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③ 表訓大師
경북 인물열전③
표훈대사(表訓大師)[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州府 佛宇 佛國寺條]
이 웅 재
경북 인물열전② ‘김대성’에서 불국사를 창건한 후 표훈을 청하여 머물게 했다는 이야기를 썼는데, 표훈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나온다. 유사 권2 기이(紀異) 제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를 보자.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의 옥경(玉莖)은 ‘長八(寸)’이었다. 한마디로 물건이 너무 길었다. 그런데 첫 부인 사량부인(沙梁夫人)과의 사이엔 무자(無子)였다. 평민들에게서도 무후(無後)는 불효 중 첫째인데, 더욱이 왕손을 잇지 못하다니 문제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만월부인(滿月夫人)을 후비로 맞아들였다.
일반인의 경우라도 다른 부분이 아닌 성기(性器)의 길이나 생김새 등을 알기가 힘들겠거늘, 지존의 옥경의 길이를 어찌 알아서 기록에까지 남겼을까? 더구나 거기에 이어지는 기사가 ‘무자(無子)’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성징(性徵)의 불구성을 말함은 아닐까? 나중에 태자를 얻게 되는 것도 표훈대사(表訓大師)에 의해 천제가 점지해 준 것으로 얘기되는 것은 그러한 심증을 굳히게끔 만들어 준다.
하루는 경덕왕이 표훈을 불러서, 하늘에 올라가 상제(上帝)께 아들 하나를 점지해 달라고 로비 좀 하고 오라고 했다. 표훈이 천제께 올라가 그 말을 전했다.
“경덕왕이요, 아들 하나만 점지해 달라는데요.”
상제가 받았다.
“딸은 가하나 아들은 안 돼.”
왕이 그 말을 전해 듣고 말했다.
“오, 노! 안 돼! 아들이라야 한다는 걸 대사도 잘 알잖소? 미안하지만 다시 올라가 아들로 바꾸어 오시오!”
마지못해 표훈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서 천제께 아뢰었다.
“경덕왕이요, 딸은 싫대요. 꼭 아들로 바꿔 오랬어요.”
천제가 말했다.
“그렇게 할 수는 있으나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하리라.”
그러면서 “대사가 하늘과 땅 사이를 이웃 드나들 듯 하면서 천기(天機)를 누설하니 금후에는 하늘나라의 출입을 금하노라.”고 엄명했다.
표훈이 왕께 내려와 고하니, 왕이 말했다.
“나라가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이으면 족하겠다.”
그리하여 낳은 아이가 뒤의 혜공왕(惠恭王)이다. 혜공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날로부터 8세에 왕위에 오를 때까지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는 등 항상 부녀자가 하는 짓만 골라서 했다. 그러므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각처에서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루 막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유사 혜공왕조를 보면, 좀더 구체적인 기사들이 많이 보이지만 여기서는 줄인다. 마침내 왕은 선덕(宣德)과 김양상(金良相: 김양상이 바로 선덕왕이므로 金敬信의 잘못으로 보임)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덕왕이 그토록 왕권의 세습적 유지에 힘을 썼는데도 신라 중대(中代)는 종말을 보게 되고 하대(下代)의 선덕왕이 왕권을 이어받게 되는 것이지만, 신라의 왕권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이웅재. 鄕歌에 나타난 庶民意識. 白文社. ’90. p.241 참조)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이 나라를 들어 왕건(王建)에게 갖다 바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본다면 허울뿐인 나라, 왕권의 힘이 미치는 곳은 경주 정도밖에 안 되었기에 오히려 그곳을 다시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니, 자신의 영토에 대해서는 왕건의 고려(高麗)가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라고 보이는 것이다.
산 채로 하늘나라엘 오르락내리락했던 사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표훈이 유일하다. 예수도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에는 하늘나라엔 들락날락한 적이 없었다. 구약의 에녹이 있기는 하지만, 그 경우도 산 채로 하늘나라로 올라간 것으로 끝이었다. 오직 표훈만이 ‘오르락내리락’ 했었는데, 그만 경덕왕 때문에 그 통로가 막혀 버렸으니, 오호, 통재, 통재로다!
내금강 만폭동 어귀 표훈동 계곡에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0년(670)에 표훈선사가 창건했다는 표훈사가 있는데, 금강산 4대 사찰(楡岾寺, 長安寺, 神溪寺와 함께) 중의 하나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원래 20여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대찰이었는데, 한국전쟁 때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표훈이 창건했다는 말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째서 표훈사란 사찰명이 붙게 되었는지 좀더 천착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06. 3. 29. 원고지 13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