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 20)조약돌 하얀 조약돌
조약돌 하얀 조약돌 ―통영 기행―
이 웅 재
…(전략)
알알이 모래알을 닮은
추억이
수줍어 살짝
보푼 젖가슴 놀래이는
실뱀
실뱀처럼 되살아.
당신은
조약돌 하얀
조약돌
사로시 내
책상 가에 묻어온
하얀 조약돌.
대학 4학년 시절, 백양로(白楊路)에서 베풀어진 시화전에 출품했던 내 치기(稚氣) 어린 작품의 끝부분이다.
그 제목이 하필 ‘영정(影幀)’이었고, 언제부터인가 그림자처럼 몰려드는 ‘하이얀 영정’의 상(像)으로 ‘당신’이 허구(虛構)의 힘을 빌려 ‘사로시 내 책상 가에 묻어온’ 것이었을까?
우연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듬해인 1,966년,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충무시에 있는 충렬여중․상고에 사회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하얀 조약돌’의 꿈 때문이었을까? 당시 그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김재규 선생님, 수녀이셨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셨던 그분은 나를 그 먼 충무시로 끌어가셨다. ‘당신’을 ‘조약돌’과 등가시(等價視)했던 나로서는 ‘충무’와의 인연을 행운 중의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세상 물정은 전혀 모른 채 무일푼으로 부임을 했었다. 그러한 나를 위한 교장 선생님의 배려는 정말로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1,999년 7월 17일, 지금 나는 그곳으로 제8회 수필문학 하계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33년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내 가슴은 1,966년 때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더욱 두근거리고 있었다. ’66년과 ’99년의 차이, 만으로 따져서 33년. 전세 버스 안에서 나는 줄곧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33년, 66년, 99년…, 이를 우연으로만 치부하고 말 것인가?
귀가 멀어
저리도 하이야니 부서지는
해조음에
귀가 멀어…
꿈길은 바람이 새워
파사(婆娑)한 그리움이 흩날려선
해묵은 탱자나무에 불려간다.
친구에게 보냈던 ‘기별(寄別)’(남해에서 1)의 일부분이다.
나는 그 당시 ‘해조(海潮音)’에 매료(魅了)되어 있었다. 조용한 항구 도시의 해안에 와서 부딪치는 해조음은 나에게 ‘파사한 그리움’을 잉태시키고는 했던 것이다. 매달 봉급은 몽땅 술값으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마신 적도 없다. 학교는 언덕 위에 있었고, 퇴근하다 보면 중간에 구멍가게 겸 대폿집이 하나 있었으며, 나는 어느 새 그 집의 단골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번 심포지엄 때 환영사를 한 김동주 통영시장은 통영의 해산물이 세계 최고라고 상찬(賞讚)을 했는데, 얼마든지 맛있는 횟감들도 별로 대해보지 못하고, 나는 그 대폿집에서 그 당시 가장 싸구려인 마른 가오리를 뜯어먹는 것이 최고의 성찬(盛饌)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조약돌 하얀 조약돌’의 이미지 속에서 외톨이의 ‘외로운 행복’을 나름대로 만끽(滿喫)하며 지냈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남망산 공원의 ‘통영문화회관’. 그곳으로 가는 길에선 만 33년 전의 남망산 길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무한한 감회에 젖어 있었다. 말주변도 없고 숫기가 없는 셈치고는, 벅차 오르는 감회를 누를 길 없어 옆에 있던 여류 수필가들에게 어린애 같은 내 심정을 큰 소리로 떠벌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통영문화회관은 나무랄 데 없었다. 내가 존경하는 이명재 교수님의 “이만하면 외국 어느 곳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건물이랄 수 있겠군” 하는 말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아니었다. 건물은 좋았다. 문제는 남망산 공원이었다. 나는 가끔 외로울 때면 그 공원에 올라 ‘조약돌 하얀 조약돌’의 ‘당신’을 꿈꾸곤 했었는데…( 그 ‘당신’이 실제 인물이었다면, 그런 아쉬움은 남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신’은 실제 인물보다도 내겐 더욱 실제적이었다.)
심포지엄이 끝난 것은 p.m. 7 : 30쯤이었던가? 그리고 이어진 만찬. 문화회관 앞 분수대에서의 만찬은 통영시장님의 배려만큼이나 훌륭했다. 옆에서는 분수가 넘쳐흐르고, 사방에서는 가스등이 넘쳐흐르는 물줄기를 환상적으로 비춰주고, 정말로 낭만적이었다. 그런데도 내 가슴은 왜 뻥 뚫려 버렸는지?
남망산은 없었다. 아니, 충무가 없었다.
실제로도 충무시는 없어졌고, 통영군과 합쳐진 통영시가 있을 뿐이었다.
Milk 찻잔 속으로
내 사념은 침전되어 가고
뚜우우―.
밤배 떠나가는 소리.
Milk 찻잔 속엔 이제
항도(港都)가 움직입니다.
맡겨두었던 사념일랑 다시 찾아
아쉬운 마지막 시간을
홀짝 들이마셔야겠습니다. ( ‘남해에서 2’ 중에서)
통금(通禁)에 쫓기면서 나는 곧잘 항남동의 어느 다방에서 차를 마시곤 했었다. 기다리는 사람도 떠나보내는 사람도 없이. 그때의 심정을 다시 한 번 느껴보려고 했었는데… 공주섬에 인사라도 하려고 했었는데…
마리나 콘도. 그곳은 시내에서 뚝 떨어진 곳이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자유시간도 없었지만, 자유시간이 주어졌대도 내가 근무하던 학교를 찾아가 보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만 33년만의 그리움은 상호도 기억나지 않는 ‘×× 노래방’에서 ‘섬마을 선생님’의 가락만 남긴 채, 그렇게 내게서 아스라히 사라졌다.
영정(影幀).
충무로 오기 1년 전 이미 나는 ‘영정’을 제목으로 썼던 것이다. 왜 그때 ‘영정’이란 제목을 썼었던지?
충무시는 이제 없었다.
‘ 영정’―그리고 ‘하얀 조약돌’은 어디에 가야 만날 수가 있을까? 뻥 뚫린 가슴 속을 비릿한 바닷바람이 스쳐간다. 통영이여, 안녕.
밤이 깊어간다.
신창원이 잡혔단다.
(통영의 향기. 통영시. 01.6.15. pp.199-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