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꽃 궁녀 (신명호 지음. 시공사. 2004. 294p.)[이웅재 요약]
궁궐의 꽃 궁녀 (신명호 지음. 시공사. 2004. 294p.)[이웅재 요약]
왜곡된 궁녀의 이미지
이규태는 증언을 토대로 1968년 3월부터 황족, 궁녀, 내시 등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71년에 “개화백경(開化百景)”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또한 김용숙은 87년에 궁녀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朝鮮朝 宮中 風俗 硏究)”를 출간했다.…
마지막 황후인 윤비(尹妃: 순종의 두 번째 황후)를 끝까지 모셨던 세 궁녀 중에서 박창복(朴昌福) 상궁이 1981년에 세상을 떠나고, 83년에 김명길(金命吉) 상궁이 세상을 떠난 뒤로 2001년에 마지막 궁녀였던 성옥염(成玉艶) 상궁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궁녀들의 직접적인 증언을 토대로 한 연구는 불가능해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궁녀에 관한 지식은 모두 “개화백경”과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에 근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12)
알기 어려운 궁녀의 실체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세가였던 한비자(韓非子)는 왕에게 유세할 때 꼭 명심해야 할 사항으로 역린(逆鱗)을 이야기했다. …
궁녀는 왕에게 역린과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 (p.19)
궁녀를 바로 알려면?
왕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궁녀 문제를 언급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도 왕이 만부득이 궁녀 문제를 말해야만 하는 때가 있다. 궁녀가 모반 대역이나 저주 사건, 또는 간통 사건에 연루되는 경우다.…
그런데 궁녀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알려졌을 정보들은 “실록”에 실리는 과정에서 또다시 죽은 정보로 바뀌어 버린다.…
몇 살에 입궁했는지, 입궁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 정말로 알고 싶은 정보들은 모두 빼 버린다.… (p.27)
하지만 천만다행히도 조선 시대 궁중 여성들이 남긴 기록과 모반 대역 죄인들을 조사한 법정 기록이 남아 있다. “계축일기”, “인현왕후전”, “한중록” 등의 궁중 문학 작품과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이라는 법정 기록이다. 특히 “추안급국안”은 조선 시대의 역적들을 조사한 내역을 자세히 싣고 있는데, 이 중에는 궁녀들이 대거 등장한다.… (p.28)
아울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풍부하게 남아 있는 왕실 자료들도 요긴하다. 궁녀들에게 지급한 월급 명세서, 궁녀들의 근무 일지, 편지 등의 자료들은 “실록”이나 “추안급국안” 또는 궁중 문학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 궁녀들의 이면을 보여 준다. (p.29)
[궁녀 열전]
조선의 신데렐라 - 신빈 김씨
신빈 김씨는 내자시(內資寺)의 종이었다. 공노비였던 것이다. 이런 신빈 김씨가 궁녀로 입궁한 계기는 젊은 세종의 즉위였다. 신빈 김씨가 열세 살 되던 해에 세종이 스물두 살의 나이로 조선의 4대왕이 되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궁녀 충원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가 살아있는 데다 폐세자가 되었다고 해도 양녕대군을 모시던 궁녀들을 세종과 왕비의 궁녀로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많은 궁녀들을 들이기로 했는데, 내자시의 여종이었던 신빈 김씨도 이때 궁녀로 선발되어 궁궐에 들어왔다. 그리고 신빈 김씨는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지밀나인이 되었다.… (p.35)
세종 9년부터 시작하여 이후 12년 동안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 아들 여섯과 딸 둘이 태어났다.… (p.36)
세종과 왕후 심씨, 그리고 신빈 김씨는 놀라울 정도로 의가 좋았다. 이것은 세종이 신빈 김씨를 총애하면서도 본처를 소홀히 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37)
세종의 사랑을 받은 신빈 김씨는 왕이 승하한 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자식들도 많았지만 세종의 사랑을 잊지 못해 왕의 명복을 빌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신빈 김씨는 공노비 출신으로 궁녀가 되어 빈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세종의 사랑을 받아 아들 여성, 딸 둘을 낳고 천수까지 누렸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 최고의 신데렐라라 할 만하다.… (p.40)
나쁜 궁녀의 대명사라 - 장녹수와 김개시
궁녀로서 왕의 총애만 받고 후대 왕을 낳지 못했던 장녹수(張綠壽)와 김개시(金介屎)는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다. 특히 장녹수와 김개시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기에 그 비난이 더더욱 심했다.
… (p.42)
"실록"에 의하면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고 한다.…사노비였던 셈이다.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가비가 된 내력은 대군의 가노(家奴), 즉 남자 종에게 시집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간 애매한 부분이 나타난다.…이는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張漢弼)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장한필은 문과에 합격하고 문의 현령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p.43)
장녹수의 아버지는 양반 관료였지만 어머니는 노비, 그것도 내수사의 노비였다는 얘기가 된다.… (p.44)
장녹수는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몸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장녹수 자매가 어릴 때부터 어버지 장한필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녹수는 궁녀로 입궁하기 전에 이미 아들까지 낳은 상태였다. 나이도 서른이 넘은 데다 얼굴이 썩 예쁜 편도 아니었다. 단지 노래와 춤에 능했으며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은 소리를 내는 개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장녹수는 예능 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셈이다.
이런 소문은 연산군에게도 들어갔다. 연산군은 조선 시대의 왕들 중에서 예술적인 기질이 가장 뛰어난 왕이었다.…눈에 확 띄는 미녀도 아니고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 그것도 연상인 장녹수를 연산군은 딱 한 번 보고 입궁시켰다고 한다.… (p.45)
장녹수는 아버지 없이 자란 반면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랐다. 이렇게 자란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갈구했을 것이다. 특히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난 후 생모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치는 연산군의 모성애를 연상의 장녹수가 채워 주었다.… (p.46)
반면에 김개시는 장녹수와 다른 면을 보여준다.…김개시는 노래나 춤이 아니라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p.47)
김개시는 애초에 훗날의 광해군이 되는 동궁 소속의 궁녀로 입궐했다.…
그러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선조의 나인이 되었다. 글도 잘 알고 문서 처리에도 능숙한 김개시의 역량이 발탁 사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김개시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다시 광해군의 지밀나인으로 옮겼다. 광해군은 자신의 나인을 데려온 것이지만 김개시가 아버지 선조를 모셨던 궁녀인 만큼 비난의 소지가 적지 않았다.… (p.48)
장녹수나 김개시는 개인적으로는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한 궁녀들이었다. 장녹수는 예술을 사랑한 연산군의 예술적 감성을 충족시키고 모성애를 채워 주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앞날을 가로막는 걸림돌들을 스스로 나서서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장녹수는 권력자로서의 의무에 무신경했고 김개시는 도덕적 요구에 냉담했다. 장녹수와 김개시가 개인 궁녀로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최고 권력자를 대행하는 공인으로서는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p.50)
궁녀가 입궁할 때 부모가 주는 선물
궁녀는 한번 대궐에 들어가면 죽기 전에는 다시 나올 수가 없었다.… 식기(食器) 하나, 요강 하나, 그리고 무명 이불이 전부였다고 한다.…(p.1)
혁명가 궁녀- 고대수
김옥균은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일본의 무력과 고종의 권위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분명한 약속을 얻어 내는 일과 함께 고종을 확실하게 장악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김옥균은 궁중의 내시를 포섭하는 한편, 자신의 동조자를 고종의 측근 궁녀로 들여보냈다. 김옥균의 동조자로 입궁한 궁녀가 고대수(高大嫂)였다.(p.52)
원래 고대수는 “수호지”에 나오는 여장부의 이름이다. “수호지”의 고대수는 사내 20여 명을 거뜬히 해결하는 양산박의 108두령 중 하나로, 외부의 정보 수집을 담당했다.…
고대수의 본명은 이우석(李禹石)이다. 이우석은 “수호지”의 고대수처럼 덩치도 크고 기운이 세어 남자 대여섯은 너끈히 감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당시 명성왕후 민씨의 나인이었던 송씨의 연줄로 입궁했던 것이다.
덩치 크고 기운 센 서른일곱 살의 고대수는 상궁이나 나인 같은 정식 궁녀는 아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무엇보다도 나이가 너무 많은 데다 용모도 단정하지 못했다.
기운이 센데 나이는 들고 용모도 단정하지 못한 여성이 궁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수리[水賜]가 적격이다. 무수리라야 출퇴근도 가능하다. 궁중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첩자로서는 무수리가 제격이었던 셈이다.
궁중의 무수리로 입궁했다면 고대수는 매우 미천한 신분이었을 것이/(p.53)다.…
그런데 묘하게도 명성왕후 민씨는 고대수를 매우 신임했다고 한다.…(p.54)
갑신정변의 성패는 거사와 함께 신속하게 친청파 민씨 척족들을 제거하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겨 모시는 데 달려 있었다.… (p.56)
김옥균은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를 경우궁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김옥균은 고종과 명성왕후가 경우궁에 머무는 동안 각종 혁명 공약을 공포했다. 혁명은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는 경우궁이 비좁다는 이유로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갈 것을 재촉했다. 12월 5일 오후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가 창덕궁으로 돌아갔는데, 다음날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다.… (p.58)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자객의 손에 최후를 맞았다. 이에 비해 고대수는 궁중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공개 처형을 당했다. (p.59)
명성왕후 민씨의 엽기적인 질투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의친왕 이강의 생모인 장상궁이 이강을 출산했을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p.59)
명성왕후는 장상궁이 가여운 생각이 들어 칼을 던져 버리고 웃으며 말하길 “과연 대전의 사랑을 받을 만하구나. 지금 너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다시는 궁중에 거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힘센 장사를 불러 장상궁을 포박시킨 다음 장상궁의 음부 양쪽 살을 도려내고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 후 장상궁는 10년 가까이 형제들에게 의지하고 살다가 그 상처로 말미암아 죽고 말았다. (p.60)
중국의 조선 출신 궁녀-청주 한씨
명나라의 경우 궁녀가 1만 명이나 되었다. 조선 시대의 궁녀가 대체로 500-600명을 헤아렸던 사실에 비교한다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규모다.…
중국이 다른 나라에서 받아들이는 궁녀가 이른바 공녀(貢女)였다.
삼국 시대 이래로 조선 시대까지 우리나라도 중국에 공녀를 보냈다. 기록에 나타난 것만 해도 고려 시대 170명, 조선 시대 146명이니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p.61)
명나라로 간 공녀는 114명이고 청나라로 간 공녀는 32명이었다. 명나라로 보내는 공녀는 양반 사대부 가문에서 골랐는데 청나라로 보내는 공녀는 공노비 중에서 골랐다.
조선 시대의 공녀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산 경우는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 때 들어간 청주 한씨였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공녀로 뽑혀 명나라 황제의 사랑을 받고 최후에는 순장을 당한 비극적인 인생이 너무나도 파란만장하다. (p.62)
한씨의 행복은 잠깐이었다. 명나라에 간 지 7년 만에 한씨를 사랑하던 영락제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명나라로 갔으니 한씨는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음이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이렇듯 꽃다운 나이에 영락제를 따라 순장(殉葬)을 당하고 말았다.… (p.65)
명나라 궁중에는 동양 각국에서 온 수많은 궁녀가 있었는데, 비밀을 누설할까 봐 이들을 순장시켰다는 것이다. (p.66)
일본의 조선 출신 궁녀-오따 줄리에
임란 와중에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는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아주 많았다. 오따 줄리에도 그 중 하나였다.
오따 줄리에는 1592년 다섯 살 어린 나이에 평양에서 포로로 잡혔다. (p.68)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선봉을 맡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에게 잡혔던 것이다.… (p.69)
큐슈에서 고니시의 부인을 모시던 오따 줄리에의 인생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큰 변화를 맞이했다.…
도요토미는 다섯 살 난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를 남기고 죽었다. 하지만 히데요리가 너무 어려서 일본을 다스릴 수가 없었으므/ (p.71)
로 원로들 다섯이 섭정을 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사무라이들이 서로 분열하여 전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사무라이들은 히데요리를 추종하는 파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추종하는 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만에 히데요리파와 이에야스파는 일본의 패권을 놓고 일대 결전을 벌였다.…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났고,…
고니시는 이에야스의 포로로 전락했다.… (p.73)
고니시가 죽자 그의 영지(領地)는 몰수되고 가문은 멸망했다. 그 와중에 고니시의 부인을 모시던 오따 줄리에의 운명도 이에야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 나이 열셋이었다. (p.74)
오따 줄리에가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으로 보인다. 다섯 살 때 포로가 된 뒤로 8년가량 고니시의 부인을 시중들었는데, 아마도 이때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으리라 짐작된다. 당시 고니시는 일본의 대표적인 천주교 신자였으므로 그의 부인도 당연히 천주교 신자였을 것이다.…
이에야스가 천주교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오따 줄리에는 신앙을 버리지 못하다가 결국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야스는 오따 줄리에를 총애한 나머지 그녀의 천주교 신앙을 포기/ (p.75)
시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오따 줄리에는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던 궁녀에서 죄인의 몸이 되어 외딴 섬으로 유배되었다.… (p.76)
오따 줄리에는 유배지에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생을 마감했다. (p.77)
조선의 중국 출신 궁녀- 굴씨와 최회저
병자호란 이후 심양에 인질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이때 소현세자는 명나라의 궁녀와 환관을 데리고 귀국했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에게 준 선물이었다.
당시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온 명나라 궁녀 중에 굴씨(屈氏)라는 여성이 있었다. 굴씨는 사실상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崇禎帝) 황후의 궁녀였다.…
굴씨는 중국 소주(蘇州)의 양가집 딸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정치가 문란하여 관리들의 학정이 말이 아니었다. 굴씨가 살던 고을의 관리도 학정을 일삼으며 미인들을 마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에 굴씨의 어머니가 딸을 죽이려고 했을 만큼 굴씨는 어려서부터 상당한 미모였던 듯하다. (p.78)
굴씨는 죽기 직전에 구해 준 사람이 있어서 겨우 살아났다. 굴씨를 구해 준 사람이 궁중과 관련이 있었던지, 이 인연으로 굴씨는 주황후(周皇后: 숭정황제의 황후)의 궁녀로 들어갔다. 그때 나이 일곱 살이었다. …반란을 일으킨이자성은 북경으로 쳐들어 와 자금성을 점령했는데, 막다른 골목에 몰린 숭정황제는 목을 매 자살했다. 황제가 자살하자 주황후도 따라서 자살했다.… 황후가 목숨을 끊자 굴씨는 궁중/ (p.79)
에서 도망쳐 나와 민간에 숨어들었다.…
민간에 숨었던 굴씨는 청나라 군사들에게 포로로 잡혔다.…굴씨는 당시 북경의 점령사령관이나 마찬가지였던 예친왕 다르곤에게 넘겨졌지만 그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고 한다. (p.80)
그 미모에 반한 예친왕은 앙칼진 굴씨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것 같다. …예친왕은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굴씨를 선물로 주었다.
굴씨를 죽일 수도 없고 데리고 있을 수도 없던 터라 심양에서 8년이나 인질 생활을 한 소현세자의 귀국 선물로 준 것이다.… (p.81)
소현세자를 따라와서 궁녀가 된 명나라 여성 중에 최희저는 여든이 넘어서까지 오래 살았다. 인조, 효종, 현종, 숙종 4대를 궁궐에서 산 셈이다. 당시 명나라를 추모하던 조선의 분위기 속에서 최희저는 궁중의 숭명반청(崇明反淸)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최희저는 숙종 25년(1699년)에 정식으로 상궁 교지까지 받았다.… (p.83)
최희저는 같은 현에 살던 남자에게 시집까지 갔던 유부녀였는데, 청나라 군사들에게 포로로 잡혀 심양으로 끌려왔다가 소현세자에게 넘겨진 것이었다.
(p.84)
[궁녀 선출]
선출방법과 정원
왕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소속된 궁녀들만 관할할 뿐 자신의 관할을 벗어나는 궁녀에 대해서는 선발권조차 없었다.… (p.87)
궁녀의 충원도 각 처소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조선 시대의 세자 책봉은/ (p.88)
여덟 살 전후에 이루어졌으므로 세자의 궁녀들은 세자의 의지보다는 왕이나 왕비가 결정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에게 성심으로 충성을 바칠 궁녀는 어려서부터 세자를 키운 유모와 보모만한 사람이 없었다.… 대비, 왕비, 후궁, 세자빈의 궁녀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주인이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른 후 대궐 밖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었다.… (p.89)
각 처소별로 궁녀수를 명시한 것은 성종 대였다. 그 이전에는 각 처소의 궁녀수가 관행적으로 정해져 있는 편이었다.… (p.92)
시녀와 시녀들의 종을 합친 궁녀 수는 대전 49명, 대왕대비전 29명, 왕대비전 27명으로서 총105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궁녀 수는 처소의 격에 따라 차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시녀 이외에 시녀들의 하녀라 할 수 있는 무수리와 파지, 수모 등이 포함되었다.… (p.93)
고종 대의 궁녀는 적어도 480명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성종 대의 궁녀 105명의 네 배가 훨씬 넘는다.… (p.94)
영조 대에는 600명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입궁시 처녀 감별
궁녀들의 증언에 의하면 입궁할 때 처녀 감별을 했다고 한다. 물론 처녀 감별은 열 살 이상의 여자 아이들에게만 시행했다고 한다.… 이 처녀 감별은 미혼 궁녀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것이다.… 처녀 감별은 의녀(醫女)가 앵무새의 생혈(生血)을 여자 아이의 팔목에 묻혀서 이것이 묻으면 처녀고, 안 묻으면 처녀가 아닌 것으로 판정했다고 한다. (p.96)
자격 조건
궁녀는 각 처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친족 중에서만 선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p.98)
예컨대 열 살에 왕세자에 책봉된 동궁이 궁녀들을 선정하기 시작해서 왕이 되고 승하할 때까지 수십 년이 흐른다면, 그 왕의 주변에 있는 궁녀들은 무시무시한 친인척 집단으로 바뀌어 버릴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몰랐을 리가 없다.…
시비(寺婢)는 특교(特敎)가 아니면 궁녀로 선발하지 않는다. 양가의 여성은 일체 논하지 않는다. 양인이나 시비를 혹시 궁녀로 추천하여 보내거나, 혹 속이고 들어가게 하는 자는/ (p.99)
형벌에 처한다.… (p.100)
조선 시대 노비를 관리하던 곳이 형조였다. 당연히 중앙 정부의 각 관청들에 소속된 여자 종들을 대상으로 궁녀를 선발하는 업무도 기본적으로 형조 소관이었다.…
각사 중에서도 내수사의 여자 종을 대상으로 궁녀를 선발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내수사 이외의 다른 관청에서 궁녀를 선발할 경우에는 왕의 특교, 즉 특별 명령이 필요했으며 양가의 여성은 아예 궁녀로 들이지 못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 규정은 조선 개국 이후 영조 때까지의 궁녀 선발 관행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즉 그 이전에는 내수사뿐만 아니라 다른 중앙 관청의 여자 종들이 궁녀로 선발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양인 여성들도 궁녀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101)
순조가 공노비를 해방했을 때, 내수사 및 궁방에 소속된 노비가 37,000여 명이었다. 순조 당시 수많은 공노비가 도망쳤던 상황을 감안하면, 원래 내수사의 노비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p.102)
궁녀의 선발 조건이 내수사의 여자 종 및 중앙 관청의 여자 종이므로 궁녀의 선발에서는 환관과 형조의 역할이 중요했다. 내수사는 환관들이 관리하고, 공노비는 형조에서 관리하기 때문이었다.… (p.104)
궁중의 불 때기
궁궐의 건물 바닥에 모두 온돌을 놓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거주하는 건물에는 온돌을 깔았다. 즉 불을 땠다는 의미다.…
궁궐에서는 나무나 장작이 아니라 숯을 이용했다. (p.106)
17세기 궁녀들의 출신 성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몰락하자 인목대비는 곧바로 자신을 괴롭히고 모함하던 궁녀들부터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인조가 체포했던 궁녀는 모두 81명이었다.…
조사를 받은 81명 중에서 자신의 출신을 밝힌 궁녀는 40명이었다.… (p.108)
양인 출신의 궁녀는 4명이다. 영조 대 “속대전”에서 양인 여성들을 궁녀로 선발하지 못하게 했던 근거, 즉 양인 출신 여성들도 실제 궁녀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p.110)
조선 시대 궁녀들은 기본적으로 각사나 본방에서 충원되었으며 일부분만 양인 여성 중에서 충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양인 출신의 여성들이 궁녀가 되는 경우, 나이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어린 여자 아이들은 부모의 뜻에 의해 입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다가 순조 이후 공노비가 혁파되면서 양인 출신의 여성들이 충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p.112)
궁중의 생활 쓰레기와 인분(人糞) 수거
조선 시대 궁중에는 평상시 대략 3,000명 정도의 인원이 거주했다.…
전연사(典涓司)라는 관청을 따로 두어 궁궐 청소를 전담시켰다. 전연사에는 정식 양반 관료 이외에 남자 종 48명이 소속되었는데, 이들이 궁중의 쓰레기와 인분을 수거했다. (p.113)
입궁 나이
현재 조선 시대 궁녀들의 입궁 나이는 빠르면 네 살에서 여섯 살, 늦어도 열두 살 안팎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p.114)
17세기 궁녀들의 입궁 나이를 정상으로 본다면, 조선 시대의 궁녀들은 빠른 경우 아홉 살, 조금 일찍 잡아도 일고여덟 살은 되어야 궁녀로 입궁할 수 있었으며 늦으면 20대나 30대에도 입궁이 가능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p.122)
조선 시대의 남성은 열여섯 살부터 성인으로 인정하여 군역 등을 부과했다. 이에 비해 여성은 조금 빨리 성숙한다고 생각하여 열다섯 살부터 성인으로 간주했다. 조선 시대에는 남성이고 여성이고 성인으로서의 책무를 맡기기 전에 기본적인 교육을 시켰는데, 예컨대 남자 아이는 여덟 살부터 소학을 가르쳤다.
이에 비해 여자 아이는 남자 아이보다 조금 일찍 성장한다고 보아 일곱 살부터 교육을 시작했다. 예비 궁녀로서 여자 아이를 입궁시킨다면 늦어도 일곱 살 이후부터 가르치는 것이 유교의 기본 이념과 일치한다.… (p.123)
유모와 보모상궁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는 주변 사람들을 닮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면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유모나 양육을 담당하는 보모가 아기의 몸과 마음에 끼치는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것이다.
유모와 보모 중에서도 물론 유모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p.125)
왕의 유모는 더더욱 특별한 존재였다. 왕의 유모는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 하여 종1품으로 대우했는데, 상궁이 겨우 정 5품이었던 사실에 비하면 대단한 예우가 아닐 수 없다.… (p.126)
왕비, 세자빈, 또는 후궁들은 보통 해산 뒤 삼칠일 동안, 곧 한 달 동안 직접 젖을 먹였으므로 유모는 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젖을 먹였다.…(p.128)
유모가 젖을 먹이는 궁중의 아이들은 대체로 두세 살쯤 젖을 뗐다.…
사실 젖을 떼면서 유모의 역할은 끝나지만 출궁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 옆에 계속 머무르면서 보모처럼 돌봐 주었다. 궁녀가 되는 셈이었다.… (p.129)
월급만 놓고 본다면 봉보부인은 영의정보다도 많이 받는 셈이었다. …
5,6명의 노비를 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유모는 궁녀들처럼 내수사나 각사의 여자 종에서 선발되었으므로 공노비 신분인데, 봉보부인이 되면 자연 면천(免賤)되었/ (p.130)
다. 본인만 아니라 남편도 함께 면천되었다. 심지어 예종은 봉보부인의 친족 27명을 면천해 주기도 했다.…정식 유모 이외에 어쩌다가 왕에게 한번 젖을 먹인 여성들도 면천되는 특혜를 받았다.…
보모상궁은 직접 젖을 주는 일 말고는 모든 양육을 책임졌다.… (p.131)
내의원 소속의 의녀 역할
의녀는 궁녀나 마찬가지로 공노비 중에서 선발되었다. 따라서 의녀의 신분은 노비였/ (p.133)
다.…내의원에 소속된 의녀들은 비록 궁궐에서 근무한다고는 해도 출퇴근을 했으며 혼인도 가능했다.…
그런데 궁중에 일이 없을 때는 여성 범죄자를 조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궁중 연회에서 가무를 보여 주는 기생 역할도 담당했다. (p.134)
본방 나인
왕비, 세자빈 등이 궁궐로 들어올 때 데리고 들어오는 유모나 몸종을 본방 나인이라고 했다. 본방이란 원래 조선 시대 왕비의 친정을 지칭하는 용어이므로, 본방 나인이란 왕비의 친정에서 데리고 온 나인이란 의미다.…
본방 나인은 공노비가 아니라 사노비였다. 즉 본방 나인은 왕비, 세자비 등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궁녀였다.… (p.137)
방굿례[放氣禮]
만약 선배 궁녀 앞에서 방귀를 뀌는 실수를 하면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벌로 집에서 떡 벌어지게 음식을 차려 와 대접해야 했는데, 이것을 방굿례라 했다고 한다. (p.141)
[궁녀 조직]
비공식적인 궁녀조직
궁녀는 최고로 올라가도 .5품에서 멈춘다. …4품 이상은 궁녀가 아니/ (p.145)
라 왕의 후궁이었다.…조선 시대 양반 관료 조직이 크게 5품에서 9품까지의 사(士)와 1품에서 4품까지의 대부(大夫)로 구분되었는데, 내명부의 조직도 5품에서 9품에 이르는 궁녀와 1품에서 4품에 이르는 후궁으로 양분되었던 것이다.… (p.147)
평상시 궁녀들을 부르는 호칭은 통상적으로 나인[內人]이었다. … (p.149)
궁녀는 간단하게 나인과 상궁으로 대별되었던 셈이다. …호칭의 경우 상궁은 ‘마마님’이란 존칭으로 불렸으며 나인들은 ‘항아(姮娥)님’으로 불렸다.
관례 전의 나인들은 생각시, 또는 각시라고도 했다. 생각시는 각시 중에서 생이라고 하는 머리를 맬 수 있었던 지밀, 참방, 수방의 각시를 지칭했/
(p.151)
그러므로 각 방은 상궁, 나인, 생각시, 각시로 구별되었다고 하겠다.…
(p.152)
결국 각 처소에는 최고 상궁인 제조상궁, 재산을 담당하는 부제조상궁, 언행을 감독하는 감찰 상궁이 있고, 그 하부는 각 방별로 상궁과 나인, 생각시, 각시로 대별되었다고 하겠다. … (p.153)
업무 분장
조선 시대 중앙 정부의 문반과 무반을 합한 전체 정원은 채 5,000명이 안 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 후기의 궁녀 수는 500-600명을 헤아렸다. 궁녀의 수가 중앙 정부 공무원의 10퍼센트를 훨씬 넘었다는 계산이다.…(p.155)
궁녀의 휴가
궁녀들은 휴가가 없었다. 원론적으로 궁녀는 죽거나 큰 병이 들지 않는 한 출궁할 수 없었다.…
첫째는 궁중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다음으로 궁녀는 관념적으로 왕에게 시집간 여성으로 간주되었으니… (p.162)
궁녀의 하인들
상궁과 나인 이외의 여성들이 또 있었다. 이른바 방자와 취반비, 그리고 무수리와 파지 등이었다. 이들은 상궁과 나인의 하녀인데, 이들도 궁궐 안에서 근무하므로 넓은 의미에서 궁녀라 할 수 있다.… (p.163)
방자, 취반비, 무수리, 파지는 어찌 보면 매우 불운한 여성들일 수도 있었다. 이들이 모시는 상궁이나 나인도 원칙적으로 같은 공노비 출신인데 그들의 시중을 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단지 상궁이나 나인은 평생 주인을 위해 수절해야 하는 억압을 당했던 반면 방자, 취반비, 무수리, 파지는 이런 억압에서 자유로웠다는 사실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라 할 것이다.
궁녀의 하인들
상궁이나 나인 개인에게 소속된 하녀
-방자: 방청소 및 개인 심부름
-취반비: 음식 장만
각 처소에 소속된 하녀
-무수리: 물 긷기
_수모: 세숫물이나 목욕물 담당
_파지: 심부름 및 청소… (p.169)
[궁녀의 일과 삶]
업무의 종류와 근무처
지밀이란 왕, 왕비, 후궁, 대비, 세자, 세자빈 등의 침실을 의미한다.… (p.183)
지밀나인들은 밤에 왕이나 왕비의 침전에서 잠을 잘 수 있는 궁녀들이었지만 나머지 궁녀들은 그러지 못하다는 점에서 구별되었다.…
색장, 무수리, 파지 등은 비록 지밀에서 근무하지만 밤에는 그곳에서 잠을 잘 수 없으므로 퇴근해야 했다.… (p.184)
경복궁의 강녕전이나 창덕궁의 대조전 등은 종간의 대청과 좌우의 동온돌과 서온돌로 구분되었다. 이 중에서 동온돌이나 서온돌이 침실로 이용되었는데, 동온돌과 서온돌은 기본적으로 우물 정자 형태였다.…
중앙의 방 하나와 이를 둘러싼 8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동온돌과 서온돌이 동일한 구조이므로 침전에는 최소한 18개의 방이 있는 셈이다.
왕이나 왕비는 보통 동온돌, 또는 서온돌의 중앙에 있는 방에서 잤다. 물론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 수시로 방을 옮기기도 했다. 지밀나인들은 왕이나 왕비가 자는 방 주변의 여덟 방에 들어가 숙직을 섰다. 이때 나인들은 서로 방문을 터놓고 공개적으로 숙직을 섰다고 한다. 왕이나 왕비의 침실에서는 최소한 8명의 나인이 숙직을 섰다는 계산이다.… (p.187)
실제로 궁녀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지밀나인들도 격일제로 근무했다고 한다. 주야간으로 8명씩 격일제 근무를 하려면, 8명이 4교대로 근무해야 가능하다. 즉 적어도 지밀에만 30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p.188)
결국 조선 시대 궁녀들은 주간 근무자든 야간 근무자든 격일제 근무였다. 주간이든 야간이든 계산상 12시간 근무 후에는 36시간을 쉬는 셈이었다.… (p.189)
월급체계
녹/(p.193)
봉의 지급 형태는 조선 전기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한 계절에 한 차례씩 지급하다가 조선 후기에는 월급제처럼 매달 지급했다.
이에 비해 궁녀들은 조선 시대 내내 월급제였다.…
궁녀들이 받는 보수에는 의전, 선반, 삭료 세 가지가 있었다.…
의전은…1년에 두 차례 지급하는 옷값이다.… (p.194)
선반은 글자 그대로 밥을 주는 것이다.…
삭료는 매달 주는 봉급이란 의미다.… (p.195)
월급 항목은 공상(供上)과 방자(房子)로 나뉘어 있었다.…
공상은 궁녀들에게 지급되는 월급 가운데 기본급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방자는 상궁과 나인들의 하녀격인 방자를 쓸 수 있는 비용이었다.…방자는 모두에게 지급된 것이 아니라 직급이나 직무에 따라 일부분만 지급되었으므로 일종의 직급수당, 또는 직무수당인 셈이다.… (p.197)
가장 적은 월급을 받는 사람은…최고 소득자인 제조상궁과 비교하면 대략 5분의 1에 해당한다.… (p.199)
옛날 웬만한 시골에서 1년에 쌀농사 10가마면 어지간히 사는 집으로 간주되었다.…그런데 궁녀로 들어가기만 하면 1년에 적어도 10가마의 곡식이 보장되었다. … 조선 시대 가난한 부모들이 딸들을 나인은 물론 궁녀의 하녀인 방자나 무수리로라도 들여보내려 했던 절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 (p.202)
17세기 상궁 박씨의 재산 규모
조선 시대 궁녀들은 나름대로 고소득을 올리는 여성 근로자들이었다. 게다가 궁궐에서만 근무한다는 특성으로 지출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먹고 입고 쓰는 웬만한 물품은 궁중에서 다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크게 돈 들어갈 곳이 없었다. 궁궐의 특성상 수완이 좋은 궁녀라면 각종 이권에도 개입할 수 있었다.… (p.204)
궁녀는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혼인을 포기한 전문직 여성들이라 할 수 있다. 돈도 있고 궁궐이라는 배경도 있다.…
궁녀들이 꽃놀이나 뱃놀이를 갈 때 기생은 물론 액정서의 별감이나 각 궁의 남자 종들도 여봐란 듯이 거느리고 다녔다. 게다가 경치 좋은 곳에 재상들이 지어 놓은 정자나 별장에도 거침없이 들어갔다.… (p.205)
지금의 평 단위로 환산하면 집터가 2,000여 평, 논이 3,000여 평, 밭이 4,000평가량 된다. 아무리 상궁이라고 하지만 궁녀가 어디서 돈이 나서 이 정도의 부동산을 구입했을까 의심이 들 정도다.… (p.210)
상궁 박씨가 이번에 매입한 부동산은 밭이었는데, …평으로 환산하면 대략 1,100여 평이다. 이전에 구입했던 부동산과 합치면 상궁 박씨의 부동산은 전체 1만여 평이 넘는 규모다.
그런데 위에서 주목되는 것은 호노 대복의 존재다. 조선 시대 호노는 주인을 대신하여 온갖 사무를 대행하는 남자 종이었다. 상궁 박씨가 이제는 재산을 관리하고 토지를 매입하기 위해 직접 뛰어 다니지 않고 호노를 부리는 것이다.… (p.214)
17세기 상궁 박씨는 최소한 1만여 평의 부동산과 1명의 노비를 소유한 지주였다.… (p.215)
상궁 박씨가 매입했던 집터, 논, 밭 전부를 박상간이란 사람이 방시진에게 판다는 내용이다.…상궁 박씨가 세상을 떠난 후라고 생각된다.…상궁 박씨가 박상간을 자신의 양손주로 들인 후에 재산을 전부 물려준 셈이다.
그러나 박상간은 상궁 박씨가 평생 모은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곧바로 팔아 버렸다. 그것도 상궁 박씨가 총 210량의 정은자를 주고 산 부동산을 반값도 안 되는 90량에 팔아 버렸다. 헐값에 넘긴 것이었다./ (p.216)
조선 시대의 서명
조선 시대에는 관청이나 관료들만 도장을 사용할 수 있었고 개인은 도장을 쓸 수 없었으므로 서명을 쓸 수밖에 없었다.…양반이나 양인들의 서명은 수결이라고 했는데 한문을 휘갈겨 쓴 모습이다. 왕도 이런 서명을 썼다. 이에 비해 노비들의 서명은 좌촌이라고 했다. 한문이 아니라 왼쪽 손가락을 그린 것이었다. 여성들의 서명은 아예 오른쪽 손바닥을 통째로 찍었는데 이것을 우수장이라고 했다.… (p.217)
복장
과거에는 머리 모양으로 아이와 어른을 구별했다. 관례(冠禮)라는 것인데, 남자 어른은 상투를 틀고 여자 어른은 쪽을 쪄 비녀를 꽂/(p.218)
음으로써 아이와 어른 사이의 구별을 쉽게 했다.… (p.219)
어여머리를 한 궁녀는 최고의 예복인 원삼을 입었다. 원삼의 특징은 소매의 넓이가 길다는 점이다.…원삼은 궁녀 중에서도 상궁이나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예복이니 당연히 이 옷을 입은 궁녀는 상궁이리다.
이에 비해 낭자를 한 궁녀는 원삼보다 아래 등급인 당의를 입었다. 당의는 긴 소매의 원삼에 비교한다면 옷소매의 넓이가 훨씬 짧다. 이래서 짜른 당의라고 표현되었다. … (p.222)
그런데 “한양가”에서 궁녀들의 복장으로 묘사된 원삼, 당의는 일상 근무 복장이 아니라 큰 행사에서나 입는 예복이었다. … (p.223)
상궁과 나인들의 기본 근무 복장은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로서 위아/(p.225)
래의 옷 색깔이 달랐다. 옥색의 저고리와 남색의 치마에서 드러나는 색의 대비가 매우 산뜻한 느낌을 준다.
이에 비해 위아래 구분 없이 검푸른 색일 경우에는 산뜻한 색이 대비를 느낄 수 없다. 본래 검푸른 색은 때도 잘 타지 않고 질긴 느낌을 주어 작업복으로 적합하다.…
어른이 되기 전의 아이들, 즉 여자 성인식인 계례 이전의 어린 나인들은 머리를 올리지 않고 길게 땋아 내렸다. 이렇게 땋아 내린 머리끝에는 댕기를
/(p.217)
달았다.…
어린 나인들이 입궁한 지 10-15년 정도 지나면 여자의 성인식인 계례를 행함으로써 머리 모양을 완전히 바꾸었다. 계례란 비녀를 꽂는 의식이란 의미로… (p.228)
그런데 궁녀는 열다섯 살이 아닌 입궁한 지 10-15년이 지난 후에 계례를 행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어른 궁녀로 거듭남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즉 입궁은 궁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므로 그로부터 10-15년이 지난 후에 궁녀로서 성년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계례를 한 이후에는 더 이상 견습 나인으로 간주되지 않고 정식 나인으로 인정받았다.… (p.229)
궁녀의 헤어스타일
약간 과장한다면 왕비의 가체와 비녀에 들어가는 돈이 집 몇 채 값에 해당할 정도였다.… (p.231)
[궁녀의 성과 사랑]
포기된 성, 금지된 성
궁녀가 밖의 사람과 간통하면 남자와 여자는 모두 즉시 참수한다[부대시(不待時)]. 임신한 자는 출산을 기다렸다가 형을 집행한다. 출산 이후 100을 기다/(p.258)
렸다가 형을 집행하는 예를 따르지 않고 즉시 집행한다.
-“속대전” 형전, 간범(姦犯)…
궁녀 중에서도 상궁과 나인 등 정식 궁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방자나 무수리 등 궁녀들의 하녀는 해당되지 않았다. …
방자나 무수리도 간통을 못하도록 했다. 만약 간통하다 발각되면 사형은 아니지만 곤장 100대에 강제 노동 3년이라는 중벌을 받았다.… (p.259)
출궁한 궁녀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했다. … 곤장 100대… 종신직인 궁녀들이 궁궐을 떠나 밖에서 장기간 머무르는 경우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자신이 모시던 주인이 세상을 떠난 경우다. 이런 경우에는 3년상을 지낸 후에 출궁하는 것이 관례였다.
두 번째는 궁녀가 병이 들었을 때다. … (p.261)
다음으로 가뭄이나 홍수 등 자연 재해가 있을 때 궁녀들을 출궁시키거나,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을 때 궁녀들을 출궁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
궁녀들이 출궁할 때는 으레 면천되는데다 근무하면서 상당한 돈을 모아 둔 경우가 많았으므로 먹고살 걱정이 그렇게 절박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돈도 있고 면천된 상태에서 출궁하여 한가하게 집에서 지내다가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p.262)
그런데 조선 시대 출궁한 궁녀들과 간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종친이었다. 종친들은 평소 궁궐에 드나들기 때문에 궁녀들과 잘 알 뿐만 아니라 “경국대전”의 법조항에 ‘조정관료’라고 했으므로 마치 종친은 제외된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성종 때는 ‘종친 및 조정관료’라고 명문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친과 조정 관료들이 출궁한 궁녀들과 일으키는 성 스캔들은 그치지 않았다.…
출궁한 궁녀들의 성을 금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궁중 안의 비밀을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p.263)
그러므로 조선 시대 궁녀는 출궁하기 전에는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출궁한 이후에는 여승이 되어 죽을 때까지 정절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궁녀와 부모 형제의 만남
한 번 입궁한 궁녀는 원칙적으로 평생 궁궐에서 살아야 했다. 게다가 궁녀는 휴가도 없고 사사로운 일로 대궐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부모 형제들이 궁녀를 보러 대궐 안으로 들어오는 건 허락했다. 이를 위해 궁녀의 본가에는 대궐 출입증인 신부를 하나씩 지급했다. 이 신부의 한 면에는 ‘신부(信符)’라 쓰여 있고 다른 면에는 ‘나인 가속(內人 家屬)’이라고 쓰여 있어 궁녀의 친족임을 증명했다.… (p.264)
궁녀들의 동성애
궁녀들이 한 방에서 2,3명씩 함께 생활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궁궐이라는 한정된 공간 때문이었다. 500-600여 명에 이르는 궁녀들에게 각자 방을 주려면 어마어마한 공간이 필요했다.…
다음은 상호 감시를 위해서였다.… (p.272)
마지막으로 궁녀들의 외로움을 달래 주기 위해서였다.…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를 보통 대식이라고 했다.… (p.273)
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한 모범적인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일 밤 독수공방을 했다는 말이다. … 문종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김씨는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압승술(壓勝術)을 행하다가 시아버지 세종에게 적발되었다. 압승술이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일종의 민간 비방이었다. 세종은 …김씨를 곧바로 쫓아내 버렸다.
그러나 김씨가 쫓겨난 후 들어온 봉씨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봉씨는 김씨처럼 압승술을 쓰는 대신 동성애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p.274)
상대자는 자신의 지밀에 있던 소쌍(召雙)이라는 궁녀였다.…(p.275)
큰며느리 봉씨를 그날로 쫓아냈다.… (p.276)
궁중 동료들 간의 스캔들-궁녀와 내시, 별감
궁녀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시의 지휘를 받아 궁중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청소하는 업무 등을 맡았던 것이다. 액정이란 왕의 생활공간을 의미하므로, 이곳에서 근무하는 액정서의 별감들도 자연 내시의 지휘를 받았다. 따라서 궁녀, 내시, 액정서의 별감은 사실상 액정이라는 곳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p.277)
“경국대전”에는 내시의 수가 140명 …많게는 ,60명 적게는 1,20명 정도의 내시가 처소별로 소속되어 있었다.…100여 명 정도의 별감이 존재하는 셈이며, 각 처소별로 10-50명 정도의 별감이 소속되는 셈이다.
즉 왕, 왕비, 대비, 세자 등 각 처소에는 궁녀가 100명, 내시가 50명, 별감이 46명 등 200명 내외의 인원이 배속되기도 하고 적은 경우라고 해도 궁녀가 30명, 내시가 6명, 별감이 10명 등 46명의 인원이 있는 셈이다.
따라서 각 처소별로 소속된 인원들을 지휘, 감독할 사람이 있어야 했다. 게다가 각 처소에는 여성인 궁녀와 남성인 별감이 있었으므로 이들을 지휘하려면 남성과 여성 어느 쪽에도 구애받지 않을 사람들이 필요했다. 거세된 남자, 남자 아닌 남자인 내시들을 궁중에 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p.278)
궁녀의 짝사랑- 귀성군을 사모한 덕중
귀성군 이준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세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세종대왕의 손자로서 세조의 조카였던 것이다.…
세조는 이런 귀성군을 몹시 총애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귀성군 이준을 더더욱 신임하여 “나에게는 문에 귀성군이 있고 무에 홍윤성(洪允成)이 있으니 족히 근심할 것이 없다.”는 말을 즐겨 하곤 했다. 이런 신임으로 귀성/ (p.284)
군은 겨우 열여덟 살에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스물여덟 살에 영의정이 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귀성군에게 편지를 보낸 궁녀는 덕중(德中)이었다. 덕중은 참으로 사연이 많은 궁녀였다.
덕중은 원래 세조의 여자 종이었는데, 세조가 수양대군이었을 때 대군의 눈에 들어 아이까지 낳았다. 이에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덕중을 후궁으로 들여 소용(昭容)에 봉했다.
그런데 덕중이 낳은 아이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게다가 왕이 된 후 세조는 이런저런 일로 바쁘기만 했다. 자연 세조가 덕중을 찾는 일도 뜸해졌다.…외로웠던 덕중은 내시 송중(宋重)에게 마음을 주었다.… (p.285)
내시 송중은 세조에게 있는 그대로 사실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조는 이런 면에서 매우 대범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덕중을 살려 두었다. 다만 소용의 봉작을 취소하고 특별 상궁으로 강등시켜 궁중에서 그대로 살게 했다. 내시 송중도 그대로/(p.286)
궁중에서 일하게 했다.
이런 덕중이 귀성군 이준에게 연모의 정을 품은 것이었다.…
귀성군 이준은 참으로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귀성군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난감했다. 자신을 총애하는 삼촌 세조의 후궁이었던 궁녀가 자신을 사모한다.… (p.287)
귀성군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세조를 찾아갔다.…
세조는 이번에도 대범하게 처신했다.…다만 세조는 경고의 의미로 덕중을 방자로 만들어 버렸다.…세조의 아이를 낳아서 소용까지 올랐던 덕중은 특별 상궁을 거쳐 방자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런데 덕중은 귀성군에게 죽음보다 더 깊은 사랑을 느꼈던 듯하다. 귀성군에게 또 편지를 보냈던 것이었다.…
이번에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세조를 찾았다.
덕중에게 대범한 모습을 보이던 세조도 이번에는 더 이상 그러지 못했다.…
(p.288)
세조는 덕중의 편지를 귀성군에게 전해 준 내시 최호와 김중호를 잡아들이라고 했다.…때려죽이라고 명령했다.…덕중도 죽이라고 명령했다. 덕중은 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준은 옆에 있으면서 황공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왜 황공해 하느냐? 죄는 저들에게 있고 네게 있지 않다.…” (p.289)
궁녀의 죽음과 장례
조선 시대 궁녀는 혼인을 할 수 없으므로 자녀가 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궁녀가 죽더라도 무덤을 돌보거나 제사를 올려줄 후손이 없었다. 이에 대부분의 궁녀들은 죽은 후에 화장을 했다.…
궁말이라는 마을은 출궁한 궁녀들이 모여 살아서 궁말, 즉 궁녀들의 마을이라 불렸다. 서울의 효자동은 내시들이 모여 살던 화자동(火者洞)이 효자동으로 바뀐 것이다. (p.290)
[06.8.14. 원고지 138매 분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