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 수필문학. 00. 9월호~01. 3월호에 연재하였던, "금강산 기행"을 6회에 걸쳐 새로 올리고자 합니다.
*금강산 기행*
1.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이 웅 재
< 2,000년 1월 15일, 토요일, 맑음 >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설레어야 할 상황에서 전혀 감정이 일지 않을 때는 스스로도 황당함을 느낀다. 초등학교 때 소풍가기 전날 밤만큼도 설렘이 느껴지지 않다니…. 분단 반 세기만에, 가볼 수 없었던 곳 금강산을, 그것도 2,000년대 벽두에 구경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이렇게 마음이 무덤덤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이제는 금강산 관람이 일반화되어서일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남북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언젠가 실향민들을 위해 북한의 흙을 페트병에 담아 나누어준 적이 있었다. 그걸 조카가 얻어다 주기에 무척이나 감격했던 기억이 아직 새로운데, 정작 금강산을 직접 등반하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마음이 들뜨지 않으니, 이게 무슨 조화일까? 이건 아무래도 역설일 수밖에 없다. 원래가 큰일은 대수롭지 않게, 별일도 아닌 일은 엄청나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내 어리석은 관습 때문인 것일까?
동해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도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에도 아무런 감회가 없었다. 날씨는 쾌청했고, 겨울치고는 기온도 그리 낮지 않아 양지쪽에 보이는 무덤들만이 마음을 오히려 푸근하게 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무덤을 보면 매우 편안한 느낌을 가진다. 둥그스럼한 봉분, 그것은 ‘알’의 형태를 지닌다. ‘알’이란 생명의 원초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양지쪽의 무덤, 무덤의 봉분은 온전한 형태의 원형이 아니다. 그것은 반원의 형태, 나머지 반원은 땅 속으로 묻혀버린 모습이다. 그것은 과거 생명체였음을 드러내는 한편, 이제는 영원한 휴식에 들어간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살아 생전의 모든 애증과 갈등, 고통과 번뇌를 잊고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무한한 시간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 영면을 즐기고 있는 모습, 무덤은 바로 그러한 모습인 것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무덤에서 푸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원주를 지나 한참을 더 달리다 보니, 가까이 보이는 차창 밖의 나무들이 눈꽃을 피우고 있었다. 들판도 보니까 새하얀 눈이불을 덮었다.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설경이 펼쳐지고 있어 비로소 내가 여행길에 올랐구나 하는 자각을 할 수 있었다. 눈꽃-그것은 시각적으로는 어느 꽃 못지않게 화사하지만 향기가 없는 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 향기를 발하지 않는 대신, 보는 사람들 자신의 마음 속에서 향기를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조향(造香)의 꽃이었다.
녹색의 나무에 피어나는 순백의 꽃-그것은 그대로 순수였다. 그래, 지금의 내 마음을 순백으로, 순수로 가득 채워보자. 그런 다음, 금강산에서의 느낌을 그 순백의 도화지 위에 하나하나 새겨 넣기로 하자.
가다가다 말라죽은 나무들의 잔해가 보인다. 그런데, 그것은 그것대로 멋스러웠다. 우리 강산, 어느 한 곳인들 가경(佳景) 아닌 곳이 있으랴?
대관령 조금 못 미쳐서는 왼쪽으로 보이는 민둥산에 드문드문 어쩌다 하나씩 서있는 소나무가 정갈하다. 무딘 붓으로 뭉뚱 그려놓은 수묵화 같은 소나무들에게서는 외로움보다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겨울철의 소나무는 고절(孤節)을 상징하는 것일까?
대관령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나서, 버스는 다시 달린다. 그런데 대관령을 넘으면서부터는 눈이 없었다. 눈도 다리가 아파 대관령에서 한참 쉬다가 그냥 그곳에 눌러앉았나 보다. 휴게소에서 산 번데기 안주로 가지고 간 국산 양주 한 잔에 온몸이 사르르 녹는다.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는 차창 밖의 풍경도 차라리 이른 봄 풍경 같다.
동해시에서 점심을 먹은 후, 나를 장전항까지 데려다줄 풍악호에 올랐다. 출입신고서의 방문증명서 번호는 347항차 338번, 풍악호 승선권의 객실 번호는 5층 A266호, ‘나’반 7조에 속해 있었다.
금강산 관광에 이용되는 배는 봉래, 금강, 풍악호의 셋인데, 봉래호는 현재 비수기인 겨울철을 맞아 수리 중이라 한다. 1,300여명을 수용하는 금강호에 비하면, 풍악호는 그 절반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금강호보다 불과 몇 m밖에 짧지 않다고 하니, 고객 서비스를 위한 내부시설 면에서 보면 풍악호가 제일 훌륭한 셈이겠다. 그런 풍악호의 석식 뷔페는 웬만한 호텔 수준만큼 훌륭했다. 술과 안주 이외의 것은 모든 것이 무료이고 서비스도 좋았다. 그런데 술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린 소주 반 병 정도로 된 페트병 하나가 4,400원, 소주 4잔이 간신히 나오니 소주 한 잔에 1,100원인 셈, 함께 갔던 K선생과 나는 워낙 소심해서 그걸 1병 이상 사 마실 수가 없었다. 해서 6층에서 공연되는 쇼 구경도 못하고 객실로 돌아와, 가지고 간 팩 소주에 양주를 칵테일해서 마시며 T․V에서 방영되는 호주와의 축구전을 보았다. 다행히 3:1로 이기는 바람에 그런대로 씁쓸한 심정을 달래면서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술 기운에 잠깐 눈을 붙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잠이 깨었다. 파도를 가르며 진행하는 배의 롤링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한밤중에 북으로 북으로 진행하는 풍악호. 사방은 적막했다. 이제야 초등학교 때의 소풍가기 전날 밤이 된 듯했다.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둥그렇게 생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유리창문에 눈을 갖다 대었다. 칠흑 같은 어둠. 어디에고 불빛 하나 보이는 곳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기는 공해 상인 것이다. 눈을 아래쪽으로 돌리니 배의 전진으로 인해 생긴 희끄무레한 파도가 배의 엔진 소리를 이끌며 시커멓게 보이는 바닷물 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가끔 그 여파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희끗희끗 잔 물결이 튀어오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한밤중에 배는 잠든 사람들을 싣고 숨어들 듯 북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20여년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웬일인지 나는 눈물이 나오지를 않았었다. 6․25 이후 한때 생이별하였다가 우리 삼 남매를 다시 찾으신 부모님께서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으면서도 무사하게 살아남게 된 목숨만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신다면서 힘든 고생을 마다 않으셨다. 그렇게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두고 눈물이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것이었다.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남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으로. 그러나 나오지 않는 눈물을 어찌할 것인가? 나는 나 자신이 목석(木石)으로 변해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까지 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머니를 땅에 묻고 돌아오는 장의 버스 안에서 예기치 않게 울컥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눈물만이 아니었다. 엉엉 울음소리마저 따라나왔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나 자신도 놀랐다. 억지로라도 울어보려고 했던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울음을 그치려고 노력해 보았다. 다 큰놈이 채신머리없게 엉엉 소리내어 울다니…. 그러나 소용없었다. 울음을 그치려고 하면 할수록 헉헉 숨까지 막혀오면서 쏟아지는 눈물과 울음소리는 그 도를 더해갈 뿐이었다. 주위에서 여러 사람들이 달래고 있었지만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지금이 거의 그때와 같았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무엇인가 치밀어 오르면서 나는 웬일인지 자꾸만 한없는 비애감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게 나는 그런 상태로 시커먼 바닷물과 희끄무레하게 퍼져나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2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