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에 떠내려 온 것들
장맛비에 떠내려 온 것들
이 웅 재
장맛비가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주방 쪽 창문을 통해서 탄천 변의 제2종합운동장 쪽을 바라보니 산책로에 물이 빠지고 드문드문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여서 나도 집을 나섰다. 어제는 비가 내리고는 있었지만 늘 하던 대로 그냥 나갔다가 허탕을 쳤었다. 야탑천은 하상(河床)이 보이질 않았고, 탄천 둔치 및 산책로는 사나운 흙탕물이 점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이 빠진 산책로는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진흙이 난장판을 이루기도 했고, 온갖 오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휴지 조각, 비닐, 스티로폼, 페트병, 뿌리가 뽑힌 채 떠내려 오다가 물가에 자라고 있는 조금 키가 큰 나무들에 걸려 있는 잡초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걷노라니 지루하지 않아 좋았다.
빠알간 빛깔의 등산모 하나는 나무 둥치의 위쪽에 걸려 있다. 그런 대로 제자리를 찾아든 모양새다. 늘 위쪽에서만 생활하던 습관이 그렇게 나무 둥치의 위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에게 무슨 모자가 필요할 것인가? 이제는 그만 가게 기둥의 입춘방처럼 격에 맞지 않는 처지로 전락해 버리고 만 신세일 뿐이다.
산책로에서 하천으로 내려가는 층계 쪽에는 바카스병이 굴러 떨어져 있다. 60년대 초에 나온 바카스, 참 생명력이 긴 상품이다. 저것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그걸 먹어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었는데…. 나도 그걸 박스째로 사다 놓고 물처럼 마시다가 혀가 아리아리했던 기억이 있다.
그 옆쪽으로는 소주병 2개가 의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하나는 ‘참이슬’, 하나는 ‘처음처럼’이다. 겉으로는 어깨동무를 했는데도 서로가 저 잘났다고 으스대는 모습이다. 처음처럼이 참이슬에게 말한다.
“요즘에는 도수가 낮은 소주가 잘 나간다고.”
20.1%의 참이슬보다 자기가 0.1% 낮은 20%라는 것을 자랑하는 말투다.
“20%는 자칫하면 위험해. 그래서 나는 20.1%인 거야.”
알코올 도수 20% 미만이면 상할 수 있다는 얘기다. 소주가 유통기간이 없는 것은 바로 20%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알코올 도수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위태위태한 20%보다는 20.1%가 안전하다는 말이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이번에는 예쁜 모양의 화장품 병이 보인다. 한 동안 아리따운 아가씨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터인데, 지금은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다. 아로나민 페트병도 있다. 남의 건강을 지켜주느라 수고하더니, 이제는 쓸모가 없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 저기 축구공이 하나 둥둥 떠내려 오고 있다. 동네 조무래기들과 매일 만나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던 시절이 그리워서 어쩔거나. 그러나 저 공은 흘러가다가 어딘가 쯤에서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건져지겠지. 그리고는 그 새로운 주인과 함께 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게 될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손수건 하나가 풀숲에 걸려 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둔치에 나와 군데군데 만들어 놓은 나무 의자에 앉아서 달콤한 정담을 나누고 있을 때, 아가씨가 남자 애인에게 깔고 앉으라고 펴 놓았던 것인지 꽃무늬가 알록달록하다. 남자 애인의 궁둥이를 받쳐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은 지저분하게 더러워진 모습이다. 그들의 사랑은 해피엔드로 잘 마무리되었을까?
신문지와 뒤범벅이 된 채, 동화책도 보인다. 중가운데가 펼쳐진 채 바람이 불면 책장이 펄럭거린다. 신데렐라가 고개를 빠금히 내밀다가 사납게 흐르는 흙탕물을 보고는 놀라서 재빠르게 책장 속으로 숨어 버린다. 철수도 순이도 책장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빨리 날이 개어 맑은 햇빛이 비치고 그들이 서로 손을 잡고 탄천 둔치로 나와 함께 산책로를 걷게 되기를 빌어본다.
비닐 과자봉지들도 꽤나 많다. 아삭아삭 경쾌한 소리를 내며 먹혀지던 과자를 담았던 봉지들. 슈퍼에 있을 때는 빨리 팔려나가기를 바랐을 터이지만, 다 먹어버리고 난 과자봉지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왜 진작 몰랐을까? 맛있는 과자를 담고 있을 때가 그리워지겠지만, 누구든 그 가장 잘 나가던 때에도 만족할 줄 모르고 지낸다는 것이 커다란 병통이 아닐까?
아니, 저건 편지 아니야? 진흙에 뒤범벅이 된 편지지에는 깨알 같은 글씨들이 안쓰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지고 있던 기다란 우산대로 뒤적여 보았더니 그만 글씨들이 진흙에 묻혀버려 알아볼 수가 없게 된다. “어제도 나는…” 하는 구절 다음부터는 그냥 흰 백지 상태다. 마무리가 되지 않은 편지였었나 보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볼펜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얼른 주워서 옆쪽 괴어 있는 물에 씻은 다음, 주머니에서 늘 가지고 다니던 파지를 꺼내어 끼적여 보니 글씨가 써진다. 그래, 이 볼펜을 가지고 가서 저 쓰다가 만 편지의 뒷부분을 완성시켜 주자. 받을 사람의 주소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까이거, 받을 사람을 모르면 어떤가? 편지가 완성된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
저쪽에는 노란 플라스틱 조각도 산책로와 하천 사이에 처박혀 있었다. ‘안전제일’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예쁘장하게 생긴 인형이 안전제일을 베고 누워 있다. 그리고 옆쪽에는 ‘공사 중’도 함께 떠내려 왔다. 그 앞쪽으로 까치 한 마리가 휙 날아 지나간다. 그리고 참새 두 마리도. 놈들은 풀숲을 헤치며 무언가를 콕콕 찍어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장맛비가 휘젓고 지나가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씨앗들을 좀더 멀리멀리 전파시킨 초목들도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탄천 둔치의 산책로에는 온갖 것들이 떠내려 오다가 걸려 널브러져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달콤함도 위태로움도, 사랑도 미움도, 욕망도 관용도, 자연은 그 모든 것들에게 공평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종족 번식을 위한 눈물 나는 노력도 콸콸 흐르는 흙탕물과 함께 했던 것을 보고,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자연을 이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깨달았다.
(06. 7. 18. 원고지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