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이웅재 칼럼, 국배판 월간 『스포츠 한국』72년 5월호, pp.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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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
(이웅재 칼럼, 국배판 월간 『스포츠 한국』72년 5월호, pp.70~71.)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 최선의 경지를 우리는 이상(理想)이라 부른다. 그러한 경지라는 것은 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어디고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인생의 유한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허다한 모순. 그 수없는 부조리. 원래 인생이란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이상」이라는 것을 설정해 놓고 그 자기의 「이상」을 향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게 「이상」이지만, 그렇게 때문에 우리에겐 「이상」이 필요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이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때는 벌써 그것이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 있겠기 말이다. 어디까지나 「이상」이란 「현실」화 될 수 없는 것이면서도 「현실」을 좀 더 바람직한 것으로 이끌어 올려 주는 것.―바로 거기에 「이상」이「이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
푸로메테우스는 신(神)의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은 그 불로써 문명을 발전시킬 수가 있었다. 불은 열을 수반하는 것. 열은 곧 에너지(Energe)인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에너지를 가르쳐준 푸로메테우스는, 그러나 제우스(Zeus)의 노여움을 받아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래서, 높은 산 꼭대기까지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굴려 올리는 작업을 계속하도록 되었다. 산정에 올려진 바위는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어 있고 그는 그걸 또다시 굴려 올려야 하고……
좀 더 차근히 생각해 보자。
푸로메테우스란 곧 인간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인간은 꼭 신들이 가지고 있던 불처럼, 그 신의 세계에서처럼 편안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삶의 세계―그러한 동경의 세계를 하나의 「이상」으로 설정해 놓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투입시키고 있는가? 신들은 자신들의 세계에만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완전한 세계가 인간에게 도래(倒來)함을 용서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이상」이란 도달할 길 없는 피안(彼岸)의 세계로서의 의의(意義)만을 지니게 했던 것이 아닐까?
어쨌든 푸로메테우스는 위대하다. 인간은 위대하다. 그들은 참으로 얼마나 많은 문화와 문명을 건설하였는가? 그러나 또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건설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이상」이「현실」화 될 수 없다는 바로 그것에 의한 덕분이 아닌가? 우리의 눈 앞에는 한없는 가능성이 펼쳐져 있다. 그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우리는 바윗돌을 굴려 올리는 푸로메테우스처럼, 계속하여 그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향하여 노력을 하여야 한다. 고난과 고통이 따르는 그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過程)―그것이 인생의 의의(意義)가 아닐까?
한 알의 보리가 싹이 터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 추운 겨울날의 찬 바람을 이겨내야 하고, 병아리는 달걀에서부터 깨어 나오기 위하여 그 껍질이 깨지는 아픔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 고통이 없다면, 죽음이 모든 것을 깎아 없앨 것이다. 나에게 상처가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고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하여 죽고 말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고통으로 점철되는 노력의 과정―그것이 바로 인생인 것이다. 「현실」이란 바로 그러한 과정의 연속이며, 우리는 그 「현실」에서 도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현실」로부터의 도피란 「죽음」밖에는 없으니까. 결국 우리가 살아있다는 의의를 찾으려면 당연히 그 고통으로 점철되는 노력의 과정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랑할 수가 있을까?
다행이 우리들은 의지(意志)라는 낱말을 가지고 있다. 의지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요소이다. 자기가 목표한 바를 꼭 이루어내야 하겠다는 의지―그것이 있는 곳엔 언제나 생이 활기에 차 넘치게 마련이다.
얼마전 마나슬루 원정 등반대의 비보를 들었을 때, 우리는 모두 가슴 아파했다. 작년에도 우리는 굳게 뭉친 의지 덩어리의 인간을 하나 잃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이 조난에서 목숨을 건진 대원들은 또다시 후일을 기약했다는 말을 매스콤을 통하여 들었을 때, 나는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 모른다. 어떠한 고난이 따르더라도 꼭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그 굳은 인간의 의지, 그 얼마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냐! 한 번 굴려 올렸던 바윗덩어리가 다시 산 밑으로 굴러 내려왔다고 해서 푸로메테우스가 그의 바위 굴려 올리기의 작업을 끝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그 고통의 작업 자체에서 땀과 함께 그 누구도 느낄 수 없는 쾌락과 희열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주위에서 「오기」를 가진 사람을 보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 「오기」를 좋게도 보고 나쁘게도 보아주지만, 「오기」란 때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필요 불가결의 요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현실」을 「현실」로서만 받아들이지 않고 보다 나은 「이상」에로의 발돋움을 굳은 마음으로 다짐하는 그 패기에 찬 「오기」, 나는 그러한 「오기」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한다.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는 「의지」 곧 「오기」인 때문이다.
동양의 미술과 서양의 미술의 특색을 본다면 곡선과 직선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건축물을 볼 때 더욱 뚜렷해진다. 곡선에의 아름다움은 부드러운 아름다움이요, 직선에의 아름다움은 강한 힘참의 아름다움이다. 부드러움은 소극적인 양보의 미덕과 통하고 강한 힘참은 적극적인 개척의 정신과 통한다. 미국과 같은 나라는 200여년의 그 짧은 역사를 파이오니어 정신 하나로써 세계 최강의 국가로 군림하게 되었으나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도 체념과 인욕(忍辱)만을 되풀이 아직도 분단국의 비극을 안고 있다.
바닷가의 집에서 창문으로 바다를 바라다볼 수 있는 곳에 커다란 나무가 하나 서 있을 때, 서양 사람들은 그 나무를 잘라 버리지만, 동양인들은 체념을 하여 버리거나 꼭 바다를 보려면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소극적인 사고방식을 불식(拂式)해 버릴 때라고 생각한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우리의 주위에도 고속 도로가 건설되고, 직선미를 자랑하는 수많은 고층 건물,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지 않는가! 80년대를 향한 힘찬 전진, 그것은 우리의 굳은 의지―고통으로 점철되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국가 비상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중공의 악수를 바라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움 없는 우리의 안보 태세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요즈음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새마을 운동을 극력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선 우리의 「이상」은 꼭 실현될 수 있다는, 우리의 「현실」을 「이상」으로 승화 내지 용해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될지도 모르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현실」도 밝아질 때가 왔다. 「이상」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부터 무너뜨리자. 국력은 부강되어야 하며, 조국은 통일되어야만 한다. 새로운 역사는 누군가가 포장지로 곱게 싸서 소포로 보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굳게 믿자. 굳게 믿고 힘 합쳐 노력하자. 줄기차게 노력하자. 이 길만인 우리가 사는 길이다.
※2020.3.7.입력. 원고지 19매
지금 보면, 몇 군데 한자 표기나 맞춤법이 잘못된 것도 눈에 띄고, 또 ‘것이다’로 종결짓는 어미가 너무 많았다는 문제점도 보이는 글이지만, 70년대 초의 국가 및 사회상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는 내용의 글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