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재 칼럼("스포츠 한국",1972~)

『숨바꼭질』(이웅재 칼럼⑥, 국배판 월간 『스포츠 한국』72년 8월호, pp.78~79.)

거북이3 2020. 4. 14. 12:37


   

『숨바꼭질』 (이웅재 칼럼⑥, 국배판 월간 『스포츠 한국』72년 8월호, pp.78~79.).hwp

    


   『숨바꼭질

                   (이웅재 칼럼, 국배판 월간 스포츠 한국728월호, pp.78~79.)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어느 가을날 저녁, 밥 짓는 연기가 그림 같은 동네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시간, 동네의 개구장이들은 그들의 놀이에 정신이 없다.

  그렇게도 재미 있게 느껴지던 숨바꼭질, 거기서 우리는 인생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숨었니?」―「숨었다!

  왜 숨는 것일까? 숨는다는 건 들키지 않기 위함이다. 들키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이의 사회는 어른들의 사회의 축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숨바꼭질도 어른 사회의 일 측면이 되는 것이 아닐까?

  「숨바꼭질」―「아이들의 장난의 한 가지. 여럿 가운데 한 아이가 술래가 되어 숨은 아이들을 찾아내는 것인데 그에게 들킨 아이가 다음에 술래가 됨

 

  이것은 숨바꼭질의 사전적 풀이다. 숨바꼭질은 또 술래잡기라고도 하고 있는데, 술래라는 말은 원래 순라(巡羅)에서부터 변해 온 말이다.

  「순라순라군(巡羅軍)의 준말로서 도둑화재 등을 경계하기 위하여 도성(都城) 안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순행하던 군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사이로 따져 본다면 통행 금지 시간 이후의 순경이거나 방범 대원쯤 되리라.

  그런 건 어쨌든, 그러한 순라군의 눈을 피해 숨는 존재란 역시 도둑을 비롯한 각종 범죄자들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숨었니?」―「숨었다!

  그러나 마음껏 숨어 보아라. 대개의 경우는 술래가 그 숨은 아이들을 찾아 내게 마련이다. 그것은 그들의 의무이니까. 그렇게 그들은(어린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의무란 것을 배우는 것이다.

  「자유를 배우기 전에 의무부터 배운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자유에는 제한이 있는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자유」―그것이 자유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무부터 배운다. 다시 말해서 자유의 영역, 자유의 한계선부터 배우는 것이다. 그만큼 성인들의 사회에서는 자유를 자유로이 내 놓아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의 세상이란 자유에 대한 제동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 인간들의 자유를 제한한 한도 내에서에야 가질 수 있는 자유를 배우는 것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그래서 평등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리라.

  술래가 숨은 아이를 찾아 내면, 두 아이는 서로 필사적으로 을 향해서 뛴다. 먼저 에 도착한 아이가 야도를 외친다. 야도!란 일본말이라서 바꿔치웠으면 좋겠지만, 지금도 아이들은 여전히 야도!를 소리 높혀 부르는 것이다.

  차라리 그럴 바엔 그 야도!를 그냥 인정해 주고 夜盜의 뜻으로 생각해 보자.밤도둑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대로 숨바꼭질이 설명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점이 하나 있다. 그것도 왜 두 아이가 똑같이 야도를 먼저 하려는가 말이다. 의당히 술래가 야도를 외쳐야 할 텐데 말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 생각되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성인들의 사회의 축도인 것이다.

요즈음 세상을 보라. 도둑도둑아닌 자에게 도둑이라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를……진짜가 가짜가 되고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허구 많은 사례들을 우리들은 이제 분개할 줄 조차 모르고 보아오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든 먼저 야도를 외치는 사람이 이기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수많은 불가사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얼마 전 재치문답에서 법이란?하는 문제에 대한 풀이로, 내 발가락이라는 무엄한 설명을 들은 일이 있다. 왜 그러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법은 주먹보다 머니까라는 것이었다. 무척 아리러니칼한 얘기라고 생각하면서 몸을 오싹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예외 없는 법률이란 없다고 한다.

  그 예외에 의해 법은 주먹보다 멀어지는 것이다. 예외를 만들어 놓은 취지는 인간을 법으로 보호하자는 의도일 것이다. 물론 인간의 머리란 한도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아무리 완벽한 법률을 만든다 하여도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구멍이 있게 마련이고, 그 구멍을 발견하는 자는 결국 그 예외라는 특전에 의해 유유히 법망으로부터 빠져 나갈 수도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머리 좋은 범죄자보다도 이현령 비현령식의 해석을 하는 법률과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의(故意)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한, 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법을 하게 된, 구제의 필요성이 있는 자들에게 대한 1차적 기회를 주는 의 도에서의 법의 예외」―그것이 바람직한 일이지만, 어느새 그 예외는 놀랄만한 탈바꿈을 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방법으로든 먼저 야도를 외치는 사람이 그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특전이 생겨나게 된 것이리라.

  「朝三暮四란 말이 있다. 나라 때 狙公이란 사람이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먹이가 많이 드는 게 아까와 원숭이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아침에 도토리 3, 저녁에 4개씩을 주마.원숭이들이 화를 내었다. 저공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아침에 4, 저녁에 3개를 주마.그제서야 원숭이들은 좋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사술(詐術)에 의해서 법이 운용될 때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래선 안된다.숨바꼭질의 재미는 어디까지나 숨은 아이를 찾아내어 그 숨었던 아이로 하여금 술래가 되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때로는 술래가 숨은 아이를 찾아내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러면 술래는 울상이 된다. 못 찾겠다, 나와라!지친 술래는 자기의 의무를 포기한다. 그러면 숨었던 아이는 술래가 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일종의 자수형식이라고나 할까, 결국 자수의 권유란, 그만큼 범죄자를 찾아내는 데 힘이 든다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막대한 경비와 노력을 들여 범죄자를 잡아 벌하는 것보다는, 어떤 의미로든 양심의 가책에 의해 자수하는 자를 따뜻한 마음으로 보호해준다는 것은 훨씬 의의 있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놀이의 방법을 이용하여 한두 사람만 찾고는 곧 못 찾겠다, 나와라!하는 술래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다른 애들이 낌새를 채면, 그 다른 애들은 술래잡기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다. 그래서 그들도 따라서 그러한 비열한 방법을 취한다. 놀이는 점점 시들해져 가는 것이다. 그럴 때 집에서 빨리 와서 밥 먹어라는 소리라도 들리면, 그들은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실생활에서는 그렇게 쉽게 그만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좋든 싫든 놀이아닌 놀이는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타고나면서부터 놀아야만 되도 놀이인 때문이다.

  「숨바꼭질에서 애들은 누구나 술래가 되기를 싫어한다. 의무가 싫은 것이다. 그러나 술래 없는 숨바꼭질이란 생각해 볼 수가 없다. 의무없는 자유란 없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누구나 한 번씩은 해 보는 그 놀이우리는 거기서 인생을 배우는 것이다.

 

  엄마 품에 안기워서 젖먹을 때부터 깨꼬―」하고 놀리는 일, 그렇게 어렸을 적부터 숨었다가 발견되는, 숨게 하였다가 찾아내는가장 원초적인 숨바꼭질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허구 많은 어린 아이들의 놀이들, 그 중에는 전쟁 놀이와 같은 끔찍한 놀이도 있고, 그 놀이가 실제로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어른들의 사회가 아이들의 놀이로 축소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들이 놀이에서 배운 것은 어느새 그들의 심층부에 하나의 잠재적인 의식으로서 남고, 언젠가는 그들이 자란 후에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행동화되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꾸만 눈뭉치가 구르듯 커져가면서 다음 세대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생활을 개선해 나가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그 개선된 사회를 보여 주어야 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좀더 의도적인 놀이를 고안, 어린이들로 하여금 건전하게 자라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하겠다.

 

2020.4.13.입력. 원고지 22.

밑줄 친 개구쟁이는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 때문이요, ‘巡羅, 巡羅軍의 한자는 巡邏, 巡邏軍이 되어야 할 것인데 필자가 잘못 쓴 것으로 보이며, ‘방범 대원, 틀림 없을, 찾아 내게, 찾아 내면을 띄어쓴 것도 아마 필자의 잘못일 터이요,‘높혀높여로 써야 할 것으로 역시 필자의 실수로 보이며, ‘그런 대로를 띄어 쓴 것은 편집자의 실수로 보인다.

성인들의 사회의에는 가 반복되어 바람직한 표현이라 보이지를 않는데, 이는 필자의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사례들을 우리들은에서도 이 반복되어 역시 좋은 표현이라 할 수가 없다. 더구나 우리들우리만으로도 충분히 복수 표현이 되는 것을 필자의 부주의로 그런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줄 조차, 이현령 비현령을 띄어쓴 것은 아마도 편집자의 부주의가 아닐까 싶다.

朝三暮四나라 때 狙公에서는 한자를 괄호 속에 넣어야 할 것을, 아마도 집필할 때에 무의식적으로 그냥 써 버린 필자의 실수로 보인다.

아까와는 당시 표기를 따른 때문이요, ‘안된다를 붙여 쓴 것과 하나 둘을 띄어쓴 것은 편집자의 부주의였을 것이다.

타고나면서부터태어나면서부터가 더 좋을 것으로 생각되는 표현일 것인 바, 필자의 부주의 때문이요, ‘놀아야만 되도 놀이놀아야만 되는 놀이를 편집자가 잘못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안기워서안겨서로 충분한 것을 필자가 잘못 쓴 것일 터이요, ‘허구 많은하고많은'으로 표기되어야 함과 함께 띄어쓰기까지 잘못되었는데, 이도 역시 필자의 잘못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숨바꼭질』 (이웅재 칼럼⑥, 국배판 월간 『스포츠 한국』72년 8월호, pp.78~79.).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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