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런 것도 능이야, 까불대다 갑자기 무식해진 이웅재
8. 이런 것도 능이야, 까불대다 갑자기 무식해진 이웅재.hwp
8. 이런 것도 능이야, 까불대다 갑자기 무식해진 이웅재
이 웅 재
11월 19일(화). 전용 버스를 타러 나갔더니 약간의 빗발이 내리고 있었다. ‘우산, 우비도 안 가지고 나왔는데…’하고 조금 걱정은 했지만, 다시 호텔 15층까지 올라갔다 오기도 귀찮고 하여 ‘괜찮겠지’에 방점을 찍으면서 그냥 차에 올랐다. 짝궁은 이삼헌 시인, 통로 오른쪽으로는 한경석 씨가 앉아 있었다. 그래서 한 마디.
“비 오면 비 맞고 눈 오면 눈 맞고, 포탄 날아오면 포탄 맞고…”
한 선생은 월남 참전 용사다. 그러나 서기라는 직책 때문에 직접 현장에 나가서 싸운 적은 거의 없단다. 그러면서도 느닷없이 부대로 날아온 포탄에 맞아 아직도 다리에는 그 파편이 남아 있는 상태다. 그래서 해 본 말이었는데, 다행히 하늘은 포탄까지 맞은 분에게 다시 비를 맞게끔 잔인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황릉 및 왕성 투어가 있는 날, 남의 나라 왕도와 관련된 곳으로 가기 때문이었을까, 여권을 챙기려다가 없어졌다고 난리를 피운 사람들이 있었다. 여권은 처음 호텔에서 방을 배정받을 때 가이드가 모두 걷어갔는데, 그만 깜빡들 한 모양이었다. 베트남 여행에서는 그것이 관례라고 한다. 따라서 베트남에서는 개별 행동은 전혀 할 수가 없다. 아마도 공산주의 국가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었다.
오늘은 가이드가 이기찬 부장에서 임장호 씨로 바뀌었다. 가이드는 베트남에는 지하자원이 풍부하다고 했다. 석유도 생산이 되고…. 아직은 못 사는 나라 축에 끼이지만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많다는 말인 듯싶었다.
황릉은 우리나라의 왕릉들과는 달랐다. 능이라기보다는 황성이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나라 경주에 있는 신라의 왕릉들은 초기에는 봉분 외에 따로 시설을 설치하지 않았다. 비석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무열왕릉부터였고, 문인상, 무인상, 십이지신상 등 수호석으로 장식하기 시작한 것은 신문왕 때부터였다. 고려시대의 능에는 여기에 망주석, 장명등, 정자각 등이 등장하고, 이러한 시설은 조선시대에 계승된다. 건물로서는 왕릉 관리자가 임시로 머무는 수복방(守僕房)과 산릉제례에 필요한 음식을 간단히 차리는 수라간(水刺間)이 있고 여기에 정자각, 비각 정도나 있을 정도인데, 이곳은 달랐다.
총면적 12헥타르, 약 36000여 평이란 넓은 공간에 커다란 인공연못 루키엠 호수(Hồ Lưu Khiêm)까지 만들어 놓고 있어서 매우 낭만적인 느낌까지도 들었다.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고자였을 것이라고 하는 뜨득은 아들이 없어 원래 태자가 쓰는 것이 관례인 공덕비의 문구마저도 자신이 직접 썼다고 하는데, 업적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오까지도 기록하였다니 놀랄 만하다. 키가 153cm 단신이라 자신보다 키가 큰 사람은 인재로 등용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런 자신의 신체적 조건 때문이었을까? 능의 이름인 겸릉(謙陵)을 비롯하여 50여 채의 건물 등의 명칭에는 거의 ‘겸(謙)’자가 들어 있었다.
키는 작았지만, 중국문화를 받아들여 공자를 섬기고, 과거제도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약 600편의 시와 서화를 남길 정도로 박학다식하였다고도 하니, 생전에 완성한 능에 연못까지 만들어 놓고 풍류를 즐겼다는 것이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황릉 완성 이후에도 16년을 더 살았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쌍하게도 느껴졌다. 더구나 쇄국 정책을 펼치고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로 인하여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뜨득 황제, 그는 그만 이듬해 승하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나중에 매우 안타까웠다고 탄식을 하게 된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민망황제의 능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졌다. 민망주를 즐겨 마셨다는 민망황제에 대해서는 ‘프롤로그’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그 민망주를 물경 40만 동이나 주고 사기 전까지는 사실 민망황제에 대해서는 깜깜했던 처지였으니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였지만 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 황릉을 보며 감탄하느라고 모든 기운을 소진시키고 났더니, 오호라 배가 고파오기 시작한 상태에서 가까운 곳의‘티엔무사원[天姥寺]’을 둘러보게 되었다. 이곳에는 어디서 한 번 본 듯싶은 8각의 7층 석탑도 있었다. 아하, 그것은 영응사 앞쪽에서 보았던 석탑과 그 모습이 거의 같았다.
이 사원은 후에의 호족 한 사람이 어떤 노파[天姥]로부터 한 영주가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언덕에 탑을 세울 것이라고 하였다는 예언을 듣고 세운 사원이라서‘天姥寺’라고 하였다는데, 기력이 없어서였을까, ‘천모사’를 ‘천로사’로 읽어버리는 무식쟁이가 되고 말았다. 그 무식쟁이가 사원 내부를 둘러본 다음 정원 쪽으로 내려서는데, 동자승 하나가 내 앞에서 얼찐거리고 있었다. 무얼 하는가 자세히 보았더니, 사람 키보다 더 큰 향로의 아래쪽에 쪼글트리고 앉아서 향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향로가 높이 있다 보니 향로 위에 향을 꽂아 놓은 상태에서는 향을 피우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사실 이 사원은 이곳에서 수행하던 사실 이 사원은 이곳에서 수행하던 틱광득(Thich Quang Duc) 스님이 1963년 6월 11일에 사이공(오늘날의 호치민시) 도로 한복판에서 부패한 베트남 남부정권에 항의해서 도로 한가운데에서 가부좌를 튼 채로 소신공양(燒身供養)한 일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나서 유명해진 곳이었다. 이곳에는 그 스님이 사이공까지 갔던 승용차가 전시되어 있었다.(19.12.30.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