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 줄 세우기 1
낱말 줄 세우기 1
이 웅 재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곳저곳 결혼식장을 쫓아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모처럼의 길일(吉日)이었나? 하긴 국경일이라든가 국정기념일 같은 날은 택일(擇日) 자체가 필요 없는 좋은 날일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 게다가 음력으로는 지난달이 윤이월(潤二月)이라서 이번 달로 결혼식이 몰렸나 보다. 덕분에 점심은 센트럴 시티 웨딩홀에서, 저녁은 마지막 스케줄에 해당하는 코리아나호텔에서 먹는 둥 식사시간에서만은 하루 종일 호사(豪奢)를 했다. 그러나 저녁녘에는 비가 내리겠다는 일기 예보 덕분에, 흐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멀쩡한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아침나절부터 우산까지 챙겨들고 다니느라, 체면은 완전히 구겨져 버린데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든가, 마침 서울시청 앞에서는 ‘2004 Hi Seoul Festival RED(Refreshing Exiting Dynamic)’가 시작되고 있어, 내친 김에 구경 좀 하고 가자는 한 친구의 제의에 우르르 몰려갔다.
광장으로 가는 인도의 양옆으로는, 대학 축제 때와 유사하게 서로 어슷비슷한 온갖 음식을 파는 텐트들이 죽 몰려 있었다. 그 주류(主流)는 주류(酒類). 몰려드는 인파를 맞아 ‘태극전사 서포터즈’, ‘5월 22일 대개봉 클레멘타인’ 등의 글씨가 씌어진 쓰레기 수거용 비닐을 나누어주는 사람, 이동식 사무실을 차려놓고 십여 종이 넘는 서울시 교통카드 샘플을 게시한 채 그 중 어느 것이 좋은지 선택하도록 만드는 사람 등 시청 앞 잔디광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시끄러운 전자음악 소리, Festival을 주관하는 사람들의 안내 및 해설 방송, 각종 공연 실황을 중계하여 비춰 보여주는 대형화면의 번쩍이는 불빛,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요소요소마다 배치되어 있는 경찰들…. 서울시청이 들썩들썩하고 덕수궁이 흔들리는 듯싶었다. 그러지 않아도 피곤했던 몸이 갑자기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 무거워지는 느낌이어서, 일찍 집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일요일인 이튿날, 전날 바빠서 미처 보지 못했던 신문을 뒤척거리다가 허남진 씨가 소개하는 외나무다리의 염소 싸움 우화에 이르렀다.
“외나무다리에서 서로 먼저 건너겠다고 뻗대다 개골창에 떨어져 함께 파멸하는…”, 읽어 내려가던 눈이 하나의 단어에 고정되어 버린다. ‘개골창, 개골창’, 오래간 만에 대하는 낱말이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표준어는 ‘개굴창’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모처럼 국어대사전을 찾아보았다. 결과는‘개굴창’은 방언, 그래서 다시 ‘개골창’을 찾았더니, ‘수챗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이라 설명되어 있었다. 또한 ‘도랑’은 ‘매우 좁고 작은 개울’이었다. 그렇다면, ‘개울〉도랑〉개골창’으로 그 크기가 결정되는 셈이었다.
이번에는 ‘개울’로 방향을 틀었더니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란다. 일단 거기서 비슷한 낱말들과의 연결은 차단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설명을 보는 순간, ‘내’나 ‘시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먼저 ‘내’를 찾으니, ‘시내보다 크고 강보다는 작은 물줄기’였다. 아하, ‘내’와 ‘시내’는 다른 것이로구나. 그럼 ‘시내’는? ‘산골짜기나 평지에서 흐르는 그리 크지 아니한 내’, 그리고 ‘강(江)’은 ‘넓고 길게 흐르는 내’였다. 그래서 ‘강(江)〉내〉시내’의 서열이 정해졌다.
“개천에서 용 난다.”의 ‘개천’은? ‘개천(開川);①개골창 물이 흘러 나가도록 판 긴 내. 굴강(掘江). ② ☞내.’ ①은 인공적인 것이니 논외로 치고, ②의 ‘☞’ 표시는 비표준어 표시로 표준말 앞에 붙이는 것이라는 기호 설명으로 보아 ‘개천’은 비표준어이고 그 표준어는 ‘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제 앞의 ‘개울〉도랑〉개골창’과 ‘강(江)〉내〉시내’를 ‘앞으로 나란히’ 줄 세우기를 시켜 보면, 그것은 ‘강’의 존재로 하여, 자연히 ‘강’이 들어있는 어휘의 무리가 ‘개울’이란 단어들의 모임보다는 큰 쪽이 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결국 ‘강(江)〉내〉시내 〉개울〉도랑〉개골창’의 순으로 그 크기가 정해지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의 신세를 졌더니, ‘江’은 ‘큰내강(川之大者)’으로 ‘강〉내’의 관계가 증명되었고, ‘내’는 한자로 ‘川’임도 확인되었다. 이에 중국의 북쪽에서는 ‘하(河)’, 남쪽에서는 ‘강(江)’이라 한다는 ‘황하(黃河)․양자강(楊子江)’과 관련된 말을 확인하기 위해 ‘河’를 찾아보았더니, ‘황하수하(四江之一)’로 되어 있어 ‘江=河’임이 증명되었고, ‘내하(大川)’이라는 풀이도 있어 역시 ‘내’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大川’이라는 것에서 ‘江’의 ‘큰내강(川之大者)’과 동일하게 볼 수 있는 근거도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물보다도 더욱 큰 것, 그것은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바다’일 것임은 자명한 일. 그래도, 대한한사전에서 ‘海’를 확인해 보았더니, ‘바다해(百川朝宗)’라는 설명과 함께 서경(書經)에서는 ‘江漢祖宗于海’라 한다는 풀이가 나와 있었다.
‘朝宗’을 국어대사전에서는 ‘①[朝는 봄에, 宗은 여름에 천자께 알현(謁見)한다는 뜻]으로 옛날 중국에서, 제후(諸侯)가 봄과 여름에 천자(天子)께 뵘 ②강하(江河)가 바다로 흐름의 비유’라 하여 ‘百川’ 대신 ‘江河’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祖宗’은 ‘군주(君主)의 조상’이라 했으니, 이 역시 강한(江漢) 곧 양자강(楊子江)과 한수(漢水)가 바다로 흘러듦을 말한 것이라 보여지는 것이다.
어찌했든 2004년의 어버이날 다음날은 ‘바다(海)〉강(江)=하(河)〉내(川)〉시내 〉개울〉도랑〉개골창’이라는 낱말 줄 세우기를 성공적(?)으로 행하였다고나 할까? 조금은 골치 아픈 일이기는 했지만, 평소 긴가민가했던 점을 분명하게 가닥을 잡아놓았다 할 수 있으니, 나름대로 의의가 있었던 날은 아니었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