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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24) 충무여, 안녕

거북이3 2019. 11. 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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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이 24)

           충무여, 안녕

                                                                                                                                        이 웅 재


  ‘글짓기 대회에서의 이변은 내 생활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 중 하나는 하숙집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하숙집은 하숙을 반 전문으로 하는 집이라서 썩 마음에 드는 집이 아니었다. 게다가 학교에서의 거리도 웬만큼 떨어진 곳이다 보니, 자연히 마른 가오리와의 해후도 잦아졌던 것인데, 학교에서 가까우면서도 제법 한옥다운, 깨끗하고 안마당마저도 넓은 편인 집에서 나를 하숙생으로 받아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부랴부랴 하숙을 옮겼는데, 며칠이 지나자 주인아주머니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혹시라도 하숙비를 좀더 올려달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닐까, 은근히 걱정을 하면서 만나 보았더니, 자기 딸의 국어 과외를 맡아달라는 전혀 뜻밖의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집 딸은 당시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와는 다른 통영여고 3학년 학생이었다. ‘신출내기 선생이 어떻게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도 없는 처지라서 시계추처럼 학교에만 왔다 갔다 하는 생활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라도 한 번 도전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이 되어 덥썩 고맙습니다하는 말부터 하고 말았다. 가르쳐야 할 학생은 그 집 딸의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다. 그것도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새파란 총각 선생이, 나이로 따져도 몇 년 차이가 없는 여고생과 단 둘이 같은 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과외를 한다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니던가? 과외는 나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입을 위한 과외이다 보니 문제집을 가지고 가르쳐야 하는 일이라서 학교 수업하고는 전혀 다른 수업이었고, 나부터 먼저 문제집과 씨름을 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이제 차츰 충무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남망산에도 자주 올랐는데, 처음에는 기껏해야 항구 근처의 공주섬에나 눈을 주곤 했던 처지에서, 차츰 충무가 내게로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공주섬을 바라보던 눈길을 좀더 멀리 바다쪽으로 보내면 거북등대가 외로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고, 거기서 다시 계속 시선을 이어나가면 파도에 흔들리는 한산도(閑山島)가 가물가물 보였다. 그래, 한산도, 한 번쯤은 직접 가 보아야 할 곳이 아닐까?

  그래서 하루는 일부러 시간을 내었다. 당시 나는 중2 1반인가의 담임을 맡고 있었는데, 제승당 당장의 딸이 중2 2반인가의 반장이었다. 당시에는 의무적으로 학생들의 집엘 가정방문을 해야 하는 때였지만, 그 학생은 내 담임반이 아니었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한산도행을 실행하였다. 바로 늘 바라보던 거북등대를 지나서 당도한 한산도, 섬 입구에서부터 우거진 나무들이 인상적이었다. 제승당으로 향하는 길목 양쪽으로는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라는 이순신의 그 유명한 시구(詩句)가 게시되어 있었다. 결기가 느껴지는 글이었다. 그런데, 최근 서해맹산 정신으로 소명 완수를 하겠다는 어느 장관 후보자의 말을 듣고는 혹시라도 이순신 장군께서 언짢게 생각하시지는 않을는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났을 때였던가? 제승당 당장의 딸이 나를 찾아왔다. 자기 아버지께서 제승당에 한 번 들러 달라고 하신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이미 제승당 답사를 마친 상태라면서, 고마우신 마음만 받겠다고 말해 주었다.

  남망산에서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나폴리, 그곳은 멀리서 바라보는 밤경치가 일품이었다. 때로는 허위허위 미륵산(彌勒山)에 올라 용화사(龍華寺)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곳으로 가려면 속칭 폰데굴이라 불리는 해저터널을 지나야 한다. 지금은 그 위쪽으로 통영대교가 건설되어 이동이 쉬워졌지만, 당시에는 그 퀴퀴한 냄새가 나고 어두컴컴한 폰데굴을 걸어서 건너야만 했다. 기억으로는 정기적인 버스도 다니지 않았었다고 생각된다. ‘폰데라는 말은 이곳 사투리로 판 곳이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일제가 한산대첩에서 전사한 수많은 일본수군의 시체가 떠내려 와 쌓였던 곳으로, ‘조센징이 밟고 다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손으로 파서 만든 해저터널이라고 하는데, 길이 483m의 동양최초의 바다 밑 터널이라고 했다.

  충무항은 언제나 아늑한 느낌이었다. 나는 가끔 바닷가 다방에 홀로 들러, ‘뚜우~’하고 울리는 뱃고동 소리를 찻잔 속에 담아 함께 마시기도 하였다.

  그렇게 충무에 대한 기억들을 하나하나 쌓아나갈 즈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바로 나를 그곳으로 이끌어주셨던 교장선생님께서 학교를 떠나시게 된 것이다. 그 학교는 천주교 재단이었고, 교장선생님께서는 수녀이셨는데, 재단이 바뀌게 되었던 사정이지 싶었다.

  해서 결심을 했다. 이 기회에 나도 충무를 떠나야 한다고. 전혀 낯선 타향에서의 생활은 1년이면 족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쉬움은 많았다. 이곳에서 태어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집, 그리고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 김약국 들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살다 보면 우연히 만나지겠지하는 생각으로 자연스러움을 위해 일부러를 선택하지 않았던 나의 잘못이었다. 그것은 청마 유치환, 동랑 유치진, 대여 김춘수, 초정 김상옥 들 쟁쟁한 대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쉬워하지 말자. 우연히 맞닥뜨리고 또 별 이유도 없이 헤어지게 되는 것, 그런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지금은 떠날 시간이다. 망설임은 쇠털같이 많은 살아갈 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충무여, 안녕, 안녕, 아안녕!!! (19.8.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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