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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인물열전(106)연산군에게 직간을 했다가 장형 40대를 맞았던 정붕(鄭鵬)

거북이3 2019. 11. 14. 10:08


경북 인물열전 (106) 연산군에게 직간을 했다가 장형을 맞았던 정붕(鄭鵬).hwp



       경북 인물열전(106)

              연산군에게 직간을 했다가 장형 40대를 맞았던 정붕(鄭鵬)

                             [大東野乘 己卯錄補遺 新增東國輿地勝覽 29卷 善山都護府]

                                                                                                                                                   이 웅 재

  정붕(鄭鵬:1467[세조 13]~1512[중종 7])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할아버지는 정유(鄭由)이고, 아버지는 현감 정철견(鄭鐵堅)이며, 어머니는 의령 옥씨(宜寧玉氏) 생원 옥형종(玉荊宗)의 딸이다.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으로 태어난 곳이 선산 신당포(新堂浦)였다. 본관은 해주(海州). 재야 학자로 이름이 높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8척 장신에 풍채와 외모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활달하고 구속받는 것을 싫어했으며 식견과 도량이 넓어 숙부인 정석견(鄭錫堅)우리 가문의 옥수(玉樹:아름다운 나무라는 뜻으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이르는 말)라고 말하며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여겨 그를 한양으로 데리고 와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정붕은 성리학 탐구에 매진하면서도 과거에는 뜻이 없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벗하여 자연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고 있었는데, 이에 숙부는 엄하게 꾸짖어 과거를 보게 했다. 그리하여 22세가 되던 1486(성종 17)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149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와 수찬, 사헌부 지평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했다.

  그러나 정붕의 벼슬살이는 평탄하지 못했다. 1494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올곧은 사람들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그 첫 번째가 1498(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다. 이때 사림파의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는데, 그중 사림의 영수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했다.

  무오사화를 주도한 사람은 정붕의 처고모부인 유자광(柳子光)이었다. 정붕은 그와는 거리를 두느라고 했지만 인척인 관계로 모른 척만은 할 수가 없어 새해가 되면 종을 보내 문안하는 예절만은 폐하지 않았으나, 종을 유자광의 집에 오래 머무를 수 없도록 삼노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어 보냈다가 돌아오면 풀어주곤 했다.

  1504(연산군 10)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에는, 놀이와 여자를 좋아하고 매사냥꾼을 모아 사냥에 몰두한 연산군에게 직간을 했다.

천금(薦禽:왕이 講武에 나서 사냥한 노루, 사슴, 꿩 등의 짐승을 종묘에 薦新하는 일. 대체로 음력 10월 전후에 행했다. 왕에 따라서는 강무를 열어도 사냥은 하지 않는다든가, 강무를 아예 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천금에 쓰는 짐승이라고 해서 반드시 왕이 직접 잡은 짐승이 아닌 경우도 있다.)을 이미 했으니 잦은 사냥은 제왕의 도리가 아니므로 중지해야 합니다.”

이 일로 정붕은 장형 40대를 맞았다. 그해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서 사림은 다시 위기를 맞는다. 스승 김굉필이 효수되었고 정붕은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기묘록 보유(己卯錄補遺)를 보자.

  1506년 중종반정 후에 여러 번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또 홍문관 교리로 제수되었는데 벗들이 취임하기를 권하였으므로 마지못해 부임하였으나 얼마 있지 않아서 사퇴하였으며 그 뒤에도 여러 번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은명(恩命)이 간곡하시므로 부득이 조정에 나갔으나, 마음에 놀라운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향에 물러와서 내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낫다.” 하였다. 마음에 어떤 놀라운 일이 있었는가를 물으니, “내가 교리로서 사은(謝恩)하고 대궐에 들어가서 승정원 문 앞에 나아가니, 서각(犀角)(품대[品帶:관인이 관품에 따라 착용하는 띠]의 하나. 시대에 따라 변하기는 하였지만 1품은 서각대[犀角帶], 2·3품 당상관은 금대, 3품 이하는 흑각대를 사용하였다.)를 맨 재상이 돌아서서 있었다. 내가 놀라 머뭇거리며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조금 있다가 돌아보는데 그의 용모를 보니 곧 홍경주(洪景舟)였고, 그의 지위를 물으니 찬성(贊成)이었다. 나는 갑자기 마음에 놀라워서 몸을 피해 물러났고, 벼슬에 뜻이 없어졌다.” 하였다.

  그 후 좌의정 창산(昌山) 성희안(成希顔)의 천거로 청송부사(靑松府使)로 가서 잘 다스렸다. 창산과는 젊었을 때부터 서로 친한 사이였는데, 그가 문안 편지를 보내면서 잣과 꿀을 부탁하였다. ()은 답하는 편지에,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꿀은 민간(民間) 벌통 속에 있는데, 태수(太守)된 자가 어디서 구하겠소하였더니, 창산이 부끄러워 사죄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또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벼슬하지 아니하고 고향에 돌아와 지냈다. 박영(朴英)과의 만남은 이때에 이루어졌다. 박영은 정붕보다 8년 아래였다. 두 사람 간에 이루어졌던 유명한 냉산문답(冷山問答)’은 이때 이루어졌다.(이에 관한 내용은 경북 인물열전 105’를 참조할 것) 냉산 문답으로 박영의 학문탐구의 자세가 비범한데 감탄한 정붕은 박영을 제자로 맞아 집에 머물게 하고 주야로 성리학을 강론하여 그의 학통을 전했다. 후일 두 사람은 사돈관계를 맺어 돈독한 정을 나누었다.

  그가 저술한 안상도(案上圖)’는 성리학 이론서로 당시에 널리 읽힐 정도였으며, 퇴계 이황 선생조차 "학문의 정수를 알려면 마땅히 신당의 안상도를 보라 하였다"고 하였는데, 안상도는 임진왜란 때 손실되어 매우 안타깝다.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개령(開寧:경상북도 김천시)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봉향되었고,구미시 무을면(舞乙面) 웅곡리(熊谷里)에 묘소가 있다. (19.8.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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