그렇지!”

  오래간만에 나는 마누라앞에서 아내의 단점을 콕 찝어내며 큰소리를 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하여 늙은 남편의 용도가 간신히 명맥을 이어갈 수가 있게 되었는데, 그래서일까? 그 이후로도 가끔은 늙은 남편의 용도가 더러 필요할 때가 있었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 보자.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행해야 하는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화장실엘 가는 일이다. 화장실에서 끙끙대면서 힘을 주노라면 머리로 그 힘이 올라가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얼마 전 화장실에서 넘어져 죽은 친구 생각이 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화장실에서 넘어지면 힘들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내가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젠 서로가 부끄러워할 일이야 없겠지만, ‘왜 한창 냄새를 피우고 있는데, 이곳으로 들어오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등을 돌리면서 하는 말, “내 원피스 등 쟈크 좀 올려 줘!”

  이게 바로 새로 늘어난 늙은 남편의 용도. 그런데 왜 원피스는 지퍼를 뒤로 달았을까? T셔츠나 점퍼 등등 모두 앞쪽으로 달아 놓았으면서. 하긴 요즈음에는 옆구리에 지퍼가 달린 원피스도 나왔다고 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퍼를 반쯤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렵쇼? 톱니가 옷에 끼어서 더 이상 움직이질 않고 있질 않은가? 이젠 아마도 늙은 남편의 용도도 폐기될 때가 되었나 보다. (18.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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