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함께 감자탕 먹어줄 사람 없나요?
누구 함께 감자탕 먹어줄 사람 없나요?
이 웅 재
6시까지는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다. 약속장소를 향해 가고 있는 나는 계속 마음이 조급했다. 잠실, 여기서 지하철을 갈아타야 한다. 2호선으로. 그런데 환승로가 너무 멀다. 10분 정도가 걸릴 정도로 환승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데서 조급한 마음을 먹으면 입술만 바싹바싹 탈 뿐이다. 억지로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여유를 부려 보지만,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은 잦아진다. 드디어 환승 장소 도착. 여기서 한 정거장만 가면 된다. 신천이 목적지인 것이다.
그런데 그 한 정거장은 멀었다. 사실은 정거장이 먼 것이 아니라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이었을 테지만. 그렇게 공간이나 시간이란 개념은 매우 자의적(恣意的)이었다.
가까스로 신천 도착. 개찰구를 지나 만남의 광장에 도착한 시간은, 약속 시간에서 5분이 지나 있었다. 후유,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양호하지. 아무리 칼날 같이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5분이야 못 기다려 주랴?
그런데, 아니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약속한 친구는 나타나질 않았다. 벌써 왔다 간 건가? 친구에게 나는 5분보다도 짧은 시간적 가치로밖에는 인식되지 못하는 관계일 뿐이었던가? 물론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한 나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다. 그러나 5분도 기다려줄 수 없는 친구였다면 그에게서 신의를 기대한다는 일도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섭섭했다. 5분을 더 기다려 보았다. 하지만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핸드폰을 걸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5분 늦은 내가 제 시간에 와서 5분을 기다려주지 않은 친구에게, 아니면 10분 정도를 기다렸던 나보다 더 늦으면서도 연락이 없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 기분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 시간의 처리였다. 약속대로 만났더라면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두꺼비 몇 마리를 깠을 것이다. 헌데, 지금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저녁 6시였다. 시간은 이번에도 나를 골리고 있었다. 주책없이 배가 고파오는 것이다.
나는 잠시 어찌해야 될까 혼란스러웠다. 다음 순간 나는 결정했다. 집으로 돌아가자면 7시 반쯤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때쯤엔 집에서도 저녁 식사 시간은 끝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어차피 혼자 먹어야 할 수밖에 없는 일, 여기서 먹고 들어가자고. 해서 지하철역에서 나와 길을 건너 먹자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다시 난감해졌다. 어느 집으로 들어간다? 무얼 먹는다? 친구와 함께라면 서로 의논을 해서 정하면 될 터인데, 내 마음대로 정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자의(恣意)가 화합(和合)보다도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느꼈다.
고장 난 시계추마냥 한참 동안을 갔던 길 돌아오고, 돌아온 길 다시 가면서 내가 잠시 주접(住接)을 해야 할 곳을 물색했다. 불고기집을 지나면서는 냄새는 근사하지만 체중 불어날 것을 걱정해야 했고, 아구집을 들여다보고는 ‘아귀’라야 맞는 표기라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들어가길 주저했다. 횟집도 동태찌개집도 내 선택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면서 밥을 혼자 먹는 일은, 더구나 혼자서 매식하는 일은 엄청 힘든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음식이 고급일수록 더욱 혼자 먹기가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싸고 서민적인 음식은 요기(療飢)를 하기 위한 절대적 필요성이 혼자 먹는 일을 합리화시켜 줄 수 있지만, 비싼 고급 음식일수록 그러한 기본적인 욕구에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일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말하자면 그런 음식은 일종의 사교적 성격이 상당한 정도로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허름한 감자탕집을 선택했다.
“어서 오세요.”
종업원은 의외로 젊고 예쁜 아가씨였다. 나중에 보니, 가게 안을 오락가락하는 초등학교 2,3학년쯤의 우량아가, 그 아가씨를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줌마’라는 호칭은 어쩐지 걸맞지 않게 여겨졌다.
“무얼 드시겠어요?”
다행이었다. ‘혼자 오셨어요?’ 하고 물었다면, 무척 당황스러웠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감자탕이요!”
시커먼 뚝배기에 수북하게 담긴 감자탕. 정말로 오래간만에 먹어보는 음식이었다. 큼지막한 뼈다귀가 몇 개 들어 있었고, 블그죽죽한 국물에 우거지도 적당했다.
몇 가지 반찬에다가 밥도 한 공기 따라 나왔다.
“밥은 필요 없는데요.”
물려 버리고, 대신 쐬주 한 병을 시켰다. 그리곤 혼자서 술을 따르고, 국물 한 숟갈 떠먹고, 쐬주 한 잔 털어넣고, 약하게 ‘카!’ 소리 내 보고, 뚝배기 속의 큼지막한 뼈다귀 하나를 건져서 양손으로 잡고, 아귀아귀 뜯어먹는 그 맛이란……. 나는 어느덧 먹는 일에 탐닉하고 있었다.
뼈다귀의 겉에 붙어있는 살은 비교적 우아하게 뜯어 먹었고, 뼈와 뼈 사이의 살코기도 요리조리 돌아가며 조심스럽게 떼어 먹었고, 뼛구멍 속에 들어있는 살점마저도 쪽쪽 빨아먹는 등 열심히열심히 먹고 있었다.
맞은편이 주방이었는데, 거기엔 주방 아줌마 두 명이 있었다. 그 아줌마들이 흘끔흘끔 내 감자탕 먹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아니, 그 아줌마들만이 아니었다. 예의 그 ‘아가씨’도, 그리고 그 어린 아들도 내 감자탕 먹는 모습을 관상(觀賞)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옆자리, 뒷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던 서너 명의 지긋한 나이의 사내들과 가난한 연인들로 보이는 젊은 남녀도 내 감자탕 먹는 모습에 눈이 꽂혀 있었다.
감자탕집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오로지 내게로 쏠려 있었다. 쐬주 한 병으로 알딸딸해진 나는 그만 그 모든 시선들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누구 함께 감자탕 먹어줄 사람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