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이 (이웅재 칼럼⑮,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6월호, pp.78~79.)
다듬이
(이웅재 칼럼⑮,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6월호, pp.78~79.)
한식 아침이나/ 추석달밤/ 담 모퉁이를 문득 돌아서다 듣는 다듬잇소리.
李 敬南의 「고향은」이란 詩의 한 귀절이다. 허구많은 사연을 간직했음 직하게 느껴지는 그 고향의 소리는 이제 우리 주위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어쩌면, 한국인다운 맛과 멋을 풍기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 다듬잇소리는, 우리네 어머니의, 우리네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오랜 옛적 여인네들의 알알이 맺혀온 애환의 가락이 아닐까?
「세탁소」 「드라이 크리닝」…이런 편리한 이름들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지난날 여인네들의 그 숱한 애환의 사연들도 고운 보자기에 차곡차곡 쌓이고, 싸여져서는 높다란 시렁 위, 어린애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얹혀져 버리고 말았다. 키가 자라지 않아 그 사연들을 풀어 볼 수 없는아이들은 보자기 속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어졌다. 제나름대로 공상과 상상을 해 가면서 지내는 동안 그 보자기 속 사연들은 이제 향수를 자아내게까지 되어 버렸다.
「다듬이」라는 말은 「다듬이질」이 줄어서된 말로서, 「다듬질」이라고도 하며, 「옷감등을 방망이로 다듬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며, 「다듬다」는 여러 가지의 뜻을 지니고 사용되는 말이지만, 이 경우에는 「매만져서 맵시를 내다」「곱게 닦다」「옷감등을 방망이로 두드려서 반드랍게 하다」 따위로 쓰이는 말이다. 우리의 여인네들은 남정네들의 옷감을 다듬으면서, 때로는 서럽고, 때로는 억울하기도 한 자신의 마음까지도 다듬으며 지냈던 것이다.
언제부터 여인네들이 다듬이와 가까와 졌을까? 애시당초에 모계 사회를 이룩했던 여인네들이 그 언제부터 「안사람」으로 고정되어 버리고, 「바깥양반」의 옷시중을 들게 되었을까? 모권 사회에서는 여성도 강건한 육체를 소유했었을 것이다. 남자들에게 힘이 모자라 모권을 넘겨 남자 들에게넘겼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부계 사회가 생겨났을까? 그것은 따지고 보면, 여성들의 신체적 생리 조건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즉 여성들은 그 생리적 구조면에서 볼 때 수동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네들은 아이를 낳아야 하고, 아이를 길러야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매달려야 하는 그 시간 동안, 맹수나 적대 부족이 침입해 오면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 이것은 남정네들로 하여금 자연히 「바깥냥반」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까닭이 되었으며, 그 「바깥냥반」들의 대외적 활동을 좀더 효과적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여인네들은 자연히 그들의 뒷바라지―밥짓기, 바느질하기, 빨래하기, 다듬이질하기…등 「안사람」으로서의 일들을 해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 시대만 하더라도 그 초기에는 「데릴사위제도」(예서제)가 있어서, 모계 사회로서의 일면을 남겨 놓고 있었지만, 남정네들의 활동상이 확대되어 가면서, 부권 사회의 「代」를 이어갔던 것이다.
게다가 그「代」에 집착한 부모님네들은 열 살 안팎의 어린 아들을 장가 보내 꽃다운 처녀를 며느리로 맞아 들이고는, 다른 생각 못하도록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주문을 했던 것이다. 한창 나이에 어린 남편도 서러운데, 힘에 겨운 집안일까지 도맡아 해야 되었던 것이니, 「시집살이」라면 죽은 체하고 체념으로 버틸 수 밖에 없다는 인생 철학도 여기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시어머니도 며느리적 시절이 있었으련만, 그런 것은 까마득하게 잊은 듯 하루 한 시도 쉬지 않고 구박을 하는데는, 아무리 부처의 가운데 토막 같은 며느리라도 시어머니 좋아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姑婦間」이란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며느리 늙어 시어미 된다」는 말도, 시어머니의 그 암상스러움을 더욱 풍자해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고된 시집살이를 하며 낳아 기른 아들, 그 아들이 며느리와 더 가깝다는 사실은 기실 그 시어머니의 마음을 흔들어놀만도 하다. 며느리 밥 먹는 것 보기가 싫어, 밥쌀을 되는 쪽박을 작은 것을 주어 놓고는, 몇 쪽박씩만 밥을 하라고, 그 양의 제한을 가해 논 시어머니 때문에 굶어 죽은 며느리가 있었단다. 그 며느리는 하도 원통하고 분하여 죽어서까지도 명부(溟府)에 가지 못하고, 살아 생전 시어머니를 찾아가, 동산 뒷켠 나무에 앉아서는 「쪽박 바꿔주」하고 서글피 울었단다. 그 새가 바로 두견새요, 두견새의 울음소리는 누가 들어도 처절한 느낌인 것도 이러한 전설을 생각해서가 아닐까. 어쨌든 그 새는 그렇게 울다울다 죽어갔고(8,008聲을 운다나), 죽으면서 토한 피가 진달래꽃에 가 묻어, 진달래꽃을 「두견화」라고도 한다는 것이었다. 불교적 윤회설을 보면 萬物은 죽어서 流轉된다는데, 이 너무나 원통한 새의 넋은, 서러움이 지나쳐서 다른 존재로도 태어날 수 없고 또다시 두견새로 되어버린다 한다 해서 두견새를 「不如歸」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새옷 입혀 내 놓으면, 금세 다시 흙투성이가 되어 들어오는, 동생도 몇 번째 동생뻘밖에 안 되는 남편을, 명색이 남편이니 쥐어박을 수도 없는 일…오죽하면 지붕 위에다 올려 놓기까지 했으랴.
밖에서 들어오던 시부모님이 그것을 보셨고, 며느리의간이 콩알만해 졌을 때, 「작은 박을 딸까요, 큰 박을 딸까요?」 능청스레 물어보아, 아내의 위기를 모면시켜 주었다던가?
남편이랍시고 아내 아낄 줄은 알았던 모양이지만, 그러한 어른스러움은 며느리들에게 「三從之道」와 「七去之惡」의 規範을 더욱 義務化해 주었을 뿐이다.
잠아 잠아 오지 마라.
시어머니 눈에 난다.
시어머니 눈에 나면
임의 눈에 절로 난다.
(任東權 編/ 韓國民謠集/ 잠노래)
시어머니의 눈에 나지 않기 위해 시집살이 석삼 년을 벙어리요, 장님이요, 귀머거리 행세로 지내다 보니, 시어머니가 정말로 벙어리로 알고 내어 쫓더라는 얘기가 있다. 「출가외인」이라 받아 주려고도 하지 않을 친정집이건만, 하는 도리 없이 친정으로 가던 며느리가, 집동네 거의 다 가서야, 동산에 앉았던 꿩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꺼더득이 날아간다」 말을 했고, 그 말들은 시아버지가 벙어리가 아니더라고 또다시 시집으로 데려갔다는 얘기는, 지나친 과장의 얘기라고 웃고 넘겨야만 할 일이었을까?
며느리가 보기 싫어서 「외손자 업고 친손자 걸리는」 시어머니. 어디 그뿐이랴. 때리는 시어미보다 더욱 미운, 「말리는 시누이」는 또 어쩌고.
못할네라 못할네라
시집살이 못할네라
열세 무명 열폭 치마
눈물 받기 다 썩었네.
못할네라 못할네라
시집살이 못할네라
해주 자지 반자지로
지어 입은 저고리도
눈물 받기 다 젖었네.
(殷栗地方 民謠/ 三年啞婦譚/ 任東權 採集)
그러나 어디 눈물인들 마음 놓고 흘릴 수 있었을 것이냐. 기껏해야 부엌 구석에서 내지도 않는 연기 탓을 하면서, 치마폭 옷고름에 맺히기가 무섭게 꼭꼭 찍어내는 몇 방울 의 눈물로 그쳐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저 틈이 날 때에는, 바느질이나, 빨래, 혹은 다듬이질을 하며 슬플 겨를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 다듬이 소리가 하나의 가락을 띠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나날을 한숨으로 보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말렸을 것인가. 또 그 소리에는 얼마나 많은 원망의 말이 스며들었을 것인가. 「동지 섣달에 베잠방이를 입을망정 다듬잇소리는 듣기 싫다.」는 시어머니의 말은, 자기도 며느리 적에 시어머니를 원망하면서 다듬이 방망이를 힘껏 내리쳤었을 터수라, 며느리의 팔이 떨어져라 두들기는 다듬이 소리가 좋게 들릴 리가 있었겠는가? 하도 많은 원망이 쌓이고 쌓인 다듬잇돌인지라, 그 주술적인 힘이 두려워 「다듬잇돌을 베고 누우면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도 생겨났으리라.
다듬이 소리가 사라져 간다는 것은 현대의 여성들을 위해서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소리가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도 그 소리 속에는 바로 우리 어머니의,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오랜 옛적 우리 여인네들의 정한이 담겨있고, 그러한 정한의 지니고 있는 어머니들의 다듬이 소리를 들으면서 어린 시절을 자라왔기에, 오히려 여인들을 연민하는 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혹은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너무나도 이기주의, 편의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을 대하다가 보니까, 다듬이질을하면서 옷감을 다듬는일은 물론 마음까지도 함께 가다듬어 德을 갖추기에 힘쓰던 지난날의 여성들에 대한 아쉬움에서일까?
마지막으로 梁 柱東 博士의 「다듬이 소리」라는 詩가 좋아 여기 소개한다.
이웃집 다듬이 소리/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잦아가네/ 무던히 졸리기도 하련만/ 닭이 울어도 그대로 그치지 않네/ 의 좋은 동서끼리/ 오는 날의 집안 일 재미 있게 이야기 하며/ 남편들의 겨울옷 정성껏 짓는다며는/ 몸이 가쁜들 오죽이나 기쁘랴마는/ 혹시나 어려운 살림살이/ 저 입은 옷은 헤어졌거나 헐벗거나 하기 싫은 품팔이, 남의 비단 옷을/ 밤새껏 다듬지나 아니 하는가/ 피마자 등불조차/ 가물가물 조을고 있을 이 밤중인데/ 아낙네들 얼마나 눈이 감기고 팔이 아플까/ 아직도 도르락 소리는 그냥 들리네// 어려서는 가을밤 다듬이소리/ 담 밑에서 노래 삼아 들었더니만/ 지금은 어지러운 생각 그지없어서/ 幽風七月章 다시 외어 볼 흥치도 없네.
※2020.8.4.입력. 원고지 24매.
*‘李 敬南’에서 성과 이름을 띄어 쓴 것이나 ‘귀절’이란 표기는 당시 표기법을 따른 것이요, ‘허구많은’은 요즘에는 ‘하고많은’이 규범적 표기이지만, 강원도 태생인 필자는 강원도 방언으로 쓰는 것이 편하게 느껴져서 그대로 표기했다. ‘다듬이 소리’라고 두 단어로 사용하는 것는 제 맛이 나질 않기도 하고, 詩의 원문에서도 ‘다듬잇소리’로 표기한 것이기에 그대로 따랐다.
‘얹혀져’는‘얹혀’로 충분한 것을 그만 필자의 잘못으로 2중 피동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없는아이들은’과 ‘제나름대로’, ‘줄어서된’이 붙여 쓰인 것은 편집자의 잘못일 터이다.
‘옷감등을’은 옷감의 복수인 경우에는 붙여 써도 되지만, 옷감과 옷감이 아닌 다른 물건, 예컨대 이불보, 베갯잇 따위를 함께 일컫는 경우라면 ‘등등’의 뜻이므로 띄어 쓰는 것이 옳을 것인 바, 이 역시 편집자에게 그 잘못이 돌아갈 띄어쓰기라 할 것이다.
‘가까와 졌을까’가 띄어 쓰인 것도 편집자의 잘못일 터, ‘가까워’가 아니고 ‘가까와’로 된 표기는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 때문이라 하겠다. ‘모계 사회’를 띄어 쓴 것도 당시의 관습적인 표기였다고 생각된다.
‘남자들에게’가 반복된 표현은 분명 필자의 잘못일 터이지만, ‘남자 들에게넘겼을’은 ‘남자들에게 넘겼을’로 씌어져야 할 것인데, 편집자의 실수로 잘못 쓰인 것으로 보인다. ‘부계 사회’는 아직도 붙여 쓰는 일보다는 띄어서 쓰는 것이 일반적인 표기라고 여겨진다. ‘따라서’는 없는 편이 나을 것인데, 필자가 필요 없이 덧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해야될’을 붙여 쓴 것은 아마도 필자의 실수일 것이다. ‘바깥양반’이 ‘바깥냥반’으로 잘못 표기된 것도 필자의 실수임에 틀림없다.
‘밥짓기, 바느질하기, 빨래하기, 다듬이질하기’들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하나의 단어로 취급을 해 주지 않았으나, 이런 말들은 한 단어로 굳혀 써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데릴사위제도’는 ‘데릴사위제’로 쓰면 한 낱말 취급을 해 주는데, ‘데릴사위제도’는 두 낱말로 처리하고 있는 표준국어대사전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 여겨진다.
‘장가 보내’나 ‘맞아 들이고는’을 두 단어로 생각했던 것은 필자가 잘못 생각하였던 때문으로 보인다.
‘수 밖에’를 띄어 쓴 것을 편집자의 실수요, ‘인생 철학’을 띄어 쓴 것은 필자의 잘못으로 인한 표기이다. ‘하는데는’을 붙여 쓴 것은 다시 편집자에게로 책임을 돌린다.
‘흔들어놀만도’는 ‘흔들어 놓을 만도’라야 할 것인데,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잘못되었다. 순전히 필자의 잘못이 아니었나 싶다. ‘논’도 ‘놓은’이라야 할 것인데, 역시 필자의 실수이다.
‘명부(溟府)’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冥府’로만 나와 있지만 ‘溟府’로 써서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살아 생전’도 요사이에는 한 낱말로 취급이 되는데 글쎄 그렇게 규정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뒷켠’은 격음 앞이기에 ‘사이시옷’이 불필요한 것을 필자가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꿔주’는 띄어 써야 할 것을 역시 필자가 잘못 붙여 쓴 것으로 여겨진다.
‘한다’는 없어도 될 말인데, 역시 필자가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올려 놓다’도 요사이에는 한 단어로 취급되고 있으니 이 역시 필자의 잘못이다. ‘며느리의간이 ’에서 ‘간이’가 붙여 쓰인 것과,‘콩알만해 졌을때’는 ‘콩알만 해 졌을 때’라야 할 것인 바, 편집자의 잘못으로 생각된다.
‘석삼 년’도 요사이에는 한 단어로 취급되고 있는데,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어 쫓더라’는 ‘내쫓더라’로 써야 할 것을 필자가 잘못 쓴 것으로 치부된다. ‘집동네’도 필자가 잘못 한 단어로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말들은’은 ‘말을 들은’이라야 할 것인 바, 편집자의 실수로 보인다.
‘열폭’은 띄어 써야 할 말이지만 원문대로 표기했다.
‘任東權 採集’뒤에서 한 줄을 띄어야 할 것을 붙인 것은 편집자의 실수라 하겠다. 그런가 하면, ‘방울 의’가 띄어진 것도 같은 경우라 보인다.
‘동지 섣달’을 한 단어로 취급하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필자의 잘못이라 하겠고,‘다듬잇소리’를 한 단어로 치부한 표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다듬잇소리’는 한 단어로 취급해 주지 않으면서, ‘다듬잇돌’은 한 단어로 취급하고 있으니, 글쎄, 그래야만 할 일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다듬이질을 하면서’와 ‘다듬는 일은’으로 띄어 쓰지 못산 것은 편집자의 잘못일 터,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梁 柱東’은 당시 표기로는 성과 이름을 띄어 쓰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리고 ‘梁 柱東 博士의 「다듬이 소리」라는 詩’는 당연히 한 행을 비우고 인용되었어야 할 것인 바, 이는 편집자에게로 책임을 돌리기로 한다. 그리고 ‘의 좋은’‘재미 있게’를 띄어 쓴 것, ‘졸고’가 아닌 ‘조을고’은 시적 운율을 위한 표기였을 것인데 원문대로 인용하였다.
그리고 ‘幽風七月章’이란 중국의 古詩篇을 지칭하는 말임을 첨언한다.
※ 밑줄 친 부분에 대한 설명도 함께 볼 수 있도록 2단으로 배열한 것은 첨부 파일을 이용하면 편하다.
다듬이
(이웅재 칼럼⑮,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6월호, pp.78~79.)
한식 아침이나/ 추석달밤/ 담 모퉁이를 문득 돌아서다 듣는 다듬잇소리.
李 敬南의 「고향은」이란 詩의 한 귀절이다. 허구많은 사연을 간직했음 직하게 느껴지는 그 고향의 소리는 이제 우리 주위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어쩌면, 한국인다운 맛과 멋을 풍기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 다듬잇소리는, 우리네 어머니의, 우리네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오랜 옛적 여인네들의 알알이 맺혀온 애환의 가락이 아닐까?
「세탁소」 「드라이 크리닝」…이런 편리한 이름들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지난날 여인네들의 그 숱한 애환의 사연들도 고운 보자기에 차곡차곡 쌓이고, 싸여져서는 높다란 시렁 위, 어린애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얹혀져 버리고 말았다. 키가 자라지 않아 그 사연들을 풀어 볼 수 없는아이들은 보자기 속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어졌다. 제나름대로 공상과 상상을 해 가면서 지내는 동안 그 보자기 속 사연들은 이제 향수를 자아내게까지 되어 버렸다.
「다듬이」라는 말은 「다듬이질」이 줄어서된 말로서, 「다듬질」이라고도 하며, 「옷감등을 방망이로 다듬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며, 「다듬다」는 여러 가지의 뜻을 지니고 사용되는 말이지만, 이 경우에는 「매만져서 맵시를 내다」「곱게 닦다」「옷감등을 방망이로 두드려서 반드랍게 하다」 따위로 쓰이는 말이다. 우리의 여인네들은 남정네들의 옷감을 다듬으면서, 때로는 서럽고, 때로는 억울하기도 한 자신의 마음까지도 다듬으며 지냈던 것이다.
언제부터 여인네들이 다듬이와 가까와 졌을까? 애시당초에 모계 사회를 이룩했던 여인네들이 그 언제부터 「안사람」으로 고정되어 버리고, 「바깥양반」의 옷시중을 들게 되었을까? 모권 사회에서는 여성도 강건한 육체를 소유했었을 것이다. 남자들에게 힘이 모자라 모권을 넘겨 남자 들에게넘겼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부계 사회가 생겨났을까? 그것은 따지고 보면, 여성들의 신체적 생리 조건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즉 여성들은 그 생리적 구조면에서 볼 때 수동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네들은 아이를 낳아야 하고, 아이를 길러야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매달려야 하는 그 시간 동안, 맹수나 적대 부족이 침입해 오면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 이것은 남정네들로 하여금 자연히 「바깥냥반」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까닭이 되었으며, 그 「바깥냥반」들의 대외적 활동을 좀더 효과적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여인네들은 자연히 그들의 뒷바라지―밥짓기, 바느질하기, 빨래하기, 다듬이질하기…등 「안사람」으로서의 일들을 해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 시대만 하더라도 그 초기에는 「데릴사위제도」(예서제)가 있어서, 모계 사회로서의 일면을 남겨 놓고 있었지만, 남정네들의 활동상이 확대되어 가면서, 부권 사회의 「代」를 이어갔던 것이다.
게다가 그「代」에 집착한 부모님네들은 열 살 안팎의 어린 아들을 장가 보내 꽃다운 처녀를 며느리로 맞아 들이고는, 다른 생각 못하도록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주문을 했던 것이다. 한창 나이에 어린 남편도 서러운데, 힘에 겨운 집안일까지 도맡아 해야 되었던 것이니, 「시집살이」라면 죽은 체하고 체념으로 버틸 수 밖에 없다는 인생 철학도 여기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시어머니도 며느리적 시절이 있었으련만, 그런 것은 까마득하게 잊은 듯 하루 한 시도 쉬지 않고 구박을 하는데는, 아무리 부처의 가운데 토막 같은 며느리라도 시어머니 좋아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姑婦間」이란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며느리 늙어 시어미 된다」는 말도, 시어머니의 그 암상스러움을 더욱 풍자해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고된 시집살이를 하며 낳아 기른 아들, 그 아들이 며느리와 더 가깝다는 사실은 기실 그 시어머니의 마음을 흔들어놀만도 하다. 며느리 밥 먹는 것 보기가 싫어, 밥쌀을 되는 쪽박을 작은 것을 주어 놓고는, 몇 쪽박씩만 밥을 하라고, 그 양의 제한을 가해 논 시어머니 때문에 굶어 죽은 며느리가 있었단다. 그 며느리는 하도 원통하고 분하여 죽어서까지도 명부(溟府)에 가지 못하고, 살아 생전 시어머니를 찾아가, 동산 뒷켠 나무에 앉아서는 「쪽박 바꿔주」하고 서글피 울었단다. 그 새가 바로 두견새요, 두견새의 울음소리는 누가 들어도 처절한 느낌인 것도 이러한 전설을 생각해서가 아닐까. 어쨌든 그 새는 그렇게 울다울다 죽어갔고(8,008聲을 운다나), 죽으면서 토한 피가 진달래꽃에 가 묻어, 진달래꽃을 「두견화」라고도 한다는 것이었다. 불교적 윤회설을 보면 萬物은 죽어서 流轉된다는데, 이 너무나 원통한 새의 넋은, 서러움이 지나쳐서 다른 존재로도 태어날 수 없고 또다시 두견새로 되어버린다 한다 해서 두견새를 「不如歸」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새옷 입혀 내 놓으면, 금세 다시 흙투성이가 되어 들어오는, 동생도 몇 번째 동생뻘밖에 안 되는 남편을, 명색이 남편이니 쥐어박을 수도 없는 일…오죽하면 지붕 위에다 올려 놓기까지 했으랴.
밖에서 들어오던 시부모님이 그것을 보셨고, 며느리의간이 콩알만해 졌을 때, 「작은 박을 딸까요, 큰 박을 딸까요?」 능청스레 물어보아, 아내의 위기를 모면시켜 주었다던가?
남편이랍시고 아내 아낄 줄은 알았던 모양이지만, 그러한 어른스러움은 며느리들에게 「三從之道」와 「七去之惡」의 規範을 더욱 義務化해 주었을 뿐이다.
잠아 잠아 오지 마라.
시어머니 눈에 난다.
시어머니 눈에 나면
임의 눈에 절로 난다.
(任東權 編/ 韓國民謠集/ 잠노래)
시어머니의 눈에 나지 않기 위해 시집살이 석삼 년을 벙어리요, 장님이요, 귀머거리 행세로 지내다 보니, 시어머니가 정말로 벙어리로 알고 내어 쫓더라는 얘기가 있다. 「출가외인」이라 받아 주려고도 하지 않을 친정집이건만, 하는 도리 없이 친정으로 가던 며느리가, 집동네 거의 다 가서야, 동산에 앉았던 꿩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꺼더득이 날아간다」 말을 했고, 그 말들은 시아버지가 벙어리가 아니더라고 또다시 시집으로 데려갔다는 얘기는, 지나친 과장의 얘기라고 웃고 넘겨야만 할 일이었을까?
며느리가 보기 싫어서 「외손자 업고 친손자 걸리는」 시어머니. 어디 그뿐이랴. 때리는 시어미보다 더욱 미운, 「말리는 시누이」는 또 어쩌고.
못할네라 못할네라
시집살이 못할네라
열세 무명 열폭 치마
눈물 받기 다 썩었네.
못할네라 못할네라
시집살이 못할네라
해주 자지 반자지로
지어 입은 저고리도
눈물 받기 다 젖었네.
(殷栗地方 民謠/ 三年啞婦譚/ 任東權 採集)
그러나 어디 눈물인들 마음 놓고 흘릴 수 있었을 것이냐. 기껏해야 부엌 구석에서 내지도 않는 연기 탓을 하면서, 치마폭 옷고름에 맺히기가 무섭게 꼭꼭 찍어내는 몇 방울 의 눈물로 그쳐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저 틈이 날 때에는, 바느질이나, 빨래, 혹은 다듬이질을 하며 슬플 겨를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 다듬이 소리가 하나의 가락을 띠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나날을 한숨으로 보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말렸을 것인가. 또 그 소리에는 얼마나 많은 원망의 말이 스며들었을 것인가. 「동지 섣달에 베잠방이를 입을망정 다듬잇소리는 듣기 싫다.」는 시어머니의 말은, 자기도 며느리 적에 시어머니를 원망하면서 다듬이 방망이를 힘껏 내리쳤었을 터수라, 며느리의 팔이 떨어져라 두들기는 다듬이 소리가 좋게 들릴 리가 있었겠는가? 하도 많은 원망이 쌓이고 쌓인 다듬잇돌인지라, 그 주술적인 힘이 두려워 「다듬잇돌을 베고 누우면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도 생겨났으리라.
다듬이 소리가 사라져 간다는 것은 현대의 여성들을 위해서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소리가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도 그 소리 속에는 바로 우리 어머니의,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오랜 옛적 우리 여인네들의 정한이 담겨있고, 그러한 정한의 지니고 있는 어머니들의 다듬이 소리를 들으면서 어린 시절을 자라왔기에, 오히려 여인들을 연민하는 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혹은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너무나도 이기주의, 편의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을 대하다가 보니까, 다듬이질을하면서 옷감을 다듬는일은 물론 마음까지도 함께 가다듬어 德을 갖추기에 힘쓰던 지난날의 여성들에 대한 아쉬움에서일까?
마지막으로 梁 柱東 博士의 「다듬이 소리」라는 詩가 좋아 여기 소개한다.
이웃집 다듬이 소리/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잦아가네/ 무던히 졸리기도 하련만/ 닭이 울어도 그대로 그치지 않네/ 의 좋은 동서끼리/ 오는 날의 집안 일 재미 있게 이야기 하며/ 남편들의 겨울옷 정성껏 짓는다며는/ 몸이 가쁜들 오죽이나 기쁘랴마는/ 혹시나 어려운 살림살이/ 저 입은 옷은 헤어졌거나 헐벗거나 하기 싫은 품팔이, 남의 비단 옷을/ 밤새껏 다듬지나 아니 하는가/ 피마자 등불조차/ 가물가물 조을고 있을 이 밤중인데/ 아낙네들 얼마나 눈이 감기고 팔이 아플까/ 아직도 도르락 소리는 그냥 들리네// 어려서는 가을밤 다듬이소리/ 담 밑에서 노래 삼아 들었더니만/ 지금은 어지러운 생각 그지없어서/ 幽風七月章 다시 외어 볼 흥치도 없네.
*‘李 敬南’에서 성과 이름을 띄어 쓴 것이나 ‘귀절’이란 표기는 당시 표기법을 따른 것이요, ‘허구많은’은 요즘에는 ‘하고많은’이 규범적 표기이지만, 강원도 태생인 필자는 강원도 방언으로 쓰는 것이 편하게 느껴져서 그대로 표기했다. ‘다듬이 소리’라고 두 단어로 사용하는 것는 제 맛이 나질 않기도 하고, 詩의 원문에서도 ‘다듬잇소리’로 표기한 것이기에 그대로 따랐다.
‘얹혀져’는‘얹혀’로 충분한 것을 그만 필자의 잘못으로 2중 피동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없는아이들은’과 ‘제나름대로’, ‘줄어서된’이 붙여 쓰인 것은 편집자의 잘못일 터이다.
‘옷감등을’은 옷감의 복수인 경우에는 붙여 써도 되지만, 옷감과 옷감이 아닌 다른 물건, 예컨대 이불보, 베갯잇 따위를 함께 일컫는 경우라면 ‘등등’의 뜻이므로 띄어 쓰는 것이 옳을 것인 바, 이 역시 편집자에게 그 잘못이 돌아갈 띄어쓰기라 할 것이다.
‘가까와 졌을까’가 띄어 쓰인 것도 편집자의 잘못일 터, ‘가까워’가 아니고 ‘가까와’로 된 표기는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 때문이라 하겠다. ‘모계 사회’를 띄어 쓴 것도 당시의 관습적인 표기였다고 생각된다.
‘남자들에게’가 반복된 표현은 분명 필자의 잘못일 터이지만, ‘남자 들에게넘겼을’은 ‘남자들에게 넘겼을’로 씌어져야 할 것인데, 편집자의 실수로 잘못 쓰인 것으로 보인다. ‘부계 사회’는 아직도 붙여 쓰는 일보다는 띄어서 쓰는 것이 일반적인 표기라고 여겨진다. ‘따라서’는 없는 편이 나을 것인데, 필자가 필요 없이 덧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해야될’을 붙여 쓴 것은 아마도 필자의 실수일 것이다. ‘바깥양반’이 ‘바깥냥반’으로 잘못 표기된 것도 필자의 실수임에 틀림없다.
‘밥짓기, 바느질하기, 빨래하기, 다듬이질하기’들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하나의 단어로 취급을 해 주지 않았으나, 이런 말들은 한 단어로 굳혀 써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데릴사위제도’는 ‘데릴사위제’로 쓰면 한 낱말 취급을 해 주는데, ‘데릴사위제도’는 두 낱말로 처리하고 있는 표준국어대사전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 여겨진다.
‘장가 보내’나 ‘맞아 들이고는’을 두 단어로 생각했던 것은 필자가 잘못 생각하였던 때문으로 보인다.
‘수 밖에’를 띄어 쓴 것을 편집자의 실수요, ‘인생 철학’을 띄어 쓴 것은 필자의 잘못으로 인한 표기이다. ‘하는데는’을 붙여 쓴 것은 다시 편집자에게로 책임을 돌린다.
‘흔들어놀만도’는 ‘흔들어 놓을 만도’라야 할 것인데,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잘못되었다. 순전히 필자의 잘못이 아니었나 싶다. ‘논’도 ‘놓은’이라야 할 것인데, 역시 필자의 실수이다.
‘명부(溟府)’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冥府’로만 나와 있지만 ‘溟府’로 써서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살아 생전’도 요사이에는 한 낱말로 취급이 되는데 글쎄 그렇게 규정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뒷켠’은 격음 앞이기에 ‘사이시옷’이 불필요한 것을 필자가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꿔주’는 띄어 써야 할 것을 역시 필자가 잘못 붙여 쓴 것으로 여겨진다.
‘한다’는 없어도 될 말인데, 역시 필자가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올려 놓다’도 요사이에는 한 단어로 취급되고 있으니 이 역시 필자의 잘못이다. ‘며느리의간이 ’에서 ‘간이’가 붙여 쓰인 것과,‘콩알만해 졌을때’는 ‘콩알만 해 졌을 때’라야 할 것인 바, 편집자의 잘못으로 생각된다.
‘석삼 년’도 요사이에는 한 단어로 취급되고 있는데,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어 쫓더라’는 ‘내쫓더라’로 써야 할 것을 필자가 잘못 쓴 것으로 치부된다. ‘집동네’도 필자가 잘못 한 단어로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말들은’은 ‘말을 들은’이라야 할 것인 바, 편집자의 실수로 보인다.
‘열폭’은 띄어 써야 할 말이지만 원문대로 표기했다.
‘任東權 採集’뒤에서 한 줄을 띄어야 할 것을 붙인 것은 편집자의 실수라 하겠다. 그런가 하면, ‘방울 의’가 띄어진 것도 같은 경우라 보인다.
‘동지 섣달’을 한 단어로 취급하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필자의 잘못이라 하겠고,‘다듬잇소리’를 한 단어로 치부한 표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다듬잇소리’는 한 단어로 취급해 주지 않으면서, ‘다듬잇돌’은 한 단어로 취급하고 있으니, 글쎄, 그래야만 할 일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다듬이질을 하면서’와 ‘다듬는 일은’으로 띄어 쓰지 못산 것은 편집자의 잘못일 터,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梁 柱東’은 당시 표기로는 성과 이름을 띄어 쓰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리고 ‘梁 柱東 博士의 「다듬이 소리」라는 詩’는 당연히 한 행을 비우고 인용되었어야 할 것인 바, 이는 편집자에게로 책임을 돌리기로 한다. 그리고 ‘의 좋은’‘재미 있게’를 띄어 쓴 것, ‘졸고’가 아닌 ‘조을고’은 시적 운율을 위한 표기였을 것인데 원문대로 인용하였다.
그리고 ‘幽風七月章’이란 중국의 古詩篇을 지칭하는 말임을 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