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한글학당에는 무궁화꽃이 피어 있었다
6.한글학당에는 무궁화꽃이 피어 있었다
이 웅 재
나는 요새 베트남 사람들의 자존심을 배운다. 그들의 역사는 한마디로 인욕(忍辱)의 역사라고 하겠다. 그들의 역사는 ‘참고 참고 참을 줄 아는 사람들이 엮어놓은 역사’인 것이다. 그들의 역사는 ‘인욕(茵蓐:왕골이나 부들 따위로 짠 자리)’처럼도 여겨진다. 나는 오래 전에 베트남의 남쪽 지방에 있는 구찌(Cu Chi) 터널을 체험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북한에서 뚫어놓은 땅굴이 여러 곳 있다. 그러나 ‘구찌 땅굴’은 달랐다. 그렇게 좁은 땅굴은 처음 보았다. 열대지방에는 나무 등 식물들은 쑥쑥 자라서 키가 큰데, 왜 사람들은 왜소하게 생겼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 작은 체구 하나가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땅굴, 그래서 아주 힘들게 그 땅굴 체험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프랑스 사람이나 미국 군인들은 그 땅굴 속을 통과할 수가 없다. 그러니 땅굴 속으로 숨어버리면 상대방은 속수무책인 것이다.
밀림 속에 이리 저리 뚫어놓은 땅굴, 그것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자존심을 키워준 역사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프랑스를 이겼고, 일본을 이겼고, 미국을 이겼고, 한국을 이겼다. 그런 전쟁을 치르느라고 남자들은 생업에 종사하지를 못하여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일하는 법을 몰랐었다. 농사도 모두 여자들이 짓고 있었다. 남자들은 길가 카페에서 음료수나 마시면서 노닥거리고는 했다. 그런데 요사이에는 그런 빈둥거리는 남정네들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베트남은 이제 달라지고 있었다. 베트남 경제는 요즘 박항서 감독의 연승 행렬처럼 ‘매직’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미마을의 그 쓰라린 상처도 그들은 잘 참아왔다. 그리하여 요즘에는 공산주의 국가답지 않게 적대국이었던 미국과도 친하게 지내고, 한국과의 유대도 돈독하다. 그러한 상반된 베트남 사람들을 만나러 우리는 연꽃마을의 ‘한글학당’을 찾았다. 가는 길은 4차선 1번 국도라는데, 길은 울퉁불퉁하여 우리의 전용버스는 계속 덜컹대면서 시속 60km 정도로 달리고 있었다. 베트남에는 아직 고속도로가 없단다. 어려운 경제 상황, 들끓는 반대 속에서도 고속도로를 건설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에 다시 한번 숙연해졌다. 싸우면 이기는 박항서 감독도 고맙게 여겨졌다. 무엇보다도 선수들 체력과 마음 자세가 문제라고 여겼던 박 감독은 제일 먼저 선수들의 음식을 뷔페로 바꾸어주고, 선수들 하나하나를 꼬옥꼭 품어주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한글학당’은 몇 년 전 우리 “이음새문학”의 제6대 회장이신 전병삼 님께서 학당장으로 지내던 곳이다.‘사단법인 국제연꽃마을’에서 2015년 6월 26일에 준공하였다. 2011년 4월, 꽝남성 땀끼[三記]시로부터 토지 8만2204㎡(2만5000평)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조성했다. 이곳에는 어린이집과 직업훈련원, 기숙사 등도 있었다. 우리를 맞아주는 사람 중에는 헙수룩한 옷차림의 한 남자분도 있었는데, 그분 땅도 몇 천 평인가 여기 부지 중에 포함되어 있다지만, 아직까지 그 보상금을 받지 못한 상태라고도 했다. 이곳에서 봉사하는 분들은 한 달에 우리 돈 1만 원 정도를 받는다는데, 4~5만 원 정도는 받아야 정상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열심히 일하는 좋은 분들이란다.
날씨는 무척 더웠다. 한글학당에는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일반 대학들에도 에어컨이 있는 곳은 별로 없는데 말이다. 그만큼 시설이 잘 되어 있다는 뜻일 게다. 그런 곳에 “이음새문학회”환영 플래카드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우리는 학당 곳곳을 둘러보았다. 강의실 의자에 앉아 사진도 찍고, 앞마당 각현 스님 흉상 앞에서 단체 사진도 찍었다. 어린이집에 들러 앞으로 베트남을 이끌어갈 코흘리개들의 반짝거리는 눈빛과도 조우했다. 어린이집 앞쪽의 화장실 안내 그림이 재미있어서 그것도 빠뜨리지 않았고, 경내 한쪽에서 무언중에 우리를 반기는 꽃나무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그 꽃은 바로 무궁화였으니 반가운 마음이 배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꽝남성(廣南省) 땀끼시(三岐市) 안푸(An Phu)에 세워져 있는 대형 베트남 전쟁의 어머니 응우옌 티투(Nguyen Thi Thu:1904 ~ 2010) 씨의 조각상을 보기 위하여 이동을 하였다. 아들 9명과 손자 2명을 희생시켰기에 조형물 양팔 부분에는 11명의 얼굴 상(像)이 보인다. 더하여 사위 1명도 희생시켰다고 한다. 조각상은 통일 40주년인 2015년에 완공된 것인데, 사암 약 2만 t으로 제작된 것으로, 높이가 18.37m, 곡선 폭이 117m나 된다고 한다. 약 5만 평의 초대형 부지에 조성되어 있는 것에 비하면, 우측에 있는 작은 전시관 말고는 편의시설 등 부대시설이 부족하여 썰렁한 느낌이 드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아직은 접근성이 별로 좋지 못한 편이라서 찾는 사람도 별로 많지는 않았는데, 몇 년 더 지나면 사정이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해 보았다.
조각상 가는 길에 놓여진 커다란 화분들에는 크레이프 자스민이 정성껏 심겨져 있었고, 그 자잘한 꽃에서는 농염한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 무언중에 이곳의 앞길을 예시해주는 듯도 싶었다. 조각상 앞쪽 넓은 광장에는 베트남 민족 신화가 새겨져 있는 8개의 거대한 원형의 기둥이 세워져 있어 앞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베트남의 뿌리를 알려주는 구실을 할 것으로 보였다.
조각상을 둘러보고 지나가는 도로 양 옆쪽은 온통 모래언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키는 작은 편이지만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있어, 푸른빛으로 뒤덮인 것을 보면서는 어쩌면 이런 천연적인 환경은 베트남 자체의 끈질긴 삶에의 의지를 무언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19.12.15.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