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3
2020. 5. 24. 15:46
『생일』
(이웅재 칼럼⑦, 월간 『스포츠 한국』72년 9월호, 창간 1주년 기념호, pp.78~79.)
생일 없는 사람은 없다. 어쩌다 잊어 먹거나, 또는 피치 못한 사정에 의해서 생일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은 있어도 그들에게 원래부터 생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생일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건 일종의 숙명적인 것이다. 왜 나에게 생일을 주었느냐고 푸념하는 것은 왜 나에게 출생을 하도록 만들었느냐고 하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생일은 곧 탄생인 것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 적수공권으로 태어난다지만 이 생일 한가지만은 누구나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생일은 우리의 최초의 재산인 것이다. 생일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리고 “시작이 반”이라고 하여 시작을 중요시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마지막 5분간”이니, “유종의 미”라느니 하여 끝(결과)을 또한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 지당한 말들이다. 하지만 한 가지 넘겨 버려서는 안 될 점은, 시작과 끝의 사이인 것이다. 시작과 끝은 한 사물의 양면에 불과하다. 시작과 끝은 서로 분리되어 따로 설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시작과 끝의 모습이 아주 다를 수는 있다. 보잘것 없는 시작에서 바람직한 끝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시작과 끝을 그처럼 다른 모습으로 만들 수 있는 장본인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과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 시작은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끝을 가져올 수가 없는 것이다. 과정과 과정과 과정과……허구많은 과정의 과정을 거쳐서야만 끝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 과정을 위해서 산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성싶다.
“보다 행복한 가정”, “보다 살기 좋은 사회”, “보다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반복되는 우리들의 노력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바람직한 인류”라는 결과를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모든 문화 행동이란 것은 과정에 지나지 않는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문화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본능의 아전인수격인 미화 작용이다. 그 미화 작용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바로 과정인 것이다.
좀더 쉽게 얘기해 보자. 사회학이니 심리학이니 정신분석학이니 하는 학문들이 발전되면서 이런 것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계속 규명되어지고 있는 것이므로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예를 들어 보자.
사람들은 먹어야 산다.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사람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것이나 먹는다. 그것은 본능적인 행동인 것이다. 그런데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국인들은 개고기를 보신탕이라고 하여 잘들 먹는다. 서양인들이 보고는 야만인이라고 비웃는다. 그러나 서양인들 중에는 말고기를 훌륭한 요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결국 식생활에서의 문화라는 것이겠는데 모두가 먹는다는 본능의 아전인수격 미화 작업이 아니고 무엇인가. 구데기를 요리해 먹는 종족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구데기를 먹지는 않는다.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6‧25 때에는 시레기죽도 없어서 못 먹었으나 요즈음은 닭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 돼지 고기를 못 먹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문화의 수준이 달라졌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은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는 현상이 아니고 과정과 과정의 반복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시작을 시작답게 만들고 끝을 끝답게 가지려면 우리는 이 과정을 중요시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나 신화라는 게 있다. 그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탄생을 보면 아주 호화롭다. 금빛 찬란한 궤속에서 나왔다느니, 또는 이리저리 굴리고 던져도 깨어지지 않고 모든 동물들이 경외하고 보호해주는 커다란 알에서부터 태어났다느니, 아주 그럴 듯한 얘기들이 많다. 옛날부터 사람이 태생인 경우엔 九穴이요, 난생은 八穴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난생 설화를 가진 인물은 생식 능력이 없어야만 하는 건데, 이건 버젓이 그 후손들이 조상 자랑을 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한 번쯤은 그들의 탄생에 대한 얘기들을 의심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원래는 내 자식이노라 공개하고 기를 수 없는 처지의 어린애가 되어 어느 개구멍으로 들여밀어논 아이를 누군가가(주로 살 만한 집에 밀어 넣다 보니까) 지체 있는 사람이 줏어다가 기른 것이, 그 집의 백, 그라운드에 의해서 여러 사람 위에 우뚝 설 수 있는 귀족이나 군주가 되었다고 치면(옛날에도 조상의 네임, 밸류 덕분에 관직에 등용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런 경우를 蔭補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정과정곡을 남긴 정 서 같은 분들이다) 그의 탄생은 미화되고 승화되어 알에서 나왔느니, 금궤 속에서 나왔느니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끝(결과)을 잘 가져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죠지‧워싱턴은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벚나무를 잘랐다. 그러나 그는 솔직했다. 우리는 거기서 어려서부터 대통령이 될 만한 필요하고도 충분한 소질이 있었다고 추구 찬양한다. 만일 그가 나중에 악명 높은 강도 살인자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이럴 것이다. “떡잎부터 그랬으니 알아볼 만하다”고. “싹수가 노랗더라”는 것 말이다. 기실 그 “싹수”라는 것은 세인들의 기호에 의해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도 성공하라, 그러면 당신의 과거는 미화될 것이다. 열살 가까이 오줌도 못 가리던 당신의 어린 시절도 어려서부터 그런 자잘구레한 일에 개의치 않은 대범하였던 성격이라고 누군가가 당신을 추켜 놓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정말로 어려서부터 대범했던 인물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위대해진 다음에는 지난날이 미화되지만, 그 위대해지기까지의 수단 방법이 옳지 못해서는 위대해질 수도 없거니와 자신은 위대해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남들은 위대해진 것이라고 생각해 주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북한에 지금 떡 버티고 있는 김 아무개처럼 말이다. 아무리 더운 날씨에 털을 뽑아 버렸더라도 인간에겐 양심이라는 게 있다는 말이다. 양심이 낭심(狼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얘기가 약간 옆길로 새어 버렸지만 처음(탄생)이 미화가 되려 해도 피나는 과정을 쌓고 쌓아야 하는 것이다. 원래 인생이란 그렇게 고달픈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오죽하면 소포클레스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말을 했을까.
이 세상이란 원래 혼돈(카오스)에서 땅과 지하와 사랑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랑(에로스)에서부터 만물이 생성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하긴 우리 인간의 탄생도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사랑에는 기쁨이 있다. 그것은 조화의 기쁨이다. 조화의 기쁨(사랑) 뒤에는 창조의 괴로움(탄생)이 따르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제작할 때 느끼는 괴로움은 차치하고라도, 사랑 뒤에 오는 여인들의 해산의 고통을 보면 창조란 괴로움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신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올림포스의 열 두 신 가운데 제일 으뜸가는 신인 제우스신의 탄생도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고통스러운 탄생―그러나 그 고통이 싫다고 하여 탄생을 되물릴 수는 없다. 조금 밑지면서라도 물릴수가 있는 물건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탄생의 문은 하나의 생명이 그 문을 통과한 다음에는 꽉 닫혀 버리는 것이다. 그 길은 일방 통행의 길인 것이다.
되돌아갈 수 없는 길―좋아도 싫어도 그 길은 가야만 하는 것이다. 과정의 산과 과정의 내를 건느면서, 그러다가 어떤 때는 뒤를 돌아다보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탄생을 뒤돌아다 보고 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하나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생일이 라는 낱말은 “출생한 날”의 뜻 이외에 “해마다의 그달의 그날”이라는 뜻을 덧붙이게 된 것이리라.
그러니까 생일의 의식은 괴로운 삶을 느껴 과거에 대한 집착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괴로움을 잊어버리자는 무의식적인 행동의 발론이겠지만 되돌아다보아야 탄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최초의 재산 목록인 자의반 타의반의 생일이라는 것밖에는 없다. 차라리 괴로운 삶을 잊기위한 방법으로는 지난날의 탄생에 집착 하느니보다 앞날을 위한 노력으로 한 방울의 땀이라도 더 흘리는 게 나을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우리에게 성장의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과정의 정상에도 올려 놓아 주기도 하는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발전이라고 명명하자, 문화가 이룩되는 과정 말이다.
“스포츠 한국”의 창간 기념호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도 한 마디, “축 발전”이라는 것이다.
※2020.5.24.입력. 원고지 22매.
밑줄 친 말들을 짚어 보자.
‘잊어 먹거나’는 ‘잊어버리거나’로 써야 할 일인데, 필자의 잘못일 터이요, ‘한가지’을 붙여쓴 것은 편집자의 실수로 보인다. 반대로 ‘생일이야 말로’는 붙여야 할 것인데 역시 편집자에게로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일이리라. ‘장본인’은 부정적인 경우에 써야 할 말인데, 분명 필자가 잘못 쓴 것이고, 이후의 다음 것들도 필자의 책임으로 돌릴 일로서 ‘→’을 사용하여 바로잡아 놓는다.
허구많은→하고많은, 문화 행동→문화 활동, 않는것→않는 것, 구데기→구더기, 시레기죽→시래기죽, 돼지 고기→돼지고기, 궤속에서→궤 속에서, 들여밀어논→들이밀어 놓은, 줏어다가→주워다가, 백, 그라운드→ 백 그라운드, 네임, 밸류→네임 밸류.
그리고 ‘정 서’와 같은 표현은 예전에는 성과 이름을 띄어 쓰도록 했기 때문에 그 표현을 따른 표기였고, ‘열살’을 붙여쓴 것은 필자의 잘못으로 여겨지고, ‘자잘구레한’과 ‘인물깜’,‘열 두 신’도 필자의 잘못으로 보인다. 바른 표기는 ‘자질구레한’, ‘인물 감’, ‘열두 신’이다.
‘물릴수가’를 붙여쓴 것은 편집자의 실수로 보이고, ‘일방 통행’,‘건느면서’,‘뒤돌아다 보고’,‘건느면서’,‘되어버렸다’는 그 잘못을 필자에게로 돌린다. 바른 표기는, ‘건너면서’,‘되어 버렸다’이다.
‘생일이 라는’이 띄어진 것은 편집자의 실수이겠고, ‘발론이겠지만’은 ‘발로이겠지만’으로 써야 할 것을 필자가 잘못 쓴 것으로 여겨진다.
‘잊기위한, 집착 하느니보다, 올려 놓아’의 띄어쓰기의 잘못은 아마도 편집자에게 책임을 돌려도 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