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딸 임서영

이 한 장의 사진에서 느끼는 행복

거북이3 2006. 2. 2. 17:37
 

이 한 장의 사진에서 느끼는 행복

                                                                                           이   웅   재 


음력 정월 초하루, 바로 설날에 사진 한 장이 나를 찾아왔다. 20×25cm 크기의 사진이 자연스런 나무의 빛깔과 결을 지닌 4각의 사진틀 안에 들어있는 채 내게로 왔다. 모든 기하학적 형상 가운데 가장 안정적인 모습인 4각의 틀에 들어있기에 사진의 모습도 매우 안정적으로 느껴진다.

 원형은 한 곳에 정착하기가 힘들다. 그것은 다른 존재의 도움이 없다면 항상 어디론가 굴러가야 하는 것이다. 축구, 배구, 농구, 야구 등의 구기(球技)는 그와 같은 원형의 도구를 이용한 경기이다. 따라서 구기는 매우 정확한 예측을 필요로 한다.

 저 공이 어디로 굴러갈 것인가? 모든 가능성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기에, 경기자는 물리적인 움직임을 가지는 공의 변화에 따른 판단을 정확하게 포착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4각은 다르다. 4각은 멈춰있기를 즐긴다. 그것은 어느 쪽으로 방향을 바꿔 놓든지 간에 늘 정착의 묘를 연출한다. 가장 안정적인 형태를 취한다는 말이다. 4라는 숫자가 홀수가 아닌 짝수라는 점도 안정성에 일조를 한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밑변을 바닥으로 삼고 있는 삼각형이 더욱 안정된 모습이 아니겠느냐고?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다. 형태 변화를 시켜보면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가 있다. 꼬집어서 말해보자. 예컨대, 역삼각형 형태로 바꿔보자는 말이다. 그러면 가장 안정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삼각형은 어쩌면 가장 불안정한 모습으로 돌변하지 않는가?

 사진틀 속의 사진의 색깔은 전체적으로 노란빛이다. 노랑은 어둡지 않은 빛깔이다. 노랑은 밝음의 색이다. 노랑은 고귀한 색조이다. 노랑은 귀족의 빛이다. 노랑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광휘이다. 아름다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움을 이끌어가는 광망이다.

 봄, 우리는 흔히들 개나리꽃에서 봄을 느낀다. 그게 무슨 빛깔인가? 노랑이 아니던가? 어떤 이는 개나리보다 먼저 피는 것, 봄을 봄이게 만들어 주는 것은 매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매화는 우리 옛 선조들이 좋아했던 꽃. 선구자의 의미와 굳센 지조의 뜻을 함께 지니고 있는 꽃. 그래서 우리는 매화라면 한말의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 같은 분을 떠올리곤 한다. 그 꽃도 노란 빛깔이 아니던가?

매화처럼 절개의 상징으로까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매화보다 먼저 피어나는 노란 빛깔의 꽃이 있다. 매화로 하여금 제 잘난 맛을 마음껏 누리려다가, 미안한 마음에 움찔, 그 개화를 며칠 늦추게 만드는 꽃, 그것은 바로 산수유 꽃이다. 옛날엔 산에서만 볼 수 있어서 산수유였었는데, 이젠 그 이름을 바꾸어야 할 정도로 ‘속세’에까지 진출 내지는 침투한 꽃이다. 매화나 산수유나 계절을 처음 느끼게 해주는 꽃들인데, 내 사진의 빛깔은 그 매화, 산수유를 닮았다.

 그러니까 노랑은 ‘처음’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내세우는 빛깔이기도 한 것이다. ‘처음’이란 ‘힘든 것’, ‘처음’이란 ‘잊혀지지 않는 것’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처음’ 없이는 ‘끝’이 있을 수 없고, ‘처음’ 없이는 ‘영원’도 존재할 수 없는 것. ‘처음’은 비록 장대하지 못했더라도 그 귀착점인 ‘마지막’에 가서는 아무도 범접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모습으로 변하는 사례들을 우리는 흔히 보아오지 않았던가?

 내 사진은 배경도 노랑, 입은 옷도 노랑이었다. 살색, 아, 살색은 ‘노랑’이 아니지. ‘살색’은 ‘살색’이지?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같은 계열의 빛깔. 그래서 우리들을 황인종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살색의 여인(?)이 웃고 있었다.

 눈썹은 약간 희미한 편, 그러니까 제 말만 제일이라고 우기는 아줌마들의 ‘고집’하고는 천양지차의 모습을 지녔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그 뚜렷하지 못함을 흠결로 내세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과는 격이 다르다.

 그 눈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눈은 크지도 작지도 않다. 아니, 약간 크다. 쌍꺼풀은 없다. 눈꼬리는 있는 듯 마는 듯하다. 까만 눈동자, 무척은 중요하다고들 하는 눈동자는 잡스런 빛이 전혀 섞이지 않은 까망이다. 그래, 맞다. 그 눈동자를 보면, 당신들,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거침없이 흘러내린 콧잔등, 그 양쪽으로 적당하게 제자리를 잡은 콧방울. 부드럽다. 모든 게 부드러웠다. 그 아래쪽으로 끼끗하게 느껴지는 인중을 이루는 선, 그리고, 그리고 그 아래로는 자연스럽게 반쯤 벌린 입이 있다.

 윗입술은 조금 얇은 편이다. 아랫입술이 그보다 도톰하기는 하지만, 정말로 이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찾아보기 힘든, 그런 입술이다.

 약간 앞으로 엎드린 자세, 상반신만 보인다. 에구, 브라자도 안 했네. 티 없이 밝게 웃는 모습은 아직은 그런 것 필요 없다는 메시지.

 토끼 같은 모자. 까만 방울도 두 개 달려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러운, 우리가 일부러 따라할 수 없는 미소, 밝고 맑고 깨끗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서영아, 까꿍!”

웃는다. 웃었다. 까르르! 웃었다. 난 그 웃음을 잊을 수가 없다. 웃느라 벌려진 입을 보니 새하얗고 조그마한 이가 두 개 새로 돋았다.

 우리 서영이, 내 최초의 외손녀, 서영이의 사진을 보면서 오늘도 그 웃음에 취해본다. 아,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