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3 2020. 6. 2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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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이상하게 읽기에 불편한 점이 많아서 첨부파일로 읽으시는 게 편합니다. 対話 (이웅재 칼럼⑪,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2월호, pp.78~79.) 대화란 相對가 있는 말하기이다. 말이란 안에 있는 생각을 밖으로 나타내 주는 하나의 방도요, 생각을 체계 있게 정리해 주는 하나의 수단이다. 생각은 제멋대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할 수가 있으나 말이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말이란 일단어떤 형태로든지간에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의사)을 전달시켜 주어야 하는 그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생각을 정리하여 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말이란 그 성질상 음성을 매체로 하기에, 사람의 입에서 한번 나와 버린 후면, 글자처럼 지워버릴 수가 없으므로 한 마디의 말이라도 다듬고 다듬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화라는 것은 구체적인 상대가 있는 것이므로, 그 상대에 알맞는 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상대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노인인가 어린이인가, 그 지식 정도는 어떻고, 그 신분은 어떤가……등등 그 상대에 따라서 대화는 정선되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는 오해와 불신을 낳게 만드는 것이다. 상대를 느껴야 된다는 것은 벌써 하나의 사회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회란 두 사람 이상의 조직체이다. 조직이란 항상 어떤 법칙을 내재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운용하고 이끌어 나가는 데는 반드시 일정한 규범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성을 가지는 대화라는 것은 조직적 이어야 하고 일정한 법칙에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대화(말)에는 어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된다. 어법이란 문법하고도 달라서 명사가 어쩧구 동사가 어쩧구만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말씨, 액센트, 인토네이션, 각 단어의 순서……등 여러 가지 사항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사이 가끔 라듸오를 들으면서 느끼는 일이 있다. 「효과에 아무개……」라는 대목이다. 그 「효과」를 「효과」라고 발음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효꽈」라고 발음하는 이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차차 「효꽈」라고 발음하는 편이 더욱 우세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효꽈」의 「ㄲ」은 경음(된소리)이다. 그러니까 平音이 자꾸만 硬音化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어제 오늘 있어온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본다면 요즈음의 「꽃」이라는 말은 이조 초엔 「곶(곳)」이라고 발음하고 표기했었다. 그러한 것이 「꽃」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硬音化 현상의 역사는 오래다. 그런데 이것을 새로 들먹거리는 것은 한동안 이 경음화 현상이 주춤했더랬는데, 요사이에 와서 다시 눈에 띄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경음화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청각상 강화」 때문이다. 물론 일본어의 영향도 있다. 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는 이런 경음화 현상은 피하자고 해봐도 소용 없이 자꾸만 「효꽈」「조껀」「교꽈서」는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청각상 강화」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각박해져서 살아가기가 힘들어졌으므로 자기의 의사를 강조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발음을 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라 생각된다. 남북 적십자 회담이 처음으로 열릴 때의 일이다. 여러 가지 보도 사항 중에서 북한에서는 여관을 「초대소」라고 하여 의사 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었다. 「초대소」―그것은 어찌 보면 북한 사회를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내준 말이라고도 생각이 된다. 양권(養卷)이 있어야만 쌀 배급을 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여행이란 실상 남의 폐를 끼치는 행위 밖에 안 되어 실제로 별로 행해질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평양거리에 자동차가 적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주거의 자유가 제도상으로 제한이 되도록 되어 있는 때문이다.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법적으로는 허용되어 있다 하더라도 제도상으로는 여행이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되니, 여관이란 것도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어쩌다 놓촌 지도자들의 초청이라는가, 무슨 지방당 간부급이라든가, 상 줄 만한 일을 한(생산의 초과 달성 등) 사람들을 초치할 경우, 그럴 때만 여관의 필요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관이라 불리는 것보다「초대소」라 불리는 것이 훨씬 타당스런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초대 받은 사람들을 기숙하게 하는 장소」란 뜻으로서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초대소」에 한번 간다는 것은 무척 영광스러운 일 중의 하나이리라. 아, 「여관」엘 맘대로 갈 수 있는 이자유여! 이러한 데까지 자유라는 말을 붙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사회라니, 그러한 의미로서는 하루 빨리 통일은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이렇듯 대화(말)라는 것은 사회성을 지니고 있어, 대화를 통하여 그 사회의 성격까지도 알아볼 수가 있다. 대화란 사회를 무시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때문이다. 대화는 의미의 전달을 하는 것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고, 또한 사회성을 지닌 것이기에, 대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사회에서의 의미가 수용되어지는 태도도 달라진다는 것도 이야기하였다. 대화가 올바로 이루어지면 이해와 신뢰의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요, 대화가 단절된다거나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못하면, 그 사회에는 오해와 불신이 충만해질 것이다. 그러면 「오해」와 「이해」의 차이란 어떤 것인가? 숫자로 따진다면 그것은 「3해」의 차이를 가지는 것인데, 그것은 같은음의 한자로 쓰면「三害」가 된다. 그 「三害」란 대화를 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害가 그 첫째 害요, 대화의 상대자가 입는 害(被害)가 그 둘재 害요, 그 마지막 셋째 害란, 첫째 둘째 害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그 사람들이 소속해 있는 사회가 무너져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첫째 害는 자승자박의 것이므로 의당 당연한 일이려니와, 둘째 害는 억울하기는 해도 대화자의 상대역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害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피해로 그치는 것이므로 할 수 없다. 치더라도, 그 세 번째 害는 있어서는 안 될 성질의 것이다. 더군다나 이것은 자꾸만 눈뭉치 구르듯 타인에게 전이(轉移) 되어 가는 것으로서, 현대 사회가 「불신시대」가 되어버린 것도 이러한 이해와 오해의 차이가 빚어논 하나의 사회적 문제거리인 것이다. 해서 세상은 오해로 뒤끓는다. 오해로 서로 헐뜯고 싸우며, 오해로 서로 아귀다툼을 한다. 세상은 오해 때문에 지탱되어 나가는 느낌이다. 하긴 때로는 오해를 오해하며 오히려 이해로 접근되는 때가 있기도 한 것이다. 오해를 두 번 하니까 두 번이라는 데서 「그해」가 되는 것일까? 꼭 「一口二言은 二父之子」라 핀찬 주는 바람에 「一口二言은 諸다也」라고 궁지를 벗어날 때의 그러한 말장난을 연상케 하여 주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진실인 것이다. 이왕이면, 버스 차장들처럼 「…안 계세요」 식으로 「안」(아니)라는 말을 도치시켜 강조함으로써 부정(否定)적인 표현을 하는 것보다는, 「…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되어진다.」식의 책임 회피를 해버리고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표현을 하는 것보다는, 분명하고 똑똑하고 간결하게 말끝을 맺어주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개운한 느낌을 가지도록 해 주는 것이 좋겠다. 좀더 명랑한 대화를 하자. 아침부터 만나서, 「진지 잡수셨읍니까?」하고 남 밥 못 먹었을까 걱정을 해준다든지, 「안녕하십니까?」하고 마치 안녕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처럼 말하지 말고, 「반갑습니다!」라고 서로 주름살을 활짝 펴고 웃을 수 있는 인사말부터 시작하자. 「一笑一少요, 노 노」라고 하지 않았는가? 웃을 수 있는 대화를 찾자. 원래 우리 민족은 해학(諧謔)을 즐기지 않았던가? 악인을 그릴 때에도, 「원래 사람은 오장육부를 가졌으되, 놀부는 오장칠부였다」고 하고선 「심술보」하나가 장기 주머니만한 것이 더 있어서 오장칠부였다느니, 정 수동이 야간 통금에 걸리게 되자 담 벽에 납짝 붙어 섰다가 지나가던 순라군이 「그게 뭐요?」하고 물으니, 「빨래요」하고 대답했다는 얘기 등은 널리 알려진 일이 아닌가? 좀 더 명랑한 대화를 하자. 웃을 수 있는 대화를 하자. 명랑한 대화, 웃을 수 있는 대화를 하는 데 비용이 든다거나 세금이 붙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 얘기 같은 대화, 어머니의 사랑에 가득찬 부드러운 대화, 아버지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곡진한 애정이 깃든 은근한 대화, 형님이나 언니가 동생을 감싸주는 따뜻한 대화, 자식이 부모에게 드리는 어리광이 섞였으나 조금은 어른스러워 보이는 점이 있어 빙그레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대화, 동생이 언니나 형님을 생각 해 주는 깜찍스런 대화, 이웃간의 사이를 좁혀 주는 정겨운 대화, 상사나 노인에게 예의를 지키는 깍듯한 대화, 부하들을 대하는 상사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대화, 추운 겨울 날씨를 포근하게 녹혀 주는 연인들간의 달콤한 대화, 노변에서의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엮어가는 재미 있는 대화……. 우리의 이 차가운 현실, 얼어붙은 인정을 대화로서 녹이자. 상대자가 있어야만 하는 대화이기에, 대화가 건전하고 알찬 것이 될수록, 그 대화가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인원인 「너와 나」만이라도 보다 인간 관계가 개선되어질 것이다. 과장된 선전을 일삼는 「P.R(Public Relationship)의 시대」에서부터 서로간의 의사가 통할 수 「H.R(Human Relationship)」의 시대로 이끌어 가자. 그리하여 「너와 나」의 만남은, 다시 「너와 그이」의 만남으로, 그것은 또 「그이와 저 분」의 만남으로, 그렇게 대화에 의한 사회 정화의 전이(轉移)를 이룩하자. 그렇게 된다면, 「시민은 명랑하다」는 표허가 살아나게 될 것이고, 당분간 신문 사회면을 담당하는 기자들은 얘깃거리가 없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만남」과 「만남」이 연결될 때면, 「남과 북」의 만남도 이루어져, 보다 흥분의 기삿거리로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오리라. 가는 곳마다 「대화의 가교」를 건설하고, 지내는 곳마다 「대화의 광장」을 만들어 놓자. 찌프렸던 얼굴도 「대화」에 의해 펴 지고, 울적하던 기분도 「대포 한잔」이 아닌, 「대화 한 마디」로 풀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하자. 대화가 하루의 시작이고, 그 하루의 끝이다. 좀더 대화를 정화하자. 정화하기에 힘쓰자. 노력하자. ※2020.6.15.입력. 원고지 26매. ※‘일단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로 띄어 써야 할 것임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마도 편집자의 실수로 잘못 입력이 되었지 싶다. ‘것이다’를 너무 자주 썼다는 점은 이미 말한 바가 있다. 특히 내가 더 많이 썼던 것 같지만, 7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의 어투가 그런 점이 많았다. ‘알맞는’은 요사이 한글 입력을 할 때면, ‘알맞은’으로 고치라고 ‘땡!’하고 소리까지 내면서 고치라는 말이다. 형용사라서 ‘-는’이라는 어미를 붙일 수 없다는 얘기인데,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말하자면 ‘알맞게 되는’이라는 뜻을 지니는 동사로 볼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정선되어져야’의 2중 피동은 필자의 잘못이요,‘조직적 이어야’를 띄어서 쓴 것은 분명 편집자의 잘못일시 분명하고, ‘명사가 어쩧구 동사가 어쩧구’의 ‘어쩧구’는 ‘어떻구’의 전라도 방언인데, 그렇게 표현한 나 자신도 놀랍다. 1‧4 후퇴 때 몇 달 동안 부모님과 떨어져서 전라도 이리 옆의 삼례에 있는 피난민수용소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영향이 아닐까 싶은 때문이다. ‘액센트’는 요새는 ‘악센트’라고 사용하지만, 아마도 이 글을 쓸 때에는 ‘액센트’라고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고, ‘라듸오’도 당시의 일반적 표기를 따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라디오를 언급한 것은 이 글을 쓸 당시만 해도 일상적으로 TV보다는 라디오 청취를 많이 하지 않았나 하는 시대상도 느껴볼 수가 있다. ‘이조’라는 말은 이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이 흔히 쓰이던 표현이었다. ‘소용 없이’를 하나의 부사어로 다루는 것도 최근의 현상이 아닐까 싶고, ‘의사 소통’을 복합어 처리하는 일도 역시 예전에는 없던 일이라 생각한다. ‘행위 밖에’을 띄어 쓴 것도 당시의 표기를 따랐던 때문으로 보이고, ‘때문이다’는 ‘때문과’로 써서 그 뒤에 오는 표현과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인데, 필자가 잘못 표현한 것이다. ‘이자유여!’에서 ‘이’를 띄어 쓰지 않은 것은 편집자에게로 책임을 돌려야 할 것이다. ‘것이라는 것은’과 같이 ‘것’을 즐겨 쓴 표현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시의 필자의 잘못된 습성 때문이었으리라. ‘이야기 하였고’를 띄어 쓴 것은 분명 편집자의 잘못일 터이요,‘수용되어지는’의 2중 피동 형태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필자의 잘못임에 틀림없다. ‘같은음’이 붙여진 것은 다시 편집자에게로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일이다. ‘할 수 없다. 치더라도’의 가운데 사용된 온점(.)도 편집자의 잘못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리고 ‘세번째’가 ‘세 번째’로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 뒤에 나오는 ‘두 번’이 띄어 쓰인 것을 보면 증명이 된다.‘전이(轉移) 되어’를 띄어 쓴 것은 편집자에게로, ‘문제거리’가 ‘문젯거리’로 표기되는 것은 표기법이 새로 바뀐 때문으로 보인다. ‘「그해」가 되는 것일까?’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2해」를 편집자가 잘못 쓴 것 같다. 말하자면 「이해(理解)」의 동음을 이용한 표현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핀찬’은 ‘핀잔’이라야 할 것인 바, 필자의 잘못이다. 필자는 요즘에도 말로 할 때에는 ‘핀찬’이라고 쓰는 버릇이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다. ‘諸다也’는 ‘諾다也’를 편집자가 잘못 쓴 것임이 분명하다. ‘생각되어진다’의 2중 피동은 필자의 잘못이다. ‘잡수셨읍니까?’는 당시의 표기를 따른 표기요, ‘一笑一少요, 노 노’의 ‘노 노’는 ‘一怒一老’에서 편집자가‘一’자를 빼먹은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정 수동’을 띄어 쓴 것은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 것이다. ‘납짝’은 ‘납작’을 표준어라고 하는데, 지금도 필자는 ‘납작’이라는 표현이 별로로 느껴진다. ‘좀 더’는 이처럼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지마는 ‘좀더’처럼 붙여 써도 무방한 말이다. ‘생각 해’를 띄어 쓴 것은 아무래도 편집자의 실수로 보이고, ‘이웃간’과 ‘연인들간’을 붙여 쓴 것, ‘녹여’로 써야 할 것을 ‘녹혀’로 쓴 것은 필자의 잘못된 습관 때문이라고 보인다. ‘재미 있는’을 띄어 쓴 것도 필자의 잘못이다. ‘대화로써’로 써야 할 것을 ‘대화로서’로 표기한 것은 편집자에게로 잘못을 돌려도 될 것이요, ‘인간 관계’라고 띄어 쓴 것은 아마도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 것이 아닐까 싶다. ‘서로간’을 붙여 쓴 것, ‘펴 지고’를 띄어 쓴 것은 다시 필자에게로 그 책임을 돌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