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성장(成長) [단편소설]
(단편소설)
아픈 성장(成長)
이 웅 재
사실 난 왜 그렇게 전쟁을 즐거워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전혀 내 탓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어떤 누구의 탓이라고 돌릴 수도 없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이었다. 따진다면 나는 그때 전쟁을 알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1940몇 년, 나는 철원군 철원면 관우리라는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동네는 아담한 샘통[泉通]이었다. 그러니까 읍내에서 약 20리쯤인가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어렸을 적의 고향이란 누구에게든지 꿈의 고장이라고 한다면 달리 할 말이 없겠지만, 샘통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었다. 샘통이란 이름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곳은 특별히 샘물이 좋았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그곳의 샘물은 마르는 적이 없었고, 동네 어느 곳이나 조금만 파면 시원스럽고 맑은, 그리고 또 깨끗한 샘[泉]이 줄줄 솟아나는 고장이었다. 물 좋은 곳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동네 주위에는 각종의 커다란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있었는데, 그 나무들은 대개 돌각담(돌무더기)으로 이루어진 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곳곳마다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 가운데로는 소달구지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이 주욱 뻗어 있었다. 그 길은 동네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리저리 가지를 펼쳐 집집마다 연결되어 있었다. 길을 따라가면 어디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름들이었지만, 그 당시의 내게는 그처럼 다정할 수 있을까 싶은 꼬마 친구들의 집이 숨바꼭질하듯 나타나기 때문에, 나는 그 길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때로는 근처 산에서 멧돼지가 내려왔다가 흰 눈 위에 그 발자국을 어지럽게 찍어놓아서, 그 죄로 이웃 동네에 산다는 사냥꾼이 찾아와 조용한 동네를 총성으로 울려 놓는 바람에, 젊은 청년들을 흥분시켜 모두들 몽둥이를 들고 나와 야업! 야업! 하는 소리로 멧돼지 사냥에 합류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는 마을이었다.
약 50호쯤 들어섰을까 하는 그 마을엔 인민학교 분교가 하나 있었고, 거의 모든 동민들이 농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는데, 그러한 평화스러운 조그만 촌에서 자란 내가 어떻게 그렇게 전쟁을 즐거워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적지 않은 의문이 맴돌고 있다. 야수를 잡는 총소리에 매료되어서였을까? 아니면 꿈 많은 어린 시절이라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기쁘게만 여겨졌던 때문이었을까?
동네 인민학교에는 2학년까지밖에 없었다. 3학년부터 졸업반인 5학년까지는 읍내 쪽으로 한 10리쯤 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2학년 때까지의 기억은 너무 어렸을 때라서인지 기억에 별로 없고, 3학년부터의 생활이 내겐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처음 3학년이 되어서 새 학교로 편입해야 되었을 때, 난 설레는 마음으로 무척 들떠 있었다. 분교에서 본교로 가는 것이니까 특별히 편입이랄 것까지야 못 되었을 테지만, 나로서는 어쨌든 새로운 학교와 낯선 동무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는 즐거움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었다. 분교에서의 성적이 비교적 뛰어났었던 관계로 3학년으로 편입되자마자 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나 같은 소심한 학생이 어떻게 그러한 대표자 역할을 해 내었을까 신통하기만 했던 기억이다.
그 당시 북한에 속해 있던 그곳은 전쟁 준비에 바빠 있었다. 그건 우리 인민학교 학생들에게까지 학생위원장이란 게 있어서, 왼쪽 팔에는 완장을 차고 상의 왼쪽 주머니 위쪽에는 빨간 줄 3개를 달고서 군대식의 구령을 부르면, 모든 학생들이 절대 복종하던 것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그 다음 총무 급은 파란 줄 2개 반, 각부의 부장급은 빨간 줄 2개 반이었고, 각 반 반장은 빨간 줄 2개, 학급의 총무 급은 파란 줄 1개 반, 그리고 학급의 부장급은 빨간 줄 1개 반씩이었던가?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그러한 계급주의에 얽힌 생활을 나는 무척 규칙적이고 훌륭한 학생 간부들의 조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계급 속에는 인민위원회의 스파이라 부를 수 있는 학생들이 군데군데 끼여 있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들은 그런 것까지도 드릴이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철이 없어서였을까?
어린애들은 전쟁놀이를 좋아한다. 비단 전쟁놀이뿐이랴? 그들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낯선 것이고, 신기한 것이고,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다. 그 누가 어린이들을 탓할 수 있으랴?
아진, 드바, 드리…(하나, 둘, 셋…)의 소련어를 5학년에선가 배우고 있었고, 때문에 졸업반 학생들을 부러워하여 이따금 그들이 하는 외국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가 같은 또래의 동무들 사이에서 써먹게 되면 일약 유명해지는 그런 우월감을 가지기 시작할 때, 어쩌자고 난 그 우월감과 소심증을 함께 지니고 있었던지 모르겠다. 하여간 난 그래도 그 빨간 줄을 두 갠가를 얻어 찼고, 또 가끔은 아진, 드바, 드리…도 말할 수 있어서 누구에게나 상급자로서의 계급을 유지할 수가 있었고, 덕분에 소심증과 우월감의 상반된 감정 속에서 수없는 번민을 해야만 되었다. 유별나게 긴 운동장 조회 시간엔 맨 앞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고통은 참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 빨간 줄의 체면과 아진, 드바, 드리…의 체통을 지키느라 무척이나 진땀을 빼야만 했다.
때로 오줌이라도 마려운 날에는 정말로 난감했었다.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이 어린 위인은 때때로 실신 직전의 상태에까지 돌입했다가 끝남의 신호가 나자마자 ‘뒤로 돌앗!’ 구령을 목청껏 내뱉고는, 대열이 잘 정돈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쪽 저쪽으로 뛰어다니며 그 나약한 발길질을 하면서 오줌을 참아야 했고, 그럼으로써 약간 나아진 급수 저장상태를 유지하고서야 다시 ‘교실 입실!’의 구령을 악을 써서 뱉어내고는 부리나케 변소를 향하여 달렸던 것이 몇 번인지도 모른다.
그 해 가을엔 처음으로 학교 근처에 진짜 쏼라쏼라 하는 로스케(소련) 군인들이 진을 치기 시작했다. 인근 산마다 장갑차가 나타나서 굴을 파기 시작했고, 어른들은 농우(農牛)가 줄어든다고 수근대고들 있었다. 그들은 매일같이 쇠고기로 보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깊숙한 굴속에서 포식을 하고 있는 군인들을 볼 때면 나는 그들이 무척이나 신기해 보였고 한편 부러웠다.
한 번은 방과 후, 동무들과 함께 하교하다가 학교 앞쪽 들판에 소련제(蘇聯製) 트럭들이 서너 대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마악 알밤을 주우려 가려고 나섰던 참이었다. 그쪽 야산엔 해묵은 밤나무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그 밑엔 얼마큼의 알밤들이 풀숲에 떨어져 있을 터였다. 그런데 바로 그쪽으로 가는 길목에 로스케 군인들이 차를 세워놓고 서로 무어라 지껄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희멀건 피부하며 거대한 체구, 게다가 털이 부숭부숭 나 있는 손이며 노오란 눈빛과 금빛 머리―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고픈 궁금증이 무럭무럭 피어올랐지만, 한편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지껄이는 그들이 혹시라도 엉큼한 생각을 가지고 붙잡아 가지나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해서 가까이 다가가기가 꺼려지고 있었다.
“어쩔래?”
한 계집애가 말했다. 계집앤 영아였다. 겁난다는 투였다. 계집애의 귀엽게 생긴 모습이,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들이 보면 덥석 집어 올려(‘안아 올려’라고 해야겠지만, 그땐 꼭 그 ‘집어 올린다’는 말이 적당하다고 생각되었다) 그 텁수룩하게 자란 수염이 달린 입으로 뽀뽀라도 해댈 것만 같았고, 왜 그런지 난 그때 그 계집애가 그들에게 뽀뽀를 당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또 한 가지, 그들의 노란 눈과 빨간 머리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그대로 그들의 입에서도 노린내가 심하게 날 것 같았고, 만일 그와 함께 뽀뽀를 한다면 그 노린내가 며칠 동안은 계속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 저절로 몸서리가 쳐지기까지 했었다.
“어쩌긴?”
그러면서도 난 나 자신의 ‘위대함’을 잃지 않으려고 내가 생각해도 아주 어정쩡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알밤 주우려 가려느냐 말야….”
옆에서 윤이가 거들었다.
“그래, 가려느냐 말야….”
철수도 한 마디 했다. 그 놈은 언제나 내 꼬붕이었는데, 그때만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참으로 난처해지고 있었다. 그때, 이국인들이 우리를 쳐다보았고, 그리고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더 난처한 입장이 되는 수밖에 없었는데, 다시 노랭이들은 우리를 손짓해 부르는 것이었다.
“어쩔래?”
계집앤 사뭇 날 붙들고 흔들며 졸라댔다. 나는 무어라고 답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좀더 침착함을 보이기 위하여 가만있어 보라는 신호로 손을 내젓고 있었다.
‘광재야!’
윤이가 내 대답을 재촉하는 투로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우리, 가자!”
철수였다. 그때까지도 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로스케 군인들은 다시 커다란 손을 흔들어 오라고 손짓했다.
“빨리!”
윤이가 다그쳤다.
“난, 무섭다!”
영아.
군인 하나가 갑자기 트럭 안으로 뛰어 올랐다.
“뛰자!”
철수는 "우리, 가자!"고 하던 때와는 달리 벌써 고무신을 벗어 두 손에 한 짝씩 갈라 쥐고 있었다. 어깨에서 가슴 쪽으로 질끈 동여맨 책보 속에선 달랑달랑 필통소리가 시끄러웠다. 군인은 트럭 속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내려오더니 그걸 우리에게 보이며 자꾸 오라는 시늉이었다. 그걸 우리에게 주겠다는 뜻인 듯했다.
“윤이야! 너희들 여기서 기다려라. 내 갔다 올게!”
모두들 나를 쳐다봤다. 난 약간 으쓱해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괜찮겠니?”
영아가 걱정해 줬다.
“까짓 것.”
난 그들의 걱정을 싹 뭉개버렸다. 마음 속에서는 소심증이 자꾸 싹터 오르고 있었지만, 한편 으쓱하고픈 마음이 가만히 나를 충동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마음 속 우월감을 썩 대견해 했고, 반대로 소심증을 지독하게 미워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자꾸 손짓했다. 무언가를 입으로 질겅질겅 씹으면서.
“너희들, 가지 말고 기다려야 돼!”
전부 도망가고 나 혼자만 남는다면 정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난 그렇게 다짐을 하였다.
“조쏘(좋소)!”
셋이 합창을 하였다. 우린 그 ‘조쏘’라는 말을 곧잘 쓰고 있었다. 조선과 쏘련이라는 뜻으로 어른들이 종종 쓰는 말이었던 것이다.
난 용감한 체 군인들에게로 걸어갔다. 차츰 가슴이 두근거려 왔지만, 뒤에서 보고 있을 세 명을 생각하니 뒤도 돌아볼 수가 없었다. 내친걸음에 할 수 없이 군인들 쪽으로 가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얼마나 후회를 했던지….
다행히 로스케들은 친절했다. 가까이서 본 그들의 얼굴은 더욱 신기하고 괴상한 모습이었다. 숭글숭글한 얼굴은 정이 뚝 떨어졌지만, 궁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동무들을 생각하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도를 의젓이 꾸며야만 했다. 이국의 군인들이 내어놓은 것은 그때 처음으로 보는 빵이었다. 꼭 지금의 식빵과 같은 속없는 빵이었다.
“드리 따와이!”
난 세 개를 더 달라고 했다. 인원수대로 달라는 뜻이었을 뿐 아니라, 사실 난 그때 ‘드리’ 이상의 숫자는 말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대견하다는 듯 킬킬거리고 웃으며 내가 요구하는 숫자대로 빵을 내주었다.
“재야!”
저쪽에서 우리 꼬마들의 환성이 들려왔다. 난 얼떨떨해 있던 참이라 그 환성이 무얼 의미하는질 몰라 엉겁결에 그 네 덩이의 식빵을 들고는 쏜살같이 도망질을 쳤다. 군인들은 소리높이 웃어제꼈고, 그 웃음소리가 높아짐을 따라 나의 달음박질은 더욱 빨라졌다. 꼭 뒤에서 목덜미라도 잡아 낚아채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느새 나는 나의 세 동무들에게 와 있었다.
“그거 뭐니?”
영아가 궁금한 듯 물었다.
“이거, 빵이다.”
그제야 내겐 그 멍청함이 쑥스러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내 가슴은 아직 콩방아를 찧고 있었지만, 난 빨간 줄을 찰 수 있는 상위 계급자라는 걸 의식하면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자, 하나씩 노나 먹자!”
어느 샌가 나는 공산주의식 이론을 적용시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못마땅한 생각이 들었다. 기실 나는 혼자 다 가지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 혼자의 노력으로 얻어온 것이기도 했고, 집에 가지고 가면 커다란 자랑거리가 될 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벌써 분배의 선언은 내려진 후였고, 그 말로 인해서 나는 영웅이 되어 가는 것이었고, 그 우쭐함에서 하나 남은 빵마저도 집에까지 가지고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나, 이거 싸 가지고 갈랜다!”
영아의 그 말을 나는 제지해야 했던 것이다.
“먹어보자, 지놈들 어떤 맛이 있는 건지 알아보잔 말이다.”
난 화라도 난 듯 한 입 우석 베어먹으며 말했다. 철수도 손에 들었던 신발짝을 내려 신고 있었고, 윤이 역시 마지못해 한 입 따라 베어 물었다. 난 군인들을 향해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처음 먹어보는 빵맛이 알밤 맛보다 더욱 좋다고 생각하며, 그 짭짤한 뒷맛을 음미하면서 그 날은 집까지의 십여 리 길을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다. 벌써 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쟁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6월.
어른들은 비밀스러운 낯빛들을 하고 이곳 저곳에서 수군거렸다. 우리들은 잔뜩 호기심에 들떠 있었다. 철수와 윤이, 영아가 나를 찾아왔다.
“전쟁이 났다더라!”
역시 소문은 여자가 빨랐다. 영아가 두려운 듯이 말하고 있었다.
“어디하구?”
철수가 물었다.
“남한하구.”
영아였다.
“정말일까?”
이번엔 윤이가 물었다.
“응.”
모든 내용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른들의 수군거림과 철수, 영아의 말을 종합하여 나름대로의 상황을 파악하여 내린 결론을 말한 것이다. 빨간 줄 두 개짜리의 내 위치는 그렇게 해야 확고해질 터였다.
우리들 사이에서 전쟁은 그렇게 하여 처음으로 얘기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이 어떤 거대한 일을 꾸미기라도 하듯 그 공공연한 소문을 비밀스레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른들 사회에서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나지막한 소리로 비밀을 얘기하는 일이 매일의 일과가 되다시피 하였다. 거기엔 조용한 떨림과 그리고 물결치듯 지나가는 흥분이 우리의 가슴 속을 살짝살짝 건드리고 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학교에서의 기율은 점점 더 엄해져 갔다. 모든 게 완전히 군대식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명령과 명령. 빨간 줄 덕분으로 난 그 명령 속의 사회로 점차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전쟁이 그렇게 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소심한 성격인 난 드러내어 내 계급은 과시하기엔 어색함을 느꼈지만, 내심으로는 가끔 성격이 강한 애들의 부딪쳐옴을 그 엄한 규율 속에 얽매어 놓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정말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싶게 비행기가 뜨기 시작하였다. 부릉부릉! 하는 소리를 내는 비행기가 처음 우리 동네의 상공을 날게 되었을 때는 사람들마다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마당에까지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던 언젠가 읍내에 살고 있는 정애가 우리 동네에 있는 외삼촌네 집으로 놀러왔다. 역시 우리 또래의 계집애였다. 읍내에 사는 푼수로도 정애는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듯 싶었다. 그건 우리보다 더 상위(上位)에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나조차도 정애의 앞에서는 빨간 줄 몇 개의 위세를 부릴 수가 없었다.
우리집 정원에 딸린 딸기밭의 딸기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딸기의 그 감칠맛을 즐기면서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정애야, 넌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니?”
“그것도 몰라? 참 재밌는 거다. 너 왜 학교에서 선생님이 역사 얘기 해줄 때 못 들었니? 온달 장군이라든가 계백 장군이라든가 하는 장군들 얘기…. 전쟁은 그렇게 많은 얘기들을 만들어 내는 거란다.”
정말 정애는 그럴 듯한 말만 골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은 어떻게 하는 거니?”
내가 다시 물었다. 철수와 윤이, 영아는 정애에게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듯해서 할 수 없이 내가 나서야만 했던 것이다.
“에이 바보! 서로 총질하고 죽이고 하는 거야.”
“총질?”
“그래.”
정애는 무언가 깊이 생각을 하고 있는 듯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나도 좀더 생각을 해 보아야겠다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총질, 총질…. 그래, 갑자기 총질을 해대던 하나의 그림이 떠올랐다. 동네 젊은이들과 포수들이 멧돼지를 잡던 때의 기억이었다. 그때 우린 괜히 즐거웠었다. 야, 멧돼지다! 멧돼지!
그리곤 피투성이가 된 멧돼지를 놓고 기뻐 날뛰던 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사람이 죽어도 그때처럼 그렇게 기뻐할 수가 있을까? 글쎄, 당해보질 않아서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애는 전쟁이 재밌는 일이라고 했다. 기쁜 일일지도 몰랐다.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전신에 오싹! 하는 기운이 돌았다. 왜 그럴까? 아무래도 난 마음이 약한 아이인 모양이다. 정애만큼도 용감하지 못한 아이인가 보다.
“우리 동네에서 한 번은 세 사람이 죽었는데 말야!”
정애가 말했다. 인민재판이라고 했다. 내무서원들이 청년 셋을 붙들어 가지고 와서는 반동분자라고 하면서 떠들더라는 것이다. 마을의 여러 사람들은 무조건 ‘조쏘, 조쏘!’를 외쳤다고 한다. 그랬더니 내무서원들은 청년들을 어떤 벽돌집 앞으로 데려가서는 까만 헝겊으로 눈을 가리고는 총을 쏘아 죽이더라는 것이다.
“야― 그거 참 신났겠다!”
나는 큰 소리로 떠벌렸다. 그러나 마음 속은 왠지 개운치가 않았다. 정애는 계집애인데…. 계집애에게 못난둥이란 말을 듣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나도 읍내에서 살았더라면 좋았을 걸…. 난 그게 내가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신나긴? 넌 정말 신나니?”
영아가 물었다. 한 번도 영아의 눈빛이 나를 그렇게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쳐다본 적은 없었다. 난 그 눈빛을 피할 수가 없었다. 참 난처했다.
그때 비행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남쪽에서부터 날아오는 것이었다.
“야! 다섯 대다!”
철수가 소리쳤다.
“아니야! 여섯 대야!”
윤이가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한 대가 따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영아도 비행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비행기, 얼마나 클까? 아마 집채만하겠지?”
난 모두들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길 바라면서 말했다. 그런데 철수와 윤이는 정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아는 아직 시무룩한 채였다.
“아냐! 저 비행긴 이 동네만큼 크단 말이야!”
정애가 말했다.
“정말?”
철수가 물었다.
“그래. 읍내 내무서원들이 그러는데 저 비행기들은 전부 우리나라 꺼구 무지무지하게 큰 것들이랬어. 그래서 국방군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거랬어.”
“그럼 저게 우리 동네에 떨어지문 우린 다 죽게?”
난 화가 나서 말했다. 아무래도 정애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럼, 다 죽구말구….”
정애는 자신 있게 말했다.
“난 그럼 전쟁 같은 거 싫다!”
난 그렇게 말하며 영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난 죽기 싫거든.”
“누군 죽기 좋은가 머.”
정애가 날 보고 말했다.
“근데 왜 총질하구 사람을 죽이는 게 재밌다구 하니?”
“그건 다른 사람들이 죽는 거니까 그렇지 머.”
아무래도 정앤 어거지였다. 그러나 정앤 읍내에 사는 거다. 난 괜히 울화가 치밀었다.
“저 비행기, 떨어지나 보다!”
영아가 말했다. 정말 따로 떨어져 있던 한 대는 마을 가운데로 나 있는 길 저편 쪽으로 자꾸만 낮게 날고 있었다. 지붕 위에서 얼마 떨어져 있는 것 같지가 않아 보였다.
“저 봐! 저게 뭐가 우리 동네만 해?”
“그래뵈두 떨어지문 큰 거라니까.”
아무도 그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어라고 말하고픈 기색들이었다.
“아무래도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을 거야.”
나만 거듭 정애의 말에 반대를 했다. 다른 세 명도 동감하는 눈치였다.
“너, 집에 언제 갈래?”
난 콧날이 오뚝한 정애에게 물었다. 싫었다. 나보다 많이 알고 있는 듯한 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읍내에 산다는 것이 기분 나빴다.
그 날 그 비행기는 우리 윗동네에 떨어지고야 말았다. 이튿날 정애는 읍내로 돌아갔고, 정애를 바래다주고 오는 도중 우리는 동네 어른들에게 그 소식을 들었다. 우린 그 즉시 뛰었다. 사실은 나 혼자서 암말도 않고 뛰었는데 철수와 윤이, 그리고 영아가 나를 따라 뛰기 시작한 것이다. 숨찬 줄도 몰랐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어서 우린 땀투성이가 되었다. 학교에서 과자 따먹기 경주를 할 때에도 이토록 열심히 뛰어본 적은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윗동네에 거의 다 가도록 비행기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천천히 가자.”
드디어 난 여유 있게 말했다.
“여태까지 뵈지 않는 걸 보니, 비행긴 크지 않은 거다.”
동네만큼 크다면 윗동네가 차차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때까지 비행기가 안 보일 리 없는 것이다.
“그래, 정애 기집애 거짓부렁이다.”
영아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가슴속이 후련해졌다. 모두가 정앨 믿지 않을 것이었다. 철수는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래서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힘껏 걷어차면서 말했다.
“되돌아 가자!”
정애의 거짓말은 이제 곧 확인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정애의 말은 어떤 것이든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말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난 나의 그 빨간 줄을 생각해 보았다. 결국 언젠가는 나의 그 빨간 줄의 위세도 정애의 말처럼 무시받게 될 것임이 뻔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내 말에 “조쏘!”라고 응답하는 애가 없었다.
할 수 없었다. 난 비참한 심정으로 마지못해 그들과 함께 비행기가 쑤셔 박혀져 있는 논으로 갔다. 구경꾼들이 빙 둘러선 가운데 앞쪽이 박살이 나고 프로펠러가 떨어져 나간 비행기가 진흙 투성이로 그 몸뚱일 드러내고 있었다. 비행기는 우리집 사랑채의 크기밖에는 되지 않았다.
“비행기가 이 지경이 된 걸 보니, 조종사가 살아난 건 천만 다행이군.”
누군가가 말했다. 조종사는 비행기가 떨어지자마자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도 얼른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더라는 것이다. 기체는 일순간 화염에 쌓였다가 한참 후 꺼졌는데, 조종사는 옆의 논두렁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더라고 했다. 근처에서 농군 하나가 급히 달려가니 갑자기 조종사는 신음소리와 함께 외치더라는 것이다.
“손들엇! 여기가 어디지?”
그는 권총을 꺼내 들고 있더란다.
“철원이오.”
그는 약간 마음을 놓은 듯하다가 다시 물었다고 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오.”
농부가 내놓은 인민증을 보고서야 그는 기진하여 푹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는 아마 여기가 이남인 줄 알았던 모양이라고들 했다. 참으로 독하다 싶었다.
나는 그 날 밤 통 잠이 오질 않아서 혼이 났다. 피투성이의 그 조종사가 계속 나를 권총으로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다가 깨고 자다가 깨고 하다 보니 어느새 먼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이튿날, 학교에 간 나는 공부 시간에도 정신이 없었다. 밤새 밀린 잠이 마구 쏟아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빨리 학교가 파해 주었으면 싶었지만, 시간은 다른 날보다 더욱 긴 것처럼만 느껴질 뿐이었다. 게다가 마지막 종례 시간엔 무슨 조사라는 것까지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 손 들어봐!”
나는 숫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리 나와!”
누군가가 손을 들었고, 손을 들었던 학생 두서너 명쯤이 앞으로 나가는 모양이었다.
“자기는 안 나가지만, 집에서 어머니나 아버지가 다니는 사람도 나와!”
또 대여섯 명의 발자국 소리가 났다. 그러고서야 학교는 끝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예배당에 나가는 것은 반동이라는 것이었다. 김일성 장군이 이끄는 대조선 인민공화국이 조국통일을 할 수 있게 되려면, 우리는 일요일도 없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뭐 여러 가지 얘길 했다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라고 했다. 하여튼 공산주의에서는 하느님 같은 건 필요 없다는 얘기 같더라고 하였다.
나는 가끔 예배당의 뾰족탑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 뾰족탑은 언제나 내게 인상적이었고, 가끔 그 속에서 울려나오는 우렁찬 합창소리에 난 나도 모르게 무언가 엄숙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보았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왜 나쁘다는 것일까? 그러나 내 힘으로는 지금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어쨌든 난 차츰 전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만 어렴풋하게 느껴가고 있었다.
통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떠들어대던 전쟁은 어쩐 심판인지 끝날 줄을 몰랐다. 모두가 우리편 비행기라고 으스대며 뻐기던 정애의 말이 그때까지도 내 귓전에 남아 있는데, 난생 처음 보는 비행기들이 남쪽에서부터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멋지게 생긴 것들이었다. 프로펠러도 없으면서 꽁무니에서 하아얀 연기를 뿜으면서 다가오는 것이었는데, 그 비행기 소리를 듣고 비행기를 찾아볼라치면 어느새 비행기는 저편 쪽까지 달아나 버린 후였다. 그것은 가끔 소리도 없이 머리 위까지 날아와서는 기관총을 냅다 갈기거나 또는 휘발유통을 떨어뜨려 마을을 훨훨 타는 불바다로 만들고 나서야 쌔액―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남기면서 다시 재빠르게 남쪽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맨 처음 우린 그걸 제비 비행기라고 제법 그 맵시에 감탄하면서 불러보기도 했었으나, 쌕쌔기라고 이름을 바꿔 부르면서부터, 소리보다도 더 빠른 그 비행기에 대해 차츰 두려운 감정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학교도 그 쌕쌔기의 폭격으로 불타 버리고 나자, 우린 하릴없이 집에서 놀고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 논다는 것이 무척 즐거웠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린 조금씩 심심해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도가 강해지면서 우린 무지무지하게 심심하다는 생각으로 바뀌어져 갔고, 나중에는 그 무서워 보이는 쌕쌔기라도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쪽으로까지 변해가고 있었다. 쌔액―하는 그 소리가 나는 동안만은 심심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데다가, 그 쌕쌔기가 지나가고 난 후면 수많은 기관총의 탄피들이 들판마다 즐비하게 떨어져 있는 때문이었다. 학교까지 휴교가 되어버린 터수에 놀고 싶기는 했으나 마땅한 놀이터도 없었고 더군다나 장난감이라든가 놀이기구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탄피는 아주 훌륭한 놀잇감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집 광은 나의 장난감 저장소로 탈바꿈해 있었는데, 그곳엔 예의 탄피며, 파편 조각, 때로는 구하기 힘든 조명탄의 그 질기디질긴 나일론 끈, 그리고 각종의 삐라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나의 그 빨간 줄 몇 개의 위세도 한몫을 했다. 말하자면 나는 우리의 그 꼬마 동무들에게서 적당한 양의 공출(供出)을 받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쌕쌔기가 한번 지나가고 나면 우리들은 언제 모이는지 모르게 이곳저곳에서 우루루 몰려들어 제각기 들판으로 달려나가 흩어진 탄피들을 주워 모았고, 그 모은 것들은 전부 우리집 앞마당으로 가져왔다. 나는 그것들을 전부 한데 합쳐 그 날 모였던 아이들의 수대로 공평하게 나눈다. 학교에서 배운 소위 공산주의식 분배를 행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데에는 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영아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아는 아무래도 남자애들보다는 많은 탄피를 주워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출은 반드시 그것들을 모두 나누어 가진 다음에 시행했다. 한꺼번에 많은 수량을 제하는 것보다는 각 아이들에게서 조금씩조금씩 받아내는 것이 훨씬 아이들의 불만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내가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을 무렵, 정말로 전쟁의 참혹함을 실감하게 만들어 주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역시 쌕쌔기의 요란한 폭음이 지나가고 난 후였다. 바로 앞집, 영아네 집에서 마구 울부짖는 통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느 때처럼 몰려나온 우리들은 영아네 집으로 우루루 달려갔다. 영아는 그때 엄마하고 단 둘이 살았었는데, 그 영아의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영아는 미친 듯이 울어대고 있었다. 이리저리 찢겨진 살점들이 방안의 이곳저곳에 검붉은 피와 함께 흩어져 있었다. 비릿한 피냄새가 훅 끼쳐왔다. 속이 메슥메슥해졌다. 도저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야―.”하고 정신 없이 울어대는 영아의 울음소리가 내 귓바퀴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소리는 점차 꺽꺽거리는 소리로 변하여 울음인지 신음인지,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괴상한 소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난 냅다 뛰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이건 도대체 전쟁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던 그러한 전쟁이 아니란 말이야!”
그 이후로 나는 더욱 소심한 아이가 되어갔다. 조금도 즐거운 일이 없었다. 무엇이든 지겹기만 했다. 쌕쌔기의 그 폭음이 울리면, 내 눈앞엔 언제나 그 피투성이의 시체가, 너덜너덜하는 팔다리가 확대되어 오곤 했다. 난 우리집 광 속의 내 모든 재산(?)을 꺼내어 동네 밖에다 내팽개쳐 버렸다. 내 옷에 자랑스럽게 달려 있던 그 빨간 줄 두 개도 뜯기어졌다. 더 이상 동네 애들도 만나지 않기 시작했다. 영아는 고아가 되어 읍내 숙모네 집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영아가 우리 동네를 떠나던 날, 난 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다 미웠다. 죽이고 싶었다.
“영아야! 난 군대 갈란다! 그리고 아무한테나 총질을 해 댈래!”
영안 아무 말 없었다. 영아의 얼굴은 도화 시간에 보았던 석고상 같았다. 핏기 없는 얼굴에 눈만 퀭하니 들어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만 둬!”
그것이 숙모에게 끌려 발길을 돌리던 영아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었다. 그 소리는 아주 작아서 간신히 들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지금까지도 내 귀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소리였다. 나는 줄곧 그 소리를 생각하며 자라났는지도 모른다. 그건 확실히 전쟁을 ‘체험’으로 받아들인 소리였다고 기억이 된다.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던 통일은 여전히 끝날 줄을 몰랐다. 차츰 나는 평상시의 나를 회복해가고 있었다. 내부에는 물론 그 엄청난 충격이 꽉 자리잡고 있었겠지만,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마을엔 언제부터인가 수런수런대는 얘기들이 떠돌았다. 유엔군과 국방군이 반격을 가해 온다는 소리였다. 마을 사람들의 일부분은 벌써부터 설치며 북쪽으로 피난을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다행스럽다는 표정들이었다. 국방군이 들어오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거라는 얘기들도 어쩌다 들려오곤 하였다.
그때 그런 말이 공공연히 떠돌아 다녀도 강제로 피난들을 시키지 못한 이유는 장질부사 때문이었다고 기억된다. 동네 사람 거의 모두가 그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전쟁은 항상 질병을 데리고 다녔다. 사람들은 그것을 옘병이라고 불렀다. 그 병은 처음엔 동네 인민위원장이 읍내에 갑작스런 볼 일로 나갔다가 묻혀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은 삽시간에 온 동네를 휩쓸어 버렸던 것이다. 그 통에 인민위원회에서도 감히 피난을 떠나야 한다는 소릴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온통 옘병으로 수라장이 된 판국에 피난 운운하는 인정머리 없는 얘길 했다가는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지도 모르게 없어져버릴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던 것이다. 시골의 조그만 동네의 소문이란 무척이나 빨리 퍼지게 마련이고, 그와 같이 인심이 흉흉한 때에는 아주 쑥맥같이 순하게만 보이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무섭게 돌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민위원회 측에서도 십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인민위원장 자신이 그 병으로 다 죽게 되어버린 형편이라는 점도 북으로의 피난을 종용할 계제가 못되었던 것이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몇몇 동네 어른들을 사랑에 불러 모으셨다. 아마 국방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거기서 아버지께서는 그 모임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실로 놀랄 만한 발언을 하셨다고 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인민위원장과는 원수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무리 콱 죽어버렸으면 하는 인민위원장이라고 하더라도 그토록 병에 시달리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일단 살려놓고 보자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의사였던 것이다. 의술은 인술이라는데, 어찌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만 있겠느냐고, 살려 놓고 나중에 그의 총부리에 죽어가게 된다 하더라도, 아버지, 당신께서는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발언은 더러 반박도 받았지만, 워낙 조용한 마을의 마음씨 곱던, 인정 속에서만 살아왔던 사람들이라서 허락하기로 되었다고 했다. 그 이면에는 놈들의 발악을 인정으로 메꾸어 나중에라도 북으로 강제 피난을 가지 않고 용케 버티고 있다가 국방군을 맞아들이자는 속셈들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었다.
어쨌든 인민위원장은 완쾌되었고, 어느 날 우리집에 쇠고기 한 근을 사 들고 와서 고맙노라는 인사를 하고는 며칠 후 저 혼자 북으로 떠나고, 우리 동네는 몇 방의 총소리와 함께, 별로 소란하지도 않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국방군을 맞게 되었었다. 동네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아버지 덕택이었다고 아버지에게 치안대의 대장을 하라고 조르기도 했다지만, 아버지께서는 극구 사양하셨단다. 그리고는 학교엘 다닐 수 없게 된 나에게 매일 밤 공부를 가르쳐 주시곤 하였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말씀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지식 쪽보다는 덕(德)과 관련된 쪽의 가르치심이었다는 기억이다. 예컨대,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야 된다는 등의 예화 따위가 주된 것이었다.
영아가 가버린 후, 철수네는 북으로 갔고, 내 짝지는 윤이 하나였다.
마을이 조용해지자 우리는 다시 심심했다. 가을 하늘은 무척 높아서 향긋한 냄새라도 풍기는 듯 다정스레 느껴졌지만, 우린 무엇을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늘 허전했다. 폭격으로 여기저기 시커멓게 타 버리고 만 집채들도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동안 동네에선 모두 다섯 사람이 죽었고, 열 세 가구가 북쪽으로 떠나 버렸다. 한 마디로 마을은 텅 빈 듯한 느낌이었다. 가을의 오후는 가끔 졸음기를 가져왔고, 인민학교의 분교 건물은 반쯤만 타 버린 채여서, 건물을 볼 적마다 매캐한 연기 냄새가 느껴졌다. 우린 시간이 날 때면 늘 그 학교 운동장 한쪽 끝에 가서 앉곤 했다. 거기서 영아의 얘기도 했고, 때로는 북으로 간 철수도 보고싶어 했다.
나에겐 차츰 전쟁은 먼 옛날얘기 속으로 잦아져 버린 느낌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왠지 전쟁이라는 말만 생각하면 공연히 슬퍼만 지는 느낌이었다. 그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윤이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아진, 드바, 드리를 잊어먹었고, 대신 원, 투, 쓰리를 중얼거리게 되었다. 미군들이 동구 밖으로 뻗어 있는 뽀오얀 먼짓길을 따라 탱크를 부르릉거리거나 트럭 하나 가득히 타고서 지나다니게 된 것이다. 처음엔 로스케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 마음에 찌운하게 걸리는 듯하였으나 미군들은 훨씬 친해지기가 쉬웠다. 윤이는 이젠 우리가 전쟁에 끼어도 될 수 있는 나이가 된 모양이라고 말하였지만, 뭐 그럴 정도까지는 되지 못한 것이, 타다 남은 학교 건물에 설치된 치안대에서 하는 일도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던 걸 보아 틀림없었다. 그저 운동회라도 한 번 있어 줬으면 옛날처럼 재미있을 텐데, 하는 소망이 전부였을 정도였다.
우린 깡통차기를 즐겼다. 미군들에게는 ‘할로!’ 소리만 한 번 하면 쨈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고, 그 달콤한 맛에 취하다 보면 한 나절이 훌쩍 지나갔고, 그렇게 이것저것 얻어먹다 보면 배고픈 생각도 별로 없어서, 그저 시간이 나면 빈 깡통을 가지고 오후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오래간만에 우리 동네에 편지가 하나 날아왔다. 우체부가 있어서 편지를 전해준 것은 아니고, 인편으로 부쳐온 것인데, 바로 영아에게서 온 것이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받아보는 편지라서 제법 눈물까지 비죽비죽 흘리면서 읽어보았다. 숙모댁이 부잣집이라서 별다른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닌데, 혼자서 너희들 생각 때문에 쓸쓸해 죽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삐뚤삐뚤하게 서툰 글씨가 왜 그렇게 좋았는지, 우린 서로 합창을 하다시피 소리를 높여서 그 편지를 읽고 또 읽곤 했다. 그러다가 내가 불쑥 말을 꺼냈다.
“우리, 읍내 가 볼래?”
윤이가 멀뚱하게 날 쳐다보았다.
“영알 찾아가 보자.”
그래서 우린 읍내로 향했다. 오전 늦게 떠났더니 읍내에 도착한 때는 이미 오후였다. 우린 놀랐다. 그렇게 화려하게 보이던 읍내는 우리 동네보다도 더욱 형편없이 되어 있었다. 불타버린 집터, 여기저기 널려 있는 쓰레기들, 무기력하게 보이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일은 통 길을 찾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쩌다 몇 번 와 본 곳이, 그 지경으로 변해 버렸으니 옛 기억을 더듬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아를 찾을 도리는 없었다. 차츰 고파오는 배를 움켜쥐고, 다시 되돌아오는 수밖엔 없었다. 가을 햇볕이 따사하게 내리쬐어서 더욱 배가 고파오는 것 같았다. 도중에서 우리는 논두렁길을 따라 걸으며 벼이삭을 잘라서 한알 한알 까먹으며 걷고 있었다.
거의 동네 근처에까지 왔을 때였다. 돌각담이 뭉숭그레 펼쳐져 있는 야산에 인민군 차림으로 보이는 사내가 하나 있었다. 그는 우릴 보지 못한 모양이어서 우린 두려움에 떨며 집까지 뛰어왔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치안대원들을 몇 불러 가지고는 그곳으로 갔다. 우린 같이 따라가 보고 싶었으나 꼼짝 말고 집 안에 있으라는 말씀에, 안마당에서 깡통차기만 하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날이 저물어서야 집으로 오셨다. 윤이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나는 저녁까지 먹고 마악 잘까 말까 생각하고 있는 중에 대문 소리가 났고, 아버지께서 돌아오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버지 뒤에는 아무래도 우리가 아까 보았던 그 인민군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껑충한 키의 사람이 따라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엄마에게 무어라 귀엣말을 하시더니 그를 보고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걱정 말게. 오늘부터 우리집에서 같이 지냄세. 그러지 않아도 일손이 부족했던 참인데, 자네 힘이나 좀 빌기로 하지.”
아버지의 말씀에 그 청년은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바로 우리가 보았던 인민군 패잔병이었고, 치안대원들이 붙잡아다 물어보니 들키면 죽을까봐 깊은 산 속에 숨어 지내다가 배가 고파서 야산 쪽으로 내려왔던 것이라고 했다. 난 어째서 아버지께서 그런 사람을 우리집에 데려온 것일까 궁금했으나, 형님을 둔 것처럼 잘 따르라는 말씀에 아무 말도 물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척 시장했던지 한 주발 그득히 담아준 시골의 밥그릇을 금세 치워버려서, 어머니께서는 혀를 끌끌 차시며 한 그릇 더 가져다 주셨다.
그렇게 해서 그는 우리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힘이 장사 같아서 집안 일은 모두 그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역시 아버지께서는 누구나 사랑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아버지께서 책임진다는 조건을 붙여 그를 치안대에서 빼내어 우리집으로 끌고 왔던 것이었다.
그는 처음 붙들렸을 땐 죽는 줄 알았다면서, 나와 친해진 후엔 곧잘 산 속에서 지내던 일을, 배가 고파 혼난 일, 밤을 따먹으며 돌아다니던 일 등을 내게 얘기해 주곤 하였다. 정말 그의 다 떨어진 군복 주머니에선 몇 톨의 밤알이 나와서 내가 맛있게 먹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의 여벌의 바지저고리를 입고 지냈는데, 그 커다란 키에 깡뚱한 옷 모습으로 해서 키들키들 웃고 있는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해 주었다.
“전쟁이 뭐야?”
내가 물을라치면, 그는,
“아주 고약한 거디.”
하고 북도 사투리로 대답하곤 했다.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는 평양의 어느 고위층의 인민위원회 간부의 동생이고, 곧 통일이 될 테니까 네가 나가서 싸워 공을 세우라는 형의 말을 듣고 군대에 입대했고, 채 전투다운 전투도 해 보지 못한 채 후퇴를 계속하는 바람에 어쩌다 패잔병이 되었다가 우리집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집에서는 누구 하나 그런 얘기를 밖에 나가 발설하는 사람이 없었고, 동네 사람들도 우리집에 있는 그의 과거 따위를 캐묻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순전히 마을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의,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따라준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그는 우리 엄마를 보고 ‘오마니’라고 북도 사투리로 불렀다.
“오마니, 우리 재얀 참 똑똑하우다레. 얼마 안 있으문 당갈 보내야 되겠수다레.”
그러면 나는 마구 그를 짓두들기며 응석을 부렸다.
“피이, 지가 가구 싶으니까.”
그 소리에 그는 ‘허허!’ 웃는 것이었고, 난 또 그 웃음이 무척 좋았다. 간단히 말해서 난 그에게 사내다운 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도 가끔 가다가는 울적한 심사가 되어 먼 하늘을 쳐다볼 때가 있었다. 흰 구름이 둥둥 떠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때면 나까지도 괜스레 마음이 허허로웠다.
“집에 가고푸지?”
내가 물으면,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먼 나라의 얘기 같은 어조로 말을 꺼집어내었다.
“재얀 돟겠다!”
그건 확실히 마음의 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전쟁을 넘어선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집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고약한 것이 전쟁이고, 그 전쟁 속으로 그를 내몬 형님이 미워질지라도 집이 그리운 것이다. 집에는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 조카 들이 있다.
나는 차츰 그가 무턱대고 좋아졌다. 겨울이 되면서부터 집에 할 일도 별로 없어지자 그는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있어 주었다. 눈이라도 내리는 날에는 그와 나의 발자국이 마을의 구석구석에 나 있기가 일쑤였다. 그는 어느새 나의 자질구레한 일상 속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어린애들의 세계로 들어오기를 꺼리는데, 그는 서슴지 않고 내 동심의 세계 속에 함께 들어와 있었다. 그는 내게 썰매도 만들어 주었고, 팽이도 깎아 주었다. 그리고 함께 놀아 주었다. 내가 건전하게 자랄 수 있는 짤막한 기간이, 그렇게 주어졌던 것이다. 짤막한 기간이라도 말하는 것은, 그가 얼마 안 있어 우리와, 특히 나와 이별을 하게 된 때문이다.
나의 행복된 나날이 계속되고 있는 중에도 전쟁은 점점 더 격해지고 있었다. 동네가 몇 번 수런수런하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일이 또 생긴 모양이라고 직감되었는데, 이번에는 동네의 일부가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원래부터 조용하던 동네는 더욱 조용한 마을로 남아있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어떤 면으로는 너무 고지식하고 어리숙했는지도 모르겠다. 북쪽으로 피난을 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을 테지만, 남쪽으로의 피난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동네는 또 다른 이방인들의 피부를 대하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중공군들을 되놈이라고 불렀었는데, 까까머리의 그들은 아직 소년 티를 제대로 벗어나지도 못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무척 떼거리가 많았다. 인해전술이란 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알아보았더니, 참 기가 막힌 일이었다. 사람들을 무더기로 내보내서, 그 사람의 힘으로 적을 밀고 나간다는, 어린 내가 생각해도 무지막지한 전술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마을에서 그래도 몇 째 갈 정도의 큰 우리집에 며칠 동안 기숙을 한 적이 있었다. 나의 그 커다란 친구는 광 속에 숨어 지냈고, 나는 그래서 다시 심심해졌으므로 할 수 없이 그 되놈들과도 친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난 그들에게 가끔 짓궂은 질문을 하기도 했다. 참전을 위해 미리 학습을 한 것인지 그들은 약간의 우리말을 알고 있었다.
“싸움, 재밌어?”
그러면 놈들은 펄쩍 뛰었다. 도대체 저토록 전쟁을 무서워하는 겁쟁이들이 어떻게 전장(戰場)에 나왔고, 더군다나 인해전술이라는 걸 사용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비행기 소리라도 날라치면, “벤찌! 벤찌!” 하면서 마루 밑바닥으로 숨는데, 꼭 다급해진 꿩이 약간 움푹한 구덩이에 대가리만 처박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러한 친구들을 전쟁은 이 이국 땅에까지 끌어다 놓은 것이었다. 양지쪽에서 이[虱]사냥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구역질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죽이고 난 다음 손톱에 묻은 피를 제 피라고 쪽! 빨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놈들이 다시 전선을 따라 남쪽으로 떠난 후 아버지께서는 서둘렀다.
“자네, 집이 그리울 텐데, 한번 다녀오게나.”
세월이 세월인지라 언제 또다시 전장터로 끌려나가서 죽게 될지 모르는 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집엘 한번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다녀오게나. 그건 다녀오길 바라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전시라서 일손이 부족한 터수로 보나 그 동안 들었던 정을 생각하더라도 그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책임을 지기 싫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한참 북새통에 젊은이가 길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점도 충분히 알고 계셨을 터였다. 그건 그런 모든 일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측면에서의 발상이었으리라. 다녀오게나. 거기엔 무한한 정, 안타까운 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도 그걸 알고 있는 듯했다.
눈 내리는 밤, 그는 엄마가 해준 떡을 양식으로 꿰어차고 우리집을 나섰다.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평양의 고위급 인민위원회 간부라는 그의 형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써 주었다. 중도에서 검문을 당할 때 신분증명서 대용으로 사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그리고는 당부했다. 가능하면 밤에만 걸을 것을.
며칠 후까지 눈은 계속 내려 쌓여 제법 발목까지 푹푹 빠질 정도가 되었다. 우리는 호롱불조차 비행기에서 포격할 수 있는 표적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사방 창문에 두껍고 검은 휘장을 내리치고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그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어디메쯤 갔을까?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나는 이제 우리의 얘기 속에만 남아있는 그가 몹시도 보고프다는 생각을 했다. 그 튼튼한 체구의 믿음직한 모습이, 겁에 질린 듯하면서도 주발 가득 담겨진 밥을 후딱 먹어 버리고, 다시 한 그릇을 더 먹어치우던 그 첫날의 인상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오마니!”
틀림없이 그였다.
“엄마, 왔어! 그 형이 왔어!”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난 벌떡 일어나 나가 대문을 열었다.
“재야!”
나는 그의 목에 꼬옥 달라붙었다. 그 커다란 체구에서, 그 동안 고생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와 함께 말할 수 없는 정겨운 느낌이 나의 조그만 마음 속을 꿰뚫고 들어왔다.
“형아!”
나는 울었다. 아버지와 엄마가 내 뒤에 서 계셨다.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친부모, 친자식 간이라도 그렇듯 감격에 찬 만남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두들 격정으로 인하여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예끼! 바보 같은 자식! 그예 집엘 못 가고 말았구나.”
늘 조용하시던 모습의 아버지께서 그런 식의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을 난 꼭 그때 한 번밖에는 본 적이 없다. 엄마도 쿨적거리고 계셨다.
“오마니! 또 왔수다레.”
오냐! 오냐! 그 날 밤은 그렇게 울고 우는 가운데 나는 잠이 들었다. 내게는 다시 정상적인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생활이 찾아왔다. 내게는 항상 윤이와 그리고 그가 함께 했다. 그는 때로는 들판에 나가서 타버린 잔디의 훗훗한 내음을 맡기도 하였고, 때로는 불타버린 잿더미를 한 줌 쥐어서 훌훌 날려보기도 했다. 그러다간 갑자기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그 잿더미를 뒤져서 기관총 탄피를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시커멓게 그슬려 있는 그 금속의 물체를 들고 한참씩 멍하니 서 있는 적도 있었다.
“왜?”
내가 물을라치면,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전쟁이란 걸 좀 생각해 보았다면서, 곧 밝은 표정으로 되돌아가 우리를 또 다른 곳으로 끌고 다녔다.
전쟁은 점점 치열해져가는 모양이었고, 동네 청년들은 모두 입대해야만 되었다. 그도 입대장정으로 뽑히게 되었다. 입대하기 전날 그는, 제발 그 날만은 아무 일도 하지말고 푹 쉬라고 간청을 하는 아버지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나무를 한다, 광 속을 정리한다, 부서진 곳을 수리한다 하는 일로 보내었다. 자기가 꼭 해야만 될 일이라는 것이었다.
떠나는 날, 그는 울지 않았다.
“재야!”
그는 우리 이젠 울지 말기로 하자고 했다. 그리고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보여 주면서 떠나갔다. 그 날엔 윤이도 따라나와 있었는데, 운 것은 윤이 혼자였다. 난 자꾸만 나오려는 눈물을, 그의 말대로 울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며 참았는지 모른다.
그 후에도 몇 번 그를 볼 수가 있었다. 배치받은 부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가끔 다른 군인들과 함께 차를 타고 와서 김치 따위를 얻어가곤 했던 것이다. 그들은 거의 우리 마을 장정들이었으므로 나는 그들이 올 때마다 동네를 한 바퀴 빙빙 돌면서 김치 공출이오! 하는 소릴 길게 뽑곤 했는데, 그것은 내게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동네 사람들도 그 ‘김치 공출’이란 말을 무척이나 반가워해서, 서로 다투어 자기집 김치를 들고 와서는 차에 가득 실어 보내곤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밤도 깊어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인데, 갑자기 자동차 소리가 부릉부릉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것은 얼른 들어서도 한 대가 아닌 많은 자동차의 행렬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 알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서둘러 호롱불을 켜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동구 앞쪽 행길로 시커먼 자동차들이 줄줄이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조용한 밤 공기를 깨뜨리는 그 소리에는 분명 전쟁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 냄새는 어둠을 타고 온 동네를 서서히 흔들어 놓았다. 난 멀거니 그 차량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내가 서 있는 땅이 차량의 질주로 인하여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거기 따라 나는 어떤 깊숙한 꿈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오마니!”
난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건 꿈이 아니라 생시였다.
“오마니!”
대문을 두들기며 들려오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나를 꽉 부여잡고 있었고, 차량들은 자꾸 달리고 있었다.
“형아!”
나는 호롱불을 높이 쳐들어 마구 흔들며 소릴 질렀다.
“형아―! 내다! 내, 재야다! 형아!”
그때였다. 등 뒤에서 엄마의 “안 돼!”하는 겁에 질린 소리와 함께 갑자기 온 하늘이 환해졌다. 조명탄이 터진 것이다. 뒤이어 쌔액―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함께 꽝! 꽝! 하늘에서부터 수많은 휘발유통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따르륵! 따르륵! 하는 기관총 소리가 온 동네를 깨웠고, 모두들 죽음 앞에서 떨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모든 것은 전혀 내 탓이었다. 호롱불빛 탓이었던 것이다.
이튿날, 도로 위엔 부서진 자동차 몇 대와 피투성이에다가 불에 꼬슬린 시체 여남은 구가 발견되었는데, 엄마는 거기엘 갔다 오시더니 자꾸만 울고 계셨다. 너무 놀라서 열이 펄펄 나는 나를 붙드시고 엄마는 끝없이 끝없이 우시는 것이었다.
며칠 후, 우리집에선 장례식을 치렀고, 나는 상여의 맨 앞에 서서 자꾸만 “형아야! 형아야!”만 되풀이할 뿐 눈물조차 흘릴 수가 없었다. 재야! 우리 이젠 울지 말기로 하자! 재야! 우리 이젠 울지 말기로 하자!
국방군이 다시 쳐들어오고, 우리가 그 동네에서 피난을 떠나 남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의 일이라고 기억된다. 동네를 지키시려던 아버지께서 용단을 내리셨던 것이고, 나는 내가 자라나던 샘통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샘통은 그렇게 내게 전쟁을 가르쳐준 곳인데, 지금은 휴전선 이남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일반인들은 들어가 살 수가 없는 곳으로 남아 있다. 형아의 무덤을 찾아가 성묘라도 하면서 그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옛날 얘기처럼 할 수 있는 날은 아직도 더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영아도 윤이도 그리고 철수도 그 생사마저 알 수가 없는 지금,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이미 돌아가신 지금, 과연 그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라도 있을 것인가?
(한맥문학. 04.4월호.pp.143-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