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그리워지는 때
(거북이 18) 바다가 그리워지는 때
이 웅 재
나는 한 해에 네 번 정도 바다가 못 견디게 그리워진다. 대학교를 갓 졸업했던 1966년 2월까지 바다라고는 구경을 못해 보았었는데, 그해 3월 1일 처음으로 바다와 대면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중학교 때의 은사님이셨던 김재규 선생님께서 충무시(통영시로 이름이 바뀌기 전)의 한 여학교로 나를 스카웃하셨던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수녀이시면서 천주교 계통인 그 학교의 교장선생님이셨다. 개학은 3월 2일, 그래서 3월 1일 부산까지 열차를 타고 내려가 충무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바다는 처음 비린내를 풍기며 내게로 다가왔다. 몇 번 코를 찡그리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맡아보는 바다 냄새라서 얼떨떨해하는 사이에 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충무행 여객선에 올라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항구에서 맡았던 그 짭쪼름한 비린내는 나지 않았다. 세차게 물살을 가르며 전진하는 갑판에 서 있는 나에게, 바다는 신비스러운 존재였다. 그는 내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도 그 중의 하나였다.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바다가 소년에게 몰아붙인다. 용기를 가져라! 어떠한 거스르기 힘들 것 같은 난관이라도 때리고 부수고 무너버리고 나아가라고 한다. 바다가 다그친다. 사회에 첫발을 딛기 시작한 나에게, 앞으로 어떠한 고난이 닥칠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뚫고 나아가라고 윽박지른다. 나에게 바다는 그렇게 다가왔다. 바다는 호통이었다. 바다는 외침이었다. 바다는 힘이었고, 희망이었다. 나는 한 해의 새 계절인 봄이 시작되는 3월을 그렇게 바다에 대한 첫 대면으로 시작하였고, 그래서 나는 해마다 3월이 되면 바다가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여름,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 이글이글 태양마저 녹아 흘러내릴 것 같은 여름이면, 카뮤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는 그 강렬한 태양빛 때문에 살인까지 하였다지 않던가? 아마도 그가 영롱하게 맑으면서도 새파란 바닷물을 보았더라면 살인을 저지르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그도 아마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풍덩!’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지는 않았을까? ‘풍덩!’ 그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저절로 흥건히 젖었던 등허리마저 금방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던가?
충무시의 여름은 낭만적이었다. 비진도의 몽돌해수욕장에서 따끈따끈하게 덥혀진 몽돌을 어루만지다가 찰싹찰싹 밀려와서 부딪치는 파도를 따라 그 시원한 바닷물에 온몸을 던져 버릴 때의 상쾌함이란, 천하를 주고도 바꿀 마음이 생기지를 않는다. 한산도는 또 어떤가? 제승당 당장께서 학부형이시라 총각선생을 어찌나 반겨주시던지, 지금도 제승당 어귀에 씌어 있던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바다를 보고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마저도 감동하고)이요,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 산을 대하여 맹세하니 풀과 나무도 내 뜻을 아는구나)로다.’라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구가 잊히질 않고 있다. 아,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태양이 펄펄 끓는 여름만 되면 나는 욕지도의 여름밤, 그 밤바다가 못 견디게 그리워진다. 그해 여름방학의 며칠간을 나는 욕지도에서 지냈던 것이다.
어서 가자 가자 바다로 가자, 출렁출렁 물결치는 십리포구 바닷가, 안타까운 젊은날의 로맨스를 찾아서 (헤이), 어서 어서 어서 가자 어서 가 젊은 피가 출렁대는, 저 바다는 부른다 저 바다는 부른다.
저 바다는 부른다. 40여 개의 유무인도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44번째로 큰 섬인 욕지도(欲知島), 지금도 그 섬은 내게 ‘알고 싶은 섬’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거의 50여 년 전의 그 섬은 계속해서 나른 부르고 있다. 외항선들이 와서 정박하고 있던 그 섬은 뱃사람들로 성시를 이루고 있던 섬이었다. 한밤중에 혼자 나룻배를 얻어 타고 변두리 푸르고 깊은 바다에 들어가 누워 있으면, 몸은 저절로 물 위에 둥실둥실 떠 있곤 하였다. 하늘에는 별도 총총한데 저 많은 별들을 땅 위의 인총과 대응시켜 관념했던 우리 옛 사람들의 생각에 오롯이 젖어들기도 하다가 문득 길게 빛을 발하며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면서, 이 지구상에서 또 한 사람이 삶을 마감했구나, 하는 조금은 허망한 생각 속으로 빠져 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별똥별 하나가 바로 나를 향해서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다시 생각하니, 저 많은 별들 중의 하나가 내가 아니라, 내가 있음으로 해서 저 많은 별들의 존재 의미가 생성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역전된 사고에 빠져들면서 나야말로 이 세상의 주인임에 틀림없다는 엉뚱한 관념에 사로잡히던 총각 시절의 한때를 나는 그 욕지도에서 맛보았던 것이다.
그 영향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동해안 경포해수욕장의 사납게 밀려드는 파도보다도, 서해안 대천해수욕장의 그 누우렇고 미지근한 바닷물보다도, 깊고도 잔잔한 그러면서도 마알갛게 파아란, 또는 검은 빛이 돌 정도로 새파란 빛을 띠면서도 한없이 고요한 남해안의 그 바다가 좋은 것이다. 그 때문에 ‘노래방에만 가면 주눅 드는 남자’인 나로서도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어쩌다 노래방에 ‘납치’되어 가서 어쩔 수 없이 노래를 한 곡조 뽑아야만 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닥치게 되면, 너무 고음이라서 따라잡기 힘들어 캑캑거리면서도 이은상 작사의 ‘가고파’를 열창(?)하는 때가 더러 있게 되곤 한다. (14.11.21.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