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심재일
내 친구 심재일
이 웅 재
“어이 오랜만이야!”
식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에야 결혼식장에 도착해서 부조금은 내는 둥 마는 둥하고 식당으로 직행했더니, 어디선가 나를 부른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당연히 이름이 가물가물한다.
“나, 재일이야!”
아, 심재일, K중고 출신, Y대 동기동창인 그는 머리 전체가 하얗다. 이모지년(二毛之年)도 아니면서 부분적 흑백으로 염색을 해야만 하는 나에겐 저런 머리가 부럽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던 K회장을 닮았는데, 아하, 이 친구는 한때 그의 휘하에서 잘 나가던 때도 있었단다.
허겁지겁 ‘일반에게 널리 공포하는’이라는 ‘피로(披露)’의 뜻에 맞추어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면서 반주 한 잔씩을 했을 뿐인데, 식당에서는 다음 번 손님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달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해온다.
제길헐, 반주 몇 잔 때문에 어정쩡하게 취한 우리는 계속 ‘주(酒)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식장 앞쪽의 HOF집을 찾았다. 도저히 처녀 같아 보이지 않는 자칭 늙은 처녀 마담은 말솜씨 하나로 술맛나게 하주물(下酒物 ; 안주)을 대신했고, 우리는 40여 년 전, 대학생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림 하나
3월부터 시작되는 신학기 채플 시간은 모든 학생들의 기피 시간이었다. 냉장고로 정평이 나 있는 대강당이 채플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감내하기란 보통의 인내심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빠질 수 없는 시간인 것은 그 시간에 출석 미달을 하게 되면 학점이 펑크 나는 것은 물론, 졸업마저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 친구 심재일은 다른 시간에도 주로 그랬지만, 채플 시간만 되면 도대체 그 코빼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학기말이 되자 영예로운(?) 교목실 호출을 받을 수밖에.
“자네, 일 년을 꿇을 텐가, 아니면 다른 대학의 채플 시간에까지 출석해서 미달된 출석 시간을 메우겠는가?”
백리언 교수였다든가? 양주동 교수도 옆에 계셨다지, 아마.
설왕설래. 내 친구 심재일은 교목실에서 쫓겨나면서 최후의 진술(?)을 했단다.
“여기 계신 교수님들, 교수님들도 기독교를 처음 믿게 될 때, 그 신심(信心)을 강요당하셨습니까?”
케세라 세라,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잠깐!”
하는 소리가 등허리에 와서 꽂혔단다.
내 친구 심재일이 어정쩡한 모습으로 멈춰 섰는데,
“이 친구에게 리포트를 제출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교수가 제안했고, 양교수가 동의했단다. 그래서 채플 시간 출석 미달이 리포트로 대치될 수 있는 전례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그림 두울
요즈음 대학생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일 것이다. 미션 스쿨인 Y대에서는 당시 교정에서 담배를 피우다간 재수가 없으면 교수에게 얻어터지기도 했었다. 특히 문상희 교수에게 걸렸다간 여축이 없었다.
그런데 내 친구 심재일은 제대 후 문과대학 앞 잔디밭에 여유롭게 드러누워서 저 푸른 창공을 향하여 상사초(相思草) 특유의 푸른 연기를 마음껏 날려 보냈더란다.
거의 1Km쯤 되는 도서관 앞쪽에서 그 푸르스름한 빛깔을 포착한 문교수, 잽싸게 문과대쪽으로 질주해 왔는데, 정작 내 친구 심재일은 무사태평이었다. 하지만 그 무사태평은 순간적으로 목불인견의 폭력 장면(?)으로 바뀌었다.
“교내에서 감히 담배를 피워?”
분노에 찬 목소리와 함께 요즈음의 격투기장을 방불케 하는 주먹질, 발길질이 난무했다. 느닷없이 얻어터지던 내 친구 심재일, 그 우람한 팔뚝으로 문교수를 얼싸안고 느릿느릿 한 마디 왈,
“대학교 입시요강에 담배 피우면 안 된다는 말 있었습니까?”
문교수, 순진하게,
“없었지.”
내 친구, 다시 가로대,
“그렇담 하다못해 따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장소라도 마련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 한 마디에 문교수의 폭력은 중지되었고, Y대에는 담배를 피워도 될 수 있는 휴게실이 처음으로 생겨나게 되었단다.
어이, 잘 가게, 친구. 주(酒)님을 충분히 경배한 뒤 우리는 그렇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