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요약)

만들어진 제3의 성 환 관

거북이3 2006. 10. 5. 16:13
 

만들어진 제3의 성  환  관              

   (미타무라 타이스케 / 하혜자 . 도서출판 나루.1995.정가 5,300원.277p.)

                                                                            이   웅   재  요약

  '왕의 남자'와 ‘왕의 여자(궁녀)’에 이어 이번에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환관에 대한 글을 요약 소개한다.

 환관에 대하여 ‘책머리에’에서 옮긴이는 말한다.

 “환관은 중국에만 있었던 특이한 존재가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멀리 이집트, 그리이스, 로마, 터어키 등지에서 동쪽으로는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에서부터 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에 걸쳐서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환관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나라로는 중국을 꼽는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주로 중국의 역대 환관에 대한 서술로 일관했는데, 이 점이  아쉽다. 한 마디로 번역서로서의 단점으로 우리나라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이 불만인 것이다. 아울러 번역문의 매끄럽지 못한 표현도 이 책을 읽기 지루하게 만들어 주는 면이라서 역시 불만족스럽다. 해서 요약함에 있어서는 역대의 환관에 대한 장황한 서술은 가급적 생략하고 환관 일반론에 해당하는 면을 주로 다루었다.

 옮긴이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일본의 경우, 환관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논문은 1923년에 마이니찌신문에 게재된 시와바라(桑原騭藏) 박사의 《중국의 환관》이 그 최초였다.…

 1924년 가을, 청조 최후의 황제였던 선통제(宣統帝)가 북경의 황거 자금성을 떠날 때, 그날 4백7십 명의 환관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궁중에서 떠남으로써 중국 환관의 장구한 역사에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일본에는 환관제도가 없었던 점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일본 학자들은 자국에 환관제도가 없었음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도 일면 아쉬워하는 점도 있다.”      (*騭 : 수말 즐, 馬부 10획. 수말, 말을 부르다, 오르다.)

                                       (pp.5-8.)        

환관, 그 불가해한 존재

환관이라고 하는 어휘는, 단순하게 거세된 남성을 가리키는 경우와 궁정에서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2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전자의 의미로서 중국에서는 정신(淨身:더럽혀지지 않은 몸)이라든가 사백(私白), 또는 무명백(無名白:관직이 없는 민간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서양에서는 그리이스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 영어의 유우너크(eunuch)가 여기에 해당되며, 성경에도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제 19장 12절을 보면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자(鼓子) 또는 엄인(閹人)이라는 말은 환관과 같은 뜻으로, 엄인은 한어(漢語)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 성서의 구절에서 흥미로운 점은, 우선 천국에 헌신하기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자궁(自宮)’이라고 한다.            (p.17.)

 중국에서는 환관이라는 말 외에 엄인(閹人) 또는 시인(寺人)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말은 원래 주(周) 나라의 제도를 기록하였다고 하는 《주례(周禮)》에 나오는 것으로, 엄인은 왕궁을 수호하는 사람, 시인은 왕의 첩이나 궁형(宮刑)을 받은 여관(女官)을 감독하는 사람이라 설명하고 있다.  (p.20.)

 

환관의 기원

 갑골문의 이 부분은 바로 은왕조의 무정왕(武丁王)이 체포한 강나라 사람을 환관으로 만들고자 신에게 물어봤던 것이라고 한다.…

   (*강[羌]은 은왕조 서쪽에 위치했던 오늘날의 티벳종족을 가리킨다.)

 무정왕의 시대는 기원전 1천3백년 경에 해당하므로 일찍이 기원전 14세기에 환관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되며, 지금의 단계에/선 이 내용이 문헌에 의한 환관의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해도 좋다.…

 중국은 거의 4천 년에 걸쳐서 환관의 역사를 지녀온 셈이다. (pp.22-23.)


거세의 방법

고대 이집트에서는 승려들이 수술을 맡았는데, 가늘고 강한 털실로 성기 전체를 묶은 다음, 예리한 면도칼로 잡아맨 부분의 그 앞쪽을 잘라냈다고 한다. 출혈은 재나 뜨거운 기름을 이용하여 멈추게 했고, 또 요도에는 금속성의 막대를 삽입하였다. 그 다음에 배꼽 부분까지 뜨거운 모래를 덮어놓은 채 그대로 5,6일을 방치해 두었다. 이러한 난폭한 방법에 의해 사망률이 거의 60%에 이르렀다고 한다.

 남인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기술은 다소 진전되었다. 우선 도기(陶器) 의자에 앉혀놓은 다음 수술을 하기 전에 아편을 복용시켜 마취상태를 만든다. 그런 다음 성기에 대나무 조각을 끼워 넣고는 면도칼로 대나무를  따라서 미끄러지듯 하여 절단을 했다. 상처자리에는 뜨거운 종유(種油)를 붓고 나서 기름을 흠뻑 적신 천으로 싸맸다. 피수술자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잠이 든 상태가 되는데 이때 우유를 먹여 영양을 공급시켰다. 거의 실패하는 일 없이 상처가 아물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 1870-80년대에 북경에서 취재를 했던 영국인 스탠드의 귀중한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자금성의 서문인 서화문을 막 나서면 ‘창자(廠子: 헛간)’라 부르는 초라한 작은 집이 있다. 여기가 수술실이다. 이곳에는 ‘도자장(刀子匠:집도인)’이라 부르는, 급료는 없었으나 정부가 공인한 전문가가 몇 사람 있었다. 그들은 환관을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수술료는 한 사람 앞에 은 6량이며 완전히 치유될 때까지 책임을 진다. 원래부터 자궁을 하러 오는 사람은 가난하여 도저히 즉석에서 수술료를 지불할 수 없는 사람이 많았기에 도자장과 상담을 하여 훗날 급료를 받아 지불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신허보증인(身許保證人)이 없으면 도자장은 수술을 하지 않는다.

 도자장에게는 여러 명의 도제(徒弟)가 따라붙어서 그 기술을 습득했다. 때문에 이 직업은 말하자면 몇몇 가족이 세습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다.

 수술을 받을 사람은 항(伉:온돌)에 반쯤 누운 자세로 하여 앉는다. 그러면 조수 한 사람이 그 사람의 허리를 잡고, 다른 두 사람은 다리를 각각 힘주어 잡는다. 여기에 칼을 든 집도자가 자궁 지원자 앞에 서서 ‘후회하지 않겠는가’ 하고 다짐을 한다.

 수술 방법은 우선 하얀 끈 또는 붕대로 피수술자의 하복부와 넓적다리의 윗부분을 단단히 묶는다. 한편 양물(陽物)의 절단할 부분 근처를 뜨거운 후추탕으로 세 번에 걸쳐 조심스레 세척을 하고는 낫 모양으로 휘어진 작은 칼을 이용하여 양근과 음낭을 동시에 잘라낸다. 그 다음에/ 납침 또는 나무못을 요도에 삽입하고 상처 자리는 냉수에 적신 종이로 조심스럽게 감싸놓는다. 이것이 끝나면 두 명의 집도자는 피수술자를 부축하고 2,3시간 가량 방안에서 걷게 한 다음 길게 눕도록 허락한다.

 수술 후 3일 동안은 물을 못 마시게 하는데 이는 갈증과 상처의 고통 때문이며, 이 기간에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고 한다. 3일이 지나서 요도에 삽입했던 나무못을 뽑으면 분수처럼 방뇨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성공을 뜻하며 이어서 축하를 받게 된다. 그렇지 않을 때엔 눈앞에 다가온 죽음으로 고민할 따름이다. 이미 그 사람을 구원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이처럼 난폭한 방법도 거의 실패하는 일은 없었으며, 스탠드가 오랜 기간의 수술자료를 조사한 결과 30세의 남자 한 명이 사망했을 뿐이라고 한다.

 수술 후 100일 가량이 지나면 대개 상처가 아물게 되고 그 후 왕부(王府)로 옮겨져 환관의 실무를 습득한다. 그리고 1년을 마치면 궁성으로 들어가 새로운 직책을 부여받는다.

절단된 대물(代物)의 처리에 대해서 스탠드는 기기괴괴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이 대물을 ‘보물’이라 부르는데, 도자장은 대물에 어떤 종류의 가공 처리를 한 다음 3홉 정도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용기에 넣고 밀봉을 하여 높은 선반에 안치해 놓는다. 이것을 고승(高勝: 높은 지위로 승진하라는 뜻)이라 부른다. 다시 말하여 대물의 소유자가 높은 지위에 있다는 의미이며, 한편으로는 출세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대물의 원주인이나 친척이 반환을 요구해오면 ‘보물’을 내어준다. 그러면 그들 또한 마찬가지로 최대로 정성을 다하여 ‘고승’을 해놓고 출세를 기원한다.

 이렇게 ‘보물’을 보존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환관이 되어 계급이 높아질 때에 이 ‘보물’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승진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 검사를 ‘험보(驗/寶)’라고 하며 환관장이 담당을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험보’가 도자장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원래 ‘보물’의 소유권은 당연히 피수술자에게 있건만, 수술을 받을 당시에는 여기까지 관심을 쏟지 않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부주의로 자신의 ‘보물’을 요구하는 것을 무심코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되어져 ‘보물’은 도자장의 소유물로 돌아가 버린다. 세월이 지나서 승진을 하게 되었을 때에 ‘보물’이 없는 사람은 크게 당황하여 도자장에게로 달려오기 마련이다. 이때 ‘보물’은 타인의 것이라도 상관이 없으며, 그 금액은 고액인 경우 은 50량에 달한다. 하기는 자신의 소유 물건이라 해도 잃어버리거나 도둑맞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에도 도자장에게 ‘보물’을 사거나 때로는 친구로부터 빌리기도 하며, 임차(賃借)도 한다. 완벽하게 글자 그대로 ‘보물’의 가치를 발휘하는 셈이다.

두 번째 이유는 환관이 죽은 뒤 관 속에 이 ‘보물’을 넣고 매장하기 위해서이다. 이 경우에도 대용품이 용납된ㄴ다. 이것은 환관들이 저 세상으로 떠나갈 때엔 본래의 남성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불구자라는 사실을 극도로 두려워하였으며 ‘윤왕(閏王)’ 즉 저승의 왕이 ‘보물’이 없는 사람은 내세에서 암노새로 출생시킨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에 윤왕의 눈을 속여사라도 이러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고문헌에는 거세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당(唐)나라 현종 때 큰 반란을 일으켰던 유명한 안록산(安祿山)이 스스로 환관을 만들었다는 기사가 당의 역사를 전해 주는 《구당서(舊唐書)》에 실려 있으므로 그 내용을 소개한다.

 몽고민족에 속하는 글안족으로 당시 12,3세였던 이저아(李猪兒)라/는 자가 안록산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보통을 뛰어넘는 지독히 교활한 남자였다. 어느 날 안록산은 칼을 휘둘러 이저아를 완전 거세시켰는데, 이때 출혈이 몇 되에 달했으며, 이저아는 가사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뜨거운 재로 치료를 하였더니 이저아는 만 하루가 지나서 소생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 남자를 환관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이후로 안록산이 가장 총애를 하여 둘도 없는 측근이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난 후에는 점차로 불완전 거세인 음낭만을 제거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거세를 하면 특유한 생리적 변화가 일어난다. 예컨대 환관이라 불려지는 기묘한 존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pp.24-28.)


환관의 생태

 스탠드의 보고를 기초로 하여 환관의 생태를 살펴보자.

 우선 복장과 용모 등.

 환관은 ‘포자(袍子)’라고 하는 회색의 긴 상의에 그 위에는 ‘괘자(掛子)’라고 하는 진한 감색의 짧은 겉옷을 걸치고, 검정색의 바지를 착용하여 수수한 색깔로 복장을 한다. 그리고 환관 모자를 쓴다. 걸을 때에는 상반신을 약간 앞으로 구부리고 종종걸음으로 걷기 때문에/ 먼 거리에서 보아도 환관임을 금방 알아낼 정도로 특징적이다.

 환관은 전반적으로 기분 나쁜 분위기의 용모를 하고 있으며, 젊고 미모를 지녔다고 한다면 그 여성다운 행동은 실제로 젊은 여자가 남장을 한 것으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측은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변모하여 연령이나 성을 망각한, 그야말로 남자옷으로 가장을 한 노부인의 모습 그대로가 된다. 길거리에서 돌연 나이 든 환관과 마주치면 노부인과 전연 구별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환관에는 중년부터 된 사람과 유년에 시작한 사람이 있으며, 전자를 ‘정(淨․ 貞: 불결하지 않은 몸)’이라 하는데 반해 후자를 ‘통정(通貞: 생애순결)’이라 한다. 후궁의 부인들은 ‘통정’을 좋아한다. 기 경우에 그들은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며, 다만 젊은 여성처럼 행동할 뿐이다.…

 수술을 받은 환관은 모두 자신이 본래부터 갖고 있었던 음성을 상실한다. 특히 어린 나이에 거세를 당하면 젊은 여성의 음성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성인이 된 후에 수술을 받은 경우, 매우 귀에 거슬리는 가성(假聲)이 된다.…

 수염이 없는 것 또한 환관의 특징이다.…

 조금은 빗나간 이야기가 되겠는데, 나이가 젊은 환관은 거세를 한 후에도 오랫동안 침대에서 음액(陰液)을 흘렸다고 한다. 이런 습관은 수술 당시에는 관대하게 봐주지만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엄한 징벌이 가해진다. 그들 자신이 그러한 습관을 파기하든지 아니면 자연스레 없어질 때까지 이 습관은 계속된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참을 수 없을 만큼의 나쁜 냄새를 가리켜 ‘노공(老公: 환관)과 같은 비린내가 난다’고 표현을 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중국인에게 물어보면 환관은 반리(半里: 약 300m) 전방에서부터 비린내가 난다고 한다.

 젊어서 거세를 한 환관은 뚱뚱하게 살이 찐다. 그러나 살은 매우 부드럽고 느슨하다. 물론 힘도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환관들은 나이가 들면서 살은 빠지고 급격히 많은 주름이 생긴다. … 40세인데도 60세 정도로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육체의 변화에 따라 성격에도 변화가 생긴다. 지극히 하찮은 일에도 쉽게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또 무턱대고 화를 낸다. 그래서 화가 났는가 하면 이번엔 즉각 기분이 좋아진다.…

 한편 유아거세자는 어렸을 때 자신의 의지가 확고하지 않았던 상태에서 거세를 당했기 때문에…/ 성불능이나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은 부친을 예외 없이 증오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친에게는 효성심을 발휘하며 강한 애정을 나타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환관은 단결심이 대단히 강한 경향이 있으며,…

 대체로 환관들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의미가 포함된 말에 대하여 비상하게 모욕감을 느낀다.…

 절단이라는 말을 할 때도 거세의 의미가 있는 할(割)이라는 어휘는 쓰지/않으며, 동의어인 자(刺)를 사용한다.

 또 그들은 예외 없이 아편을 흡입한다. 아편의 흡입은 청조(淸朝)가 되면서 생겨난 습관이다.…

 게다가 환관은 모두 도박을 하면서 여가를 보냈으며 환관에게 있어 도박은 최대의 향락이었다.

 그런데 환관에게도 소박한 미덕이 있다. 우선 그들은 대단히 정직하여 도둑질을 했다는 예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그들 성격의 일면에는 자비심도 가득하여 납득할 만한 일이라면 가난한 사람에게 약간의 돈을 의연금으로 내놓기도 한다. 한편 단골로 이용하는 소상인에게는 매우 인기가 높았다. 보통 중국인들과는 달리 값을 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습성을 알고 있는 상인이나 직인들이 ‘손님 마음대로 정하셔도 괜찮습니다’ 하고 말하면 하찮은 물건에도 선심을 잘 썼고 작은 물건을 사고 나서는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다.…        (pp.30-34.)


군주의 그림자, 환관

 인간은 그 누구라도 선과 악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별난 성격, 이를테면 대선인(大善人)과 대악인(大惡人)이 공존하는 지점에 군주의 성격은 존재하며, 이를 광범위하게 독재자로 통칭하게 된다. 그들은 일단 군주가 되면 자기의 위치를 넘보는 자는 의심에 찬 눈으로 일관하여 그 자식과 형제들, 나아가 육친의 전부를 예외 없이 살해하고 추방시킨다. 이러한 비정함과 고독감은 군주가 되기 위해선 빼어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이들은 이미 보통 인간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와 본질적으로 걸맞는 사람은 바로 비인간적인 환관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10세기경 광동성(廣東省)에 있었던 환관왕국의 형태를 갖춘 남한(南漢)의 군주가 말하기를 ‘모든 신하들은 예외 없이 가정이 있으니 마땅히 자신의 자손들에 대하여 심려를 한다. 그렇다면 언제나 함께 지내는 환관만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라 하였다.      (pp.47-48.)


 환관의 공급원

 중국의 경우 시와바라(桑原) 박사의 추정에 의하면 많았을 때는 1만 2,3천 명, 적었을 경우에도 3천 명은 되었다고 한다.…

명(明)나라 말기에 관한 기록을 보면 여관(女官)이 9천 명에 환관은 10만 명을 넘었는데 이들 중에는 제대로 음식물을 제공받지 못하여 굶어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궁정의 비밀보호를 위해서라든가 혹은 외부로부터 음모의 손길이 뻗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로 이민족을 환관으로 사용했던 방법은 어느 시대에나 원칙적으로 통용되었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당시, 양귀비와 함께 중심 역할을 했던 환관 고력사(高力士)는 광동(廣東) 남부의 만료족(蠻療族) 출신이었다. 이 지역의 군사령관이 거세한 2명의 아동에게 ‘금강(金剛)’․ ‘력사(力士)’라는, 조금은 장난기 어린 이름을 붙여 궁정에 들여보냈는데 그 중 력사라는 아동이 매우 총명하여 측천무후로부터 등용된 것이 그의 출세의 발단이 되었다.

원조(元朝) 시대에는 고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특히 고려 출신의 황후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고려국에서 많은 환관이 징발되었다. 그 중에는 박불화(朴不花)처럼 권세를 누린 자도 있었다. 명(明)나라에서는 색다른 음식을  즐겨 먹었던 영락제(永樂帝)가 퉁그스계의 여진인을 후비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여진인 환관을 사용했다. 또, 영종(英宗) 때에는 귀주(貴州) 지방에 거주하던 묘족(苗族)의 아이를 1천5백65명이나 거세를 했는데 이 중에 3백29명이 병사를 하여 다시금 그 숫자만큼의 환관을 사서 보충을 했다. 또 운남(雲南)을 정복하고 나서도 많은 환관을 만들었다.…

 이들 만적(蠻賊)들이 뒷날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 종족을 멸절시키기 위한 일이었다고 대답한 자들도 있었다니 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한 잔인한 행위인가?

 환관의 보급은 줄어들기는커녕 그대로 흐지부지되어 장군들까지도 비밀리에 환관을 자신의 사용물로 쓸 정도였다고 한다./

 환관의 공급 문제는 대체로 보아 시대가 흐름에 따라 황제의 평화주의가 부각되었거나 또는 타민족과의 마찰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점차 줄어들어 피정복자를 환관으로 만든 경우는 극히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pp.49-51.)


궁형

 또 다른 환관의 공급원은 궁형이라 하는 육체적 형벌이었다.…

《서경(書經)》에 의하면 오형이란 문신, 코자르기, 다리절단, 거세, 사형을 가리킨다. 이 중에서 궁형이 거세를 지칭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궁(宮)은 성기를 의미한다. 한편 이 형벌을 음형(淫刑)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원칙적으로는 남녀가 불의(不義)를 범했을 경우에 적용된다. 따라서 5형(五刑) 중에 이 궁형만은 당연히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형벌의 방법이 서로 달랐다.

 불의라는 의미는 보편적으로 일컫는 불의밀통(不義密通)과는 성격이 다른, 정식으로 결혼절차를 밟지 않은 남녀의 관계를 말한다. 정식 결혼절차를 육례라 하며, 중매인 앞에서 결납(結納)에서 거식(擧式)까/지의 절차를 치르는 것으로, 오늘날에는 황실에서만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혼례를 올린다. 주(周)나라 때는 봉건적 신분사회였으므로 왕, 제후, 사대부 등의 지배계급은 모두 육례의 절차를 따랐다. 이를 무시하면 불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예(禮)는 서민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며, 서민의 결혼은 통틀어서 ‘야합(野合)’이라 불려졌다. 따라서 불의가 성립되지 않았다.

 즉 다시 말해 궁형을 받는 사람은 왕족이나 제후, 사대부 등의 귀족계급에 국한되는 것이었다. 궁형은, 남자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이 거세를 하였고 여자에게는 형벌로써 평생을 궁정 안에 감금하여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남자와 비교하면 다소 적합하지 않은 느낌이 드는데 그런 때문인지 중국의 학자들 간에도 이설이 있다. 여자의 신체 어느 부위라든가 근육을 베에냈다고도 하며, 가슴과 배를 때리거나 또는 기괴한 방법으로 정자(精子)가 들어가는 통로를 막았다고도 한다.…

 한(漢)의…문제(文帝)의 뒤를 이은 경제(景帝)는 조칙(詔勅)을 내려 사형을 받게 된 사람도 본인의 희망에 따라 부형(腐刑)을 허락하도록 하였다. 부형이란 궁형의 다른 명칭이다. 이 어원이 만들어진 이유는, 상처가 부패할 때 나는 냄새에서 기인하였다고도 하며, 또는 남자가 거세를 당하여 자손이 끊어진 상태를 이를테/면 썩은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데 비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등 각기 다른 견해가 있다.…

 호기(豪氣)로 일관됐던 무제(武帝)는,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 일컫는 사마천(司馬遷),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의 명인 이연년(李延年), 어부대사(부재상)를 아버지로 하고 현관(顯官)을 동생으로 두었던 장하(張賀), 드디어는 저 누란의 왕자 등 불세출의 영재나 귀인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차례차례 잠실(蠶室)로 내려보내 환관으로 만들어 버렸다.…

 궁형은 일단 수(隋)나라에 와서는 표면상 종지부를 찍는다.   (pp.52-54.)


환관의 특산지

당조(唐朝)에서는 환관의 공급원에 대하여 유사 이래 처음이라 할 만큼 일대 변혁을 꾀하였다. 매년 각 지방에 명하여 사백(私白) 즉, 민간인으로서 일찍이 거세시킨 사람을 헌상하도록 하였다. 이때까지의 환관은 비록 예외가 있기는 해도 우선 표면상으로는 이민족의 피정복자라든지 범죄자 등이었다. 그런데 당(唐)에서는 이러한 배경과는 관계없이 지방관의 책임 하에 또 인민이 부담을 지고서 환관을 바치도록 하였다.…/

인종의 견본시장으로 성시를 이루었던 광동지방이 당조(唐朝)의 요청과 이슬람교도의 진출, 나아가 인신매매업자의 암약과 더불어 환관의 본거지로 되었음은 또한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唐)의 말기에는 이 지역에 환관왕국인 남한국(南漢國)이 수립되었다. 이 왕국의 건설자는 남해 무역상인이었는데, 그의 자손들은 철저한 환관 신용자였다. 특히 마지막 왕은 국정 일체를 환관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시녀와 아라비아 여자, 혹은 후궁들과의 음희(淫戱)에 빠져 지냈다. 그리고 가신들 중에서 유능한 자, 또는 문관시험의 우등자 등 국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은 미리부터 거세를 하여 채용했던 점으로 보아 환관의 숫자는 짐작할 만하다. …실제로 환관은 2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영남 출신의 환관으로 유명한 사람은 고력사(高力士) 정도인데 비하여 또 하나의 대량 공급지였던 복건에서는 당조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수많은 거두가 등장하여 복건 환관의 위명을 천하에 떨쳤다. 나아가 당의 말기로부터 명에 이르기까지 환관의 전통은 굳게 지속되었다.…

 환관이 되는 것과 환관으로서 출세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환관은 관료와는 달라서 특별한 학문이라든가 행정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능력은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한다. 환관으로서 선택되는 기준은 무엇보다도 용모이다. 환관의 이상형은 젊은 미남에 행동은 세련되고 말투는 확실한 가운데 미성이어야 하며, 더욱이 주어진 상황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요령이 필요하다. 음풍(淫風)으로 가득찼던 당나라의 후궁에서 환관은 무엇보다도 여형적(女形的) 존재였음을 상기해도 좋으리라.…

복건 출신의 환관이 두각을 나타냈던 원인 중의 하나로 그들이 발군의 여형적 기량을 갖추고 있었음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복건은 또한 남색의 본거지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상의 사람을 계형(契兄), 연소자를 계제(契弟)라 부르는데, 계형이 계제의 집으로 방문하면 집안 내의 사람들은 신랑이 온 것처럼 대환영을 한다. 계제가 훗날 결혼을 하면 계형이 그 비용을 지불한다. 복건에서는 계제가 은밀히 다른 남자와 불의를 맺는 일을 의미하는 ‘기(㚻...밭전 자 아래 겨집녀 자)’라는 기묘한 문자가 특별히 고안될 정도였다.…                              (pp.55-59.)


환관 지망자의 범람

 명나라는 건국 초기에 자궁 금지령을 발표했다.…《회전(會典)》에는 자궁을 불효죄의 명목으로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리하여 명(明)에서는 자궁은 반역죄와 같은 비중으로 처리하여 자궁자는 사형으로 다스렸고, 그 일족이나 정에 이끌려 은닉해준 자, 이웃의 조장(組長), 촌장(村長)도 모두 벌을 받았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일례로 명나라 중기에 해당하는 정덕(正德) 초기에 자궁의 실상을 기록한 《황명실록》…‘오늘날 환관은 황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권세를 장악했고 그 위광은 구족(九族)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를 보고 우민(愚民)은 다투어 자기 자식이나 손자를 거세하여 부귀를 꿈꾸고 있다./ 그 수는 한 마을에서 수백 명을 헤아릴 정도이며, 제아무리 엄금을 하여도 근절되지 않는다.’라고 했다.…정부의 …발표가 이 정도였으니,…

 《황명실록》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편에서는 엄금을 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자궁자를 환관으로 등용했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명말 천계(天啓) 3년에 환관의 결원으로 3천 명을 모집하려 했을 때 응모자가 2만여 명에 달했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예정인원에서 1천5백 명을 증원한 4천5백 명을 채용했다.…

 정덕(正德)년간, 북경 주변의 거주자 중에서 채용되지 못한 자궁자 3천5백여 명은 연명(連名)으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정부에서 수용해줄 것을 호소했다. 정부는 그들을 수용할 장소로 북경 교외의 남원(南苑)을 지정했다.…

 북경 교외에서 하북 남부의 하간(河間) 지방으로 이어지는 일대에는 실업자궁자의 무리가 수십 명씩 떼를 지어 통행하는 여행자에게 걸식행위를 하더니 마침내는 강제로 사람들을 말에서 끌어내리고는 노상강도로 돌변하기가 일쑤였다.…/

 청조(淸朝)에서도 환관이 사용되었으나 숫자에 있어서는 도저히 명나라에 비할 정도가 못 된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에 권세를 장악했던 서태후(西太后) 시대가 되면 환관사상 최후로 꽃을 피우게 된다.

 스탠드는 이 시기의 환관에 관하여 보고하기를, 자궁자의 7․ 8할은 유아 때에 부모나 친척이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또는 노후를 대비하여 저축을 하듯이 거세를 했다고 한다.…/

 어느 가난한 남자가 전당포에 가서 자기의 상의를 저당으로 하여 약간의 금액을 요구하자 주인은 말도 안 된다고 거절을 했다.

 화가 난 남자는 느닷없이 작은 칼을 꺼내더니 그 자리에서 자신의 양물(陽物)을 절단하여 계산대 위로 내던지고는 그것을 저당잡고 은 3냥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경악한 전당포 주인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다. 그 결과 이 남자는 절에 이송되어 충분히 치료를 받은 뒤 왕부(王府)에 취직이 되었다고 한다.…                                 (pp.63-67.)


120명의 후비

 고염무는 환관의 폐해를 논하면서, 결국 환관이 세력을 떨치게 된 배경에는 후궁에 비(妃)의 숫자가 많았던 때문이며, 군주가 환관을 가까이 두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여색을 멀리하는 것이 근본원칙이라 말하였다.…

 원래 고염무라는 사람은 본처를 고향에 남겨둔 채 서적을 3대의 마차에 싣고 천하를 방랑했다고 하는 중국적 독신주의자였다.…/

 당(唐) 재상 두우(杜佑)가 저술한 《통전(通典)》에 의하면 황제에게는 제곡(帝嚳)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당시에 제좌(帝座)를 둘러싸고 있다는 네 개의 후비성(后妃星)을 본따 네 명의 비를 두었으며, 그 중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별을 상징하여 정비(正妃)를 두었고 나머지 세 명을 차비(次妃)로 하였다.…

 이슬람교에서도 4명의 아내를 갖도록 교리로 규정해 놓았음을 상기해 볼 때 동서를 가리지 않고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우선 그들이 ‘4’라는 숫자를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수(數)로 믿었음을 들 수 있다. 또한 ‘4’에다 황제를 포함시켜 ‘5’가 되면 5 또한 마찬가지로 성수(聖數)라 하였으며, 이는 우주 전체를 표방하는 신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

 성인황제 순(舜)은 즉위하기 전에 평범한 농부로서 이미 아내를 맞아들인 상태였는데, 이 사실을 다시금 하늘에 아뢰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정비(正妃)를 맞아들이지 않고, 3명의 비(妃)만을 두었다.

 오제시대가 끝나고 하(夏)왕조로 바뀌게 되면 이 제도를 대신하는 기묘한 계산법이 등장하여 후비의 수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순(舜)시대의 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3․ 3은 9가 되므로 새로운 방식으로써 후비를 9명으로 늘렸고, 여기에 처음에 있던 3명의 후비를 포함하여 12명으로 정하도록 하였다.…/

 은(殷)왕조가 되면 후비의 숫자는 다시금 불어난다. 앞의 예에서와 같은 계산법에 의하여 3․ 9는 27이므로 후비는 27명으로 늘어나며, 여기에 그 이전에 정해져 있던 12명을 포함하여 모두 39명의 부인을 두도록 하였다.…

주(周)나라로 가면 후비의 숫자는 더욱더 불어나서 은왕조 당시 3․ 9는 27의 27명이 3조를 이루어 81명이 되며 여기에 이전의 39명을 포함하여 합계 120명이 된다.…

 성인 주공(周公)이 저술한 《주례(周禮)》에서는 이러한 등급의 내역을 ‘후(后) 1인, 부인(夫人) 2인, 구빈(九嬪) 9인, 세부(世婦) 27인, 여어(女御) 81인’이라 기록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설명한 후비제도는 확실하게 역사적 사실로 존재했던 내용은 아니며, 한(漢)나라 시대의 예학자가 그럴 듯하게 정리체계를 / 갖추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당나라 때에는 후비제도를 고대 성왕(聖王)이 남긴 제도로 인정하여 명칭은 달랐어도 120명의 후비를 현실로써 받아들였기 때문에 결코 무시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중국의 황제는 제도상 120명의 후비들과 침대를 함께 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유명한 당나라의 현종(玄宗) 때에는 후궁 수천 명이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어 경쟁을 하였다는데, 일설에 의하면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의 후비를 합쳐 4만 명에 이르렀다 하니…

 현종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어서 마침내는 아들인 수왕(壽王)의 비를 차지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양귀비(楊貴妃)이다.…                                       (pp.71-76.)


부도(婦道)

부도(婦道)는 대체로 보아 유교가 국교화된 것과 같은 시기인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전에는 부인의 정절이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다. ‘부친 한 사람을 제외한 그밖의 남성은 모두 남편이다’라고 할 만큼 개방적인 사상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p.81.)


공처가(恐妻家)의 탄생

 공처가의 발생은 10세기 이후가 된다. 당나라 마지막 황제를 살해하고 오대(五代)에서 최초로 후량(後梁)을 창시한 염적(塩賊: 소금을 판매하는 비적) 출신의 주전충(朱全忠)은 아내 장씨 앞에서는 머리를 들지도 못했다.… 주전충의 다음으로 후당(後唐)의 태조가 된 터어/키 종족 출신의 이극용(李克用)은 아내 유씨를 극진히 공경하였고 국가의 대사는 모두 아내와 상담하였다고 한다. 이 사람들을 공처가의 원조로 볼 수 있다.…

 남성이 다시 여성을 봉쇄하고자 했던 반격작전…/ 그 하나로 전족(纏足)을 들 수 있다.…

 이 기묘한 풍습은 보편적으로 말하여 10세기경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대(五代) 시대 남당(南唐)의 관능적인 시인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군주 이욱(李煜)이 미희(美姬)에게 명하여 비단으로 발을 싸매고는 진귀한 보석으로 장식한 황금 연화대(蓮花台)에서 춤을 추게 한 것이 그 발단이 되었으며 그 후로는 전족을 한 발을 미화하여 금련(金蓮) 또는 서연(瑞蓮)이라 부르게 되었다. …

 임어당은 말하기를 전족은 본질적으로 완벽한 성적인 의미를 지녔으며, 그리하여 남성들은  위태스럽게 걸어가는 여성의 보행 자태에서 말할 수 없는 성적인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한편 여성은 전족으로써 남성을 현혹시키고자 매우 열심이었다고 한다.…/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이라고 하면 왜구를 평정하여 그의 위명을 천하에 떨친 명장이자 병법가이다. 또한 그는 흔하지 않은 공처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척장군을 능가하면 했지 결코 뒤지지 않았던 공처가로는 근세의 대사상가이자 군사전략가였던 왕양명(王陽明)을 들 수 있다.…/

 이해타산이 빠른 중국인 중에서 중국적 풍속을 기화로 삼아 돈을 잔뜩 모은 사람으로는 양주(揚州)의 첩업자(妾業者)를 빼놓을 수 없다. 명나라 때의 첩은 양주 출신이 많았다. 그 이유로 양주에는 눈에 띠는 미인은 적었으나 수질이 좋았던 때문인지 참하고 부드러운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곳에서는 딸아이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고는 오로지 본처를 잘 섬기도록 교육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대가(大家)의 질투심 강한 부인도 양주 출신의 첩에게는 부족한 점이 있어도 너그러이 봐주었던 것이 원인이 되어 대량으로 매매되어졌다고 한다.

 공처가로 상징되고 있는 명나라 관료의 기질은 엄밀히 분석해보면 태반이 이기적인 출세주의자들이라 간주해도 틀림이 없다.…    (pp.82-87.)


자금성(紫禁城)의 내부구조

정식 거주자는 가장이 되는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책봉받지 않은 황자들로 ‘남성’은 이들뿐이다. 그러나 황자들도 왕호를 수여받으면, 예외 없이 저택을 하사하여 지방 도시로 쫓아낸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후비와 여관, 환관들이다. 내각대학사가 황제를  대면한다 하지만 그것도 한정된 날짜와 시간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황제의 공사(公私)에 걸친 다양한 용무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함께 기거하는 한관이 수행하게 되므로 그들이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환관을 내신이라 하고 관료를 외신이라고 불렀던 차별어…/                                   (p.91.)


환관의 직무

옥쇄는 모두 여관(女官)이 보관하고 있다.…/         (p.97.)

 명나라 때에는 화기만은 환관이 취급하도록 하였으며 전쟁이 일어나면 화약군(火藥軍)은 일반 군대가 아니라 환관이 통솔했다. 이는 명나라 조정이 환관을 신용하고 중요시했던 하나의 예이다.…

 〈완의국(浣衣局)〉…이 관청 건물만은 황성 내에 두지 않았으며,…이곳에는 연로한 여관(女官)들, 또는 죄를 짓고 해직된 사람들을 묵게 하였다. 이를테면 쓸모가 없는 사람들을 죽을 때까지 돌봐주는 장소이다. …관녀(官女)를 죽을 때까지 가두어 놓고서 돌봐주는 이유는 오로지 궁정 내부의 비사가 외부로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살펴본 대로 광대한 자금성은 인민의 세계와는 격리된 별천지였으며 그곳에 거주하는 무수한 환관들은 제왕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제작하였고, 연출하며 운영해왔던 상황을 알게 된다. 환관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직은 12감의 우두머리인 태감(太監)이며, 이는 정 4품의 관직으로서 외성(外省)과 비교하면 각 성의 차관에 버금가는 고위직이다. 영양실조에 걸린 빈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결국에는 방탕자, 무뢰한, 범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높은 지위까지 임명을 받게 된 것이다.…                                             (pp.100-101.)



경사방태감(敬事房太監)

안록산이 총애했던 환관으로 이저아(李猪兒)가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밝혔다. 그 안록산이 만년에 이르러서는 대단히 비만해져서, 몸무게는 3백3십 근(1백95킬로그램)에 달했고 올챙이배는 무릎까지 늘어졌다. 그가 허리띠를 맬 때는 3,4명의 시중이 거들어주어야 했는데, 그 중 두 사람이 그 거대한 배를 들어올리면 환관 이저아가 머리로 그 배를 떠받치는데, 그 사이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고 한다. 또한 안록산은 현종으로부터 청화궁(淸華宮)의 온천에서 목욕을 해도 좋다는 영광을 입었는데, 이때 수행원 가운데 의복을 입혀주는 일을 이저아가 맡았다. 간웅 안록산이 이저아에게 심신을 완전히 맡기고 신뢰를 다했던 상태가 결국에는 어떻게 되었던가. 훗날 안록산은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아들 경서(慶緖)의 꼬임에 빠진 이저아에 의해 그 거대한 배에 칼이 찔려 죽었다.…

명나라에서는 황제의 규방문제를 담당하는 기구를 경사방(敬事房)이라 이름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경사방태감(敬事房太監)이라 칭하였다. 이곳은 전적으로 황제와 후비 사이에 이루어지는 밤의 관계를 처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우선 황제가 황후하고 관계를 맺었을 때는 그 연월일을 기록하여, 수태를 했을 경우에 증거로 삼는다.

 비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평소 황제가 마음속에 두고 있는 비(妃)에게는 각자 녹두패(綠頭牌)라 하는 녹색으로 염색을 한 명찰을 만들어 놓는다. 황제가 저녁식사를 할 때, 경사방태감은 그 명찰을 십여 개 또는 수십 개씩 커다란 은쟁반에 담아서 받쳐들고 황제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지시가 내리기를 기다린다. 황제에게 의사가 없으면 그냥 ‘물러가라’라고 지시를 내렸고, 의사가 있으면 황제 자신이 그 명찰을 하나 뒤집어 놓는다. 그러면 태감은 물러나와 다른 태감에게 그 명찰을 건네준다. 그는 그날 밤 시중을 들게 된 비를 황제의 침실로 보내는 임무를 맡고 있다. 시간이 되면 그 사람은 비를 나체로 하여 새털로 만든 털옷에 싸서 등에 업고는 침실까지 데려다 준다.

 그런 후 태감과 경사방태감은 침실 밖에 서서 정해진 시간 동안을 기다린다. 정해진 시간보다 길어지면 태감은 큰 소리로 ‘시간이 되었습니다’라고 외친다. 황제의 반응이 없으면 다시 한번 마찬가지로 소리를 지른다. 이렇게 세 번을 되풀이하며, 세 번째에는 지체 없이 후비를 데리고 돌아간다. 동시에 황제에게는 시중을 들었던 후비에게 임신을 하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는다. 황제가 필요 없다고 말하면 피임법을 실시하고 ‘기록해 놓아라’라고 말했을 때는 후비를 그대로 지내게/ 하며 연월일을 기록해 두어 후일의 증거로 남겨놓는다. …

 후궁(後宮)의 실태에 관하여 황후의 발언권이 인정받았던 점도 주목할 만하다. 황제는 기분이 내키는 대로 후비의 방을 찾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런 경우에는 사전에 황후로부터 후비에게 황제가 방문하리라는 사실을 통고하는 문서가 보내진다. 그런데 이 문서에 황후의 도장이 없으면 무효가 되며, 만약에 이 통지서가 오지 않으면 황제는 후비를 찾아갔다 하더라도 그 방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또한 환관은 황제의 성교육에도 가담하였다. 명의 내정(內廷)에는 환희불(歡喜佛)을 몇 체(體) 모시고 있다. 이 불상은 라마교의 비불(秘佛)로서, 남녀의 불상 혹은 짐승의 교접상태를 적나라하게 구상화한 대단히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다.…

군주와 환관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군주의 유년기부터 시작된다. 황자가 유모의 손에서 벗어나면 그 이후의 교육은, 예를 들면 언어사용, 식사법, 보행법, 예의작법 등, 일체가 환관의 손에 맡겨졌다. 학문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이리하여 황자는 환관과 더불어 성장해 간다.    (pp.102-105.)

횡행하는 여관

내정에 있어서 환관과 비견할 만한 또 하나의 존재는 여관이다. 여관의 동태는 표면상으로는 그다지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환관이라 할지라도 여관과 편을 이루지 않고서는 환관의 세력도 역시 충분히 발휘될 수가 없다.

 여관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으나 황제의 유아시절에 젖을 먹인 유모의 존재는 더욱더 중시할 필요가 있다.…/

 명나라에서는 공주(황녀)가 결혼을 하면 궁정 내의 십왕부(十王府)로 옮겨져서 살았으며, 동시에 집사(執事)로서 나이 든 여관을 딸리게 한다. 이것을 관가파(管家婆)라고 한다.…

 사위된 사람은 황성의 장안저(長安邸)로부터 공주의 부름을 받아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이때에 최대의 난관은 바로 관가파이다. 연로한 여관은 부마를 경멸하여 노예 쥐급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노여관의 중개가 없이는 공주와 대면할 수도 없었다.…/   /

 ‘홍연의 법’이라는 것은 13,4세의 미려단정한 동녀(童女)의 월경수(月經水)를 금은으로 제조한 그릇에 받아서 유발(乳鉢: 약을 갈아서 가루로 만드는 그릇)에 넣고는 여기에 오매수(烏梅水)를 붓는다. 오매(烏梅)라는 것은 반쯤 익은 매실열매를 불에 태워서 검게 만든 것으로 이것을 일곱 번에 걸쳐 건조시킨 다음에 유분(乳粉), 진사(辰砂), 남만송지(南蠻松脂), 분뇨의 분말과 섞어서 불에 달구어 만드는데 이를 홍연환(紅鉛丸)이라고 부른다.… 당시로는 이름 높은 강장제였다.

 명나라 중기 이후는 문화의 난숙기를 이루면서 이러한 종류의 강장약, 미약(媚藥)의 부류가 세상에 범람하였다.…               (pp.106-109.)


환관 부부

 만력(万曆)년 때, 복건성으로 출장을 나가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 백성들로부터 저주의 표적이 되었던 세감(稅監)으로 환관 고채(高采)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상실한 성기를 재생시키고자 시도를 하였는데, 남자아이의 뇌수가 효험이 있다는 술사의 말에 유혹되어, 수많은 어린아이를 살해하여 먹었다고 전해진다. 고위층의 환관에게는 이 방법이 널리 퍼졌다고 하며, 그래서 스탠드도 지적한 것처럼 대역죄인 위중현도 죄인 7명을 죽여서 그 뇌수를 먹었다고 한다.…/

 명나라의 태조(太祖)는 환관을 단속하는 데는 더없이 엄숙한 자세로 다스렸으며 특히 아내를 얻은 자에게는 살가죽을 벗기는 박피(剝皮)의 형에 처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뒤에는 이 원칙은 전연 지켜지지 않았다.…

 환관은 여관 이외에 정식으로 아내를 맞이하는 사람도 많았으며, 심지어는 첩을 두기도 하였는데 북경의 유곽지역이었던 서원(西院)에/는 한결같이 환관의 첩이 거주하는 집들로 가득찼다고 한다.…       (pp.112-115.)



환관으로 멸망한 후한

 한(漢)왕조는 … 서력기원전 2세기 동안을 전한, 그 후로 2세기를 후한이라 부른다. 통설에 의하면 전한은 외척에 의해, 후한은 환관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한다.…                                      (p.121.)


비서의 원조, 사마천

 무제는 환관의 제도상에 중대한 나쁜 예를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유명한 사마천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했던 일이다. 이 부서는 내정(內廷)의 비서장(秘書長)이었다. 수천 명이나 되는 미희를 거느리고 있던 무제는 큰 향연을 즐겨하였으며, 내정에서 자주 연회를 열었다. 성질이 급한 무제는 후궁에 머물고 있을 때도/ 언제라도 계속해서 정치적인 명령을 내렸다. 그 때문에 유능한 비서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내정에는 원칙적으로 남자는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궁형을 받은 사마천이 특별히 선택되었던 것이다.…(pp.135-136.)


환관 시대

순제(順帝)가 자신이 환관에게서 입었던/ 공(功)에 보답하고자 취한 조치이다. 그것은 환관에게 그들이 양자를 맞이하여 작위를 세습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준 것이다.

 지금까지는 환관이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를 받았다 하더라도 일대(一代)에 한정된 것이었는데, 이제 세습까지도 가능해졌다는 사실은 한관 귀족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데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된다. 동시에 한 대(漢代)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봉건적 신분제를 타파하는 돌파구도 되었다. 예컨대 신분이 낮은 계급의 환관들은 자기의 친척이나 타인, 심지어는 노예의 자식까지도 양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제도에 힘입어 삼국시대의 위(魏)의 조조가 역사 속에 그의 이름을 기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조부 조등(曹騰)은 순제(順帝)가 어렸을 당시의 환관학우(宦官學友)였으며, 쿠데타 이후에는 환관대신(宦官大臣)으로서 순제(順帝)를 섬겼던 사람이다.…/  /

 하진(何進)과 함께 행동을 같이 했던 환관의 양자였던 조조(曹操)와 마찬가지로, 훗날 영웅시대를 맞아 활약을 했던 원소(袁紹)는 귀족 출신이기는 하였으나 결코 청렴한 귀족은 아니었다. 원소(袁紹)의 부친은 외척 양귀(梁貴)의 호위병이었으며, 한편 환관대신 원사(袁赦)와는 동성이라는 친분 관계로 발탁된, 이를테면 환관파의 귀족이었다.         (pp.167-170.)


당나라 후반기의 황제들

 당대(唐代)는 한(漢), 명(明)과 나란히 환관의 전횡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지만 당대(唐代)에서는 일종의 독특한 이상스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말하자면, 당나라 후반기의 백 년 동안에 9명의 황제가 즉위하였는데, 그 중 7명까지는 모두 환관의 손에 의해 양육된 황제이며, 그렇지 않았던 2명의 황제는 환관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p.175.)


현종(玄宗)과 고력사(高力士)

 당(唐)의 기구 중에 내시성(內侍省)에서는 일체의 업무를 환관에 의해 운영하였다.…/

 내시성(內侍省)의 장관은 수뇌가 되는 4명의 내시(內侍) 중에서 선임자가 된다. 당나라 제도에서 재상은 3품관이 되는데 태종은 내시를 4품관으로 정했다. 이것은 환관을 재상보다 아래쪽의 지위에 둠으로써 권세를 휘두르지 못하게 만든 조치이다. 그렇다면 환관은 4품관인 내시까지밖에 승진할 수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군직(軍職)을 겸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환관이 무관까지도 겸했던 제도가 당대에서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고력사(高力士)는 쿠데타 때 세운 공(功)으로 3품관인 우감문장군(右監門將軍)이 되었고, 그 후 1품관인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승진했다. 재상이 3품관이었으니, 재상보다도 훨씬 높은 지위이다.…

 내시(內侍)가 수행하는 임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는 직접 황제의 파견으로 재상에게 국가의 기밀사항에 관련된 것을 구두로써 전달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환관에게 측근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해주는 요인이 되었다.…

 원래 당(唐)애/서의 행정사무는 대개 재상이 처리하였으며, 중요한 국사에 관해서는 군주에게 결재를 의뢰하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고력사는 현종이 직접 얼굴을 내밀기가 곤란한 경우 배후의 보좌역으로서 맡겨진 임무를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고력사는 현종의 가정 일에도 상담역을 맡았다.…

 현종은 고력사가 궁전 안에 머무르고 있는 날 밤엔 안심하고 편히 잠들 수 있다고 하여, 그 후로는 거의 매일처럼 고력사는 궁중에서 기숙하였다.…

 제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음으로써 고력사의 권세는 궁정 내외를/ 제압하였으며, 황태자는 고력사를 형이라 불렀고, 모든 왕들은 그를 옹(翁)이라 불렀다.

 이렇게 하여 당대(唐代)의 환관시대는 고력사로부터 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pp.195-198.)


최초의 환관 재상

환관의 전권(專權)은 이보국(李輔國)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보국(李輔國)은 대종(代宗)에게 ‘주인님께선 가만히 궁궐 안에서만 계시옵고, 바깥일은 늙은이의 처분에 맡겨 주십시오’라고 말하고는, 드디어 그의 염원이었던 재상이 되어 정치에 관한 일체를 자기 손으로 꾸려/나갔다. 이때 비로소 역사상 최초의 환관 재상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대종(代宗)은 내심으로는 불만스러웠으나, 이보국이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도리 없이 그를 상보(尙父)라고 일컬으며 공경하였다.

 이보국이 등용했던 환관 중에 정원진(程元振)이 있었다. 그런데 정원진은 이보국을 축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대종(代宗)을 자기 계획에 끌어넣을 수 있게 되자, 이보국에게 왕의 지위를 수여하고 장대한 저택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이 저택을 받게 되면, 본인이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지금까지 굳게 버티고 있던 궁정으로부터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권력도 잃게 된다. 이보국은 눈물을 흘리면서 선황제(先皇帝)에게 땅 끝까지 봉사하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물러났다. 이렇게 후일에의 여운을 남겨서 보류해두는 방식은 권력을 몰수하는 방법으로써 당대(唐代)에서는 항시 사용해 오던 것이었다.…                         (pp.204-206.)


황제 시역(弑逆)

 헌종(憲宗)도 현종과 마찬가지로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탈선의 길로 달렸다. 전승으로 마음이 부푼 황제는 만년에는 신선설(神仙說)을 신뢰하여 천하를 살펴서 법사(法士)를 찾아나섰다. 신선술(神仙術)은 선술에 의한 장명법(長命法)으로, 진(秦)의 시황제 이래로, 영명한 군주들이 말려들기 쉬운 미신이었다. 장생약(長生藥)이라 일컫는 괴상한 약이 만들어졌는데, 이 약을 복용하면 대개는 독에 중독되어 마지막에는 발광상태로 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이때에도 선인이라 자청하는 유비(柳泌)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 사람이 말하기를 절강(浙江)의 영장(靈場) 천태산(天台山)은 신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그곳에는/ 영초(靈草)가 많이 있다고 했다. 헌종(憲宗)은 즉시 유비(柳泌)를 태주(台州)의 지사로 임명했다. 신하들은 이에 대해 간언하였으나 헌종은 단지 하나의 주(州)를 가지고 군주가 장생(長生)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다지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하면서 신하의 간언을 물리쳤다.

장생약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헌종(憲宗)은 미친 사람처럼 되어 화를 잘 내었으며, 측근의 환관들은 그 때문에 자주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을 받았으며, 결국 손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하루 만에 덜컥 죽었다. 황제의 죽음에 대해서는 약 때문이었다고 공표되었으나, 사실은 환관 왕수징(王守澄), 진홍지(陳弘志)가 황제를 시살하였으며, 다른 환관과도 결속하여 외부로는 비밀이 누설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황제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환관들은 황태자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져 싸움을 벌였는데, 결국은 황태자파가 승리하여 목종(穆宗)을 즉위시켰다. 이것은 환관이 후계자를 옹립했던 최초의 일이다.…

목종(穆宗)이 놀기를 좋아하고 악성병에 걸린 때문이었다.…/

 목종(穆宗)의 뒤를 이은 불과 16세 나이의 경종(敬宗)은 아직 소년이었기 때문에 변변치 못하게 보였던 때문인지 왕수징(王守澄) 일당의 반대도 없이 장자라는 이유로써 무사하게 즉위하였으나, 조부 헌종(憲宗)을 뒤따라서 두 번째로 시역(弑逆)을 당한 군주이다.…/              

 황제가 씨름을 좋아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수많은 역사(力士)를 헌상하였다. 그런데 이들 역사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자만심에서 사소한 일로 환관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이에 앙심을 품은 환관들은 음력 12월의 어느 날 밤이 깊어갈 즈음에 밤 사냥에서 돌아온 경종(敬宗)이 측근이 되는 환관 28명과 빙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는 잔뜩 취하여 잠자리에 들어가 불을 끄려는 순간에 황제를 살해하였다.

 그때 황제의 나이는 18세였다.…                   (pp.209-212.)


환관에 의한 해외 원정

 명대(明代)…당시 영락제가 거처했던 북경은 원조(元朝)의 수도였고 잡다한 인종이 거주하는 국제적인 도시였다.…환관…정화(鄭和)는 운남(雲南) 출생의 이슬람교도였으며,…/

 황제로서는 응당 해외에 대한 관심이 고취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중에서 정화(鄭和)의 해외 원정은 매우 유명했다. 그는 길이 48장(丈:1장은 약 3미터), 폭 18장(丈)이 되는 큰 배 62척에 사졸 2만7천8백여 명을 나우어 승선시킨 대선대(大船隊)를 지휘하여, 인도양에서 멀리는 페르시아 만까지 아라비아 해를 항해하여 진출하였는데, 25년 간에 7회나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가 닿았던 기항지는 동남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과 오늘날의 이슬람문화권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                    (pp.230-231.)

*15세기 초 중국 명(明)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의 명을 받아 대형선단을 이끌고 아프리카 동부해안까지 항해했던 환관 정화(鄭和: 1371-1435?)의 배가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 지난 해 정화의 항해 6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였던 중국은 난징[南京]에 있는 당시 조선소 유적지에서 그가 탔던 배의 실물 크기 모형을 만들어 일반에 전시했다고 신화통신 등 중국 언론들이 25일 보도했다. …

                   (06.9.26.화. 중앙일보 1면. 베이징= 유광종 특파원)


환관 학교

 아주 오랜 옛날부터 환관은 무학(無學)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환관 세력에게 둘러싸였던 당(唐)의 군주는 그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신하와 밀의를 나눌 때는 서로 시(詩)를 읊는 방법으로 상담을 하였다. 이에 당황한 환관들은 즉시 시를 아는 여관을 대동하여 이에 대항하였다고 한다.

 명(明)의 태조도 환관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겨, 환관이 독서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렇다면 무학이라고 하여 권세를 장악하지 못하였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다고는 단언할 수 없으며, 훗날 권력을 남용하여 맹위를 떨쳤던 환관 위중현(魏仲賢)은 일자 무식쟁이였고, 마찬가지로  유근(柳根) 도 거의 무학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명군(名君)이라 칭함을 받던 5대 선종(宣宗) 때에 돌연 환관학교가 설립되었다. 내서당(內書堂)이라 하는 이 학교에 대해서 고염무(顧炎武)는 《일지록(日知錄)》에서 …비난하고 있다./

 환관학교에는 학생으로 10세 이하의 어린이를 2,3백 명 수용하여 독서를 가르쳤다. 사례감(司禮監)의 제독(提督)이 교장을 맡았으며, 교장 아래로 6명 내지 8명의 학감이라 할 수 있는 ‘학장’이 있었는데 이들이 감독을 하였다. 학장은 나이 많은 세력 있는 사람이 선발되었으며, 교사로는 당당한 한림원의 학사를 초빙하여 가르치도록 하였다.…

 학생이 공부하던 교과서는 내령(內令: 내정규칙), 백가성(百家姓), 천자문, 효경, 사서(四書: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천가시(千家詩), 신동시(神童詩) 등의 종류로 이것을 순서에 따라 관비로 지급하였다./…

 이곳 내서당 출신의 환관은 ‘정도(正途)’라고 불려지며, 과연 외부에서의 과거 출신자와 필적하는 수준의 사람이 된다. 이들 중에서 수재는 언젠가는 중추부에 근무하게 된다. 거리에서 젊은 내서당 출신의 환관과 그렇지 않은 환관이 마주치면, 연장자라 하더라도 내서당 출신의 환관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       (pp.233-235.)   


황제의 비서로서의 성격

 명대(明代)의 각신(閣臣)이나 환관들은 언제나 황제의 비서로서의 성격을 유지하였으며, 이를 뛰어넘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가 특정한 개인을 총애할 때에만 그 인물이 권세를 장악할 수가 있었으며, 따라서 황제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실각을 당했다. 관료 조직체 안에서 존재하는 개인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명대(明代)에서는 환관이 황제를 폐립시킨다거나 시역(弑逆)을 도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p.243.)


최후의 환관

 청조(淸朝)에서 환관의 폐해가 드러난 것은, 만주의 귀족 출신이었던 서태후(西太后) 때의 일이다.…

 서태후는 대단한 수완가로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휘둘렀으며, 동시에 환관을 총애하였다. 그 중에서 최초로 발탁된 환관은 안득해(安得海)였다. 그의 집안은 대단히 가난했기 때문에 양친의 간청으로 함풍 5년(1855년)에 12세의 나이로 자궁을 하여 환관으로 채용되었는데, 특히 미모를 지녔던 덕택에 서태후의 눈에 들어, 마치 자기 자식처럼/ 귀여워했다고 한다. 서태후가 섭정을 맡게 되면서 그도 국사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태후의 명으로 산동(山東)으로 출장을 갔다가 그는 출장지의 관헌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환관은 수도를 이탈해서는 안 된다는 금제를 위반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서태후는 환관 이련영(李蓮英)을 발탁했다. 그는 동치 말기로부터 광서(光緖)년의 기간에 걸쳐서 약 40년 간 서태후의 신임을 얻어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환관의 본거지였던 하간(河間)에서 어느 무뢰한(無賴漢)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련영(李蓮英)은 주색에 빠져 신세를 망치고는, 나라에서 금지했던 초석(硝石)을 팔다가 현(縣)의 감옥에 갇혔다. 그 뒤에는 신발수선으로 전업을 하였는데, 이것도 신통치가 못하여 마침내 같은 고향사람인 환관이 주선을 해 주어 자궁을 하고는 환관이 되었다.…/  /

1908년, 광서제의 죽음을 전후하여 청대(淸代), 그보다는 중국의 환관사에 있어서 환관을 활약하게 해주었던 최후의 인물이라고 할 서태후도 죽었다. 그리고 1912년 청조(淸朝)는 멸망했다. 4천 년을 이어왔던 중국의 전제군주제에 종지부를 찍었던 신해혁명이 일어난 해에, 기이하게도 서태후의 신임을 받아왔던 이련영(李蓮英) 또한 역사 속에 최후의 환관이라는 이름을 남긴 채 죽었다.                                        (pp.260-263.)


현대에 있어서의 환관적 존재

신정국가(神政國家)인 은(殷)에서는, 신을 배경으로 한 군주가 그의 신성함을 보유하면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비인간적인 환관을 만들어 군주에게 봉사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군주의 비서이자 측근자였던 것이다.…/

환관을 비서의 원조라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국정을 담당하는 내각의 대신들은 공식적인 황제의 비서였으며, 환관은 막후의 비서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주와 거리가 가까운 환관이 보다 권세를 떨쳤다. 권력자였던 군주와 대신과의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환관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

 권력의 직속기관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비서그룹이 존대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환관적 존재라 말할 수밖에 없다.…

 권력에 직속하여 정보를 독점하는 측근그룹, 이런 조직으로서의 환관적 존재는 분명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pp.267-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