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구멍에 바람 쐬기
콧구멍에 바람 쐬기
이 웅 재
예정된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특실에는 아직 몇 자리 공석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행사는 시작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조금 후, 그 빈자리도 다 채워졌다. 그리고 곧 좌석이 모자라서 특실 바깥쪽의 홀에까지 하객들이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쯤 되자 사회자도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는지 마이크를 잡고 한 마디 안내방송을 한다.
“죄송합니다. 주인공이 갑자기 주무시는 바람에 공식적 행사를 잠시 유보하겠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어떤 행사에서 그처럼 무례한 주인공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하객들은 의외로 담담하다. 그들은 뷔페를 즐기기에 바쁜 듯하다.
“떡이 맛있는데….”
“초밥이 더 맛깔스럽지.”
“무슨 소리? 도가니탕이 일품이더구먼.”
“에이, 전복죽을 먹어 봐. 끝내준다니까.”
먹는 일은 항상 즐거운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왁자지껄 먹는 얘기로 식장이 무르익는다.
“주인공이 계속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수도 있다는데….”
“그럼 식은 어떻게 되구?”
“뭐 그냥 하객들끼리 먹고 마시고 떠들고…, 그리고 끝이지.”
그럴 수야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아내를 다그쳤다. 가서 깨우라고. 아내가 본부석(?)으로 가서 깨우니, 아, 드디어 주인공이 잠에서 떨쳐 일어났다. 이런 경우 보통은 약간의 부작용이 일어나서 한 동안은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게 마련인데, 그런 기우를 말끔히 씻어주는 명쾌한 기상(起床)이었다.
“자아-! 이제 임서영 양의 첫돌 잔치를 시작하겠습니다~!”
하객들이 박수를 친다. 그런데 먹는 일에서 갑자기 벗어나기가 힘들어서였을까? 박수소리가 약하다.
“아유, 저기 세 분만 박수를 치고 있네요. 박수 안 치는 분들은 홀(hall)로 모실까요?”
사회자의 엄포가 떨어지자 너도 나도 박수치기에 동참한다. 그래도 사회자자는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다.
“저~기 보세요. 소화기도 비치되어 있는 것 보이시죠?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박수 좀 쳐 보세요.”
드디어 박수소리가 장내를 진동한다. 나도 이제 조마조마하던 마음에서 벗어나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메뉴판을 본딴 입체 삼각대의 안내판을 보았다. 한 쪽은 ‘LOVELY LIMSEOYOUNG’이란 영문자가 새겨진 하트 모양의 그림, 그 아래 약간 놀란 듯한 모습의 서영이 사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어린아이의 눈망울처럼 초롱초롱한 것이 또 있을까? 저 순진함, 저 티 없음. 가장 원초적인 순수가 거기 있었다. 다른 한 쪽은 ‘서영이의 돌잔치 백 배 즐기기’가 있었다.
먼저 ‘사진 갤러리.’ 그 위쪽의 서영이 사진은 타원형 속에서 깜찍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돌잡이 이벤트.’ 돌잔치 때 주인공이 무엇을 잡는지, 예상되는 물건 이름을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응모판에 부착된 컵에 넣어주면, 나중 추첨을 통해서 깜짝 선물을 준다고 씌어 있었다.
그 아래로는 ‘덕담 한 말씀.’ 아울러서 역시 입구 안쪽에 5가지 종류의 서영이 사진이 박혀 있는 우편엽서와 사인펜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 덕담을 부탁한다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그림은 모자가 달린 잠옷 바람의 서영이, 태권도라도 하는 듯한 모습의 서영이가 아주, 아주 귀엽게 웃고 있는 엽서였다.
“사진처럼 귀엽고 밝게, 그리고 건강하게 자라 주세요!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써서 빨간, 집 모양의 우체통에 넣어 주었는데, 그 말만 가지고는 뭔가 미진한 느낌이 들었다. 저 티 없는 모습을 보면서 쓸 수 있는 말이 고작 그것뿐인지? 언어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아님, 내 센스가 부족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나는 서영이의 저 꾸밈없는 모습에 걸맞은 덕담을 찾을 길이 없었다.
나머지 한 면에는 ‘서영이는 어떤 아기일까요?’란 제목이 씌어 있고, 여러 가지 서영이에 대한 정보(생년월일, 탄생 시 체중 및 신장, 현재의 체중 및 신장, 혈액형, 성격 등)가 적혀 있었고, ‘좋아하는 것:…콧구멍에 바람 쐬기’ 가 있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더니, 괄호 속에 ‘외출’이라는 두 글자가 부끄러운 듯 숨은 채 해명해 주고 있었다.
그 아래쪽으로는 ‘개인기’가 적혀 있었다. 그 첫째가 ‘캬~~하기(물 마시고)’, 둘째가 ‘입으로 물방울 만들기(당신들은 할 수 있어요?)’, 셋째가 ‘손수건 돌리기’였는데, 이 손수건 돌리기는 서영이의 일상적 습성을 아는 사람만이 그 심오한 의미를 깨우칠 수 있는 개인기였다. 서영이는 손수건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래서 항상 손수건을 손에 들고 있거나 입에 물고 있는데, 심심하면 그것을 뱅뱅 돌리는 것이었다.
그 아래쪽의 취미를 보자. 거기엔 예상 밖의 ‘책읽기’도 있었다. 역시 괄호 속의 짤막한 설명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뒷면부터 보기’였다. 그러니까 모든 글은 결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십분 이해하고 끝부분의 결론부터 보고, 대충 타당하다 싶으면 그 앞부분의 귀납과정을 따져 본다는 얘기일 터이니, 독서술 치고는 매우 고차적이고 세련된 독서법이 아닐까 싶어서, 나는 특히 그 부분에서 새삼스레 동감한다는 뜻의 고개 주억거림을 몇 번이나 반복했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집사람이 툭! 친다.
“여보, 졸지 말아요!”
난 억울했다. 난 결코 졸지 않았다. 외손녀의 그 취미생활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고개를 주억거렸을 뿐이다.
다음은 ‘잠버릇.’ 내 잠버릇이 아니고, 우리 서영이의 잠버릇 말이다. ‘손수건 쥐고 엄지손가락 빨며 머리 긁기.’역시 취미가 ‘책읽기’인 분의 잠버릇은 범상한 사람들의 그것과는 무척 달랐다.
아가야, 부디 잘 자라거라. 오늘의 콧구멍에 바람 쐬기는 즐거웠는지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