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고전 수필

(고전수필 순례 6) 공방전(孔方傳)

거북이3 2006. 12. 30. 23:27
 

 (고전수필 순례 6)

    공방전(孔方傳)

                                             임  춘 지음

                                             이웅재 해설


 공방(孔方)의 자는 관지(貫之)이니, 그 조상이 일찍이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굴혈(崛穴) 속에서 살아 아직 나와서 세상에 쓰여진 적이 없었다.…중략…

 뒤에 난리는 피하여 강가의 숯화로[炭鑪] 거리로 이사하여 거기서 눌러 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천(泉)1) 은 주(周) 나라의 대재(大宰)로 나라의 부세(賦稅)를 맡았었다. 방(方)의 위인이 밖은 둥글고 안은 모나며, 때에 따라 웅변을 잘하여, 한(漢) 나라에 벼슬하여 홍로경(鴻臚卿)2)이 되었다.…중략… 

 방의 성질이 욕심 많고 더러워 염치가 없었는데, 이제 재물과 씀씀이를 도맡게 되니 본전 이자(利子)의 경중을 저울질하는 법을 좋아하여, 나라를 편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질그릇ㆍ쇠그릇을 만드는 술(術)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백성과 더불어 작은 이익이라도 다투고 물건 값을 낮추어 곡식을 천하게 하고, 화(貨)를 중(重)하게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근본(농업)을 버리고 끝[상(商)]을 좇게 하여 농사에 방해를 끼치므로 간관(諫官)들이 많이 상소하여 논했으나 위에서 듣지 않았다.

 방은 또 재치 있게 권귀(權貴)를 잘 섬겨 그 문(門)에 드나들며 권세를 부리고, 벼슬을 팔아 올리고 내침이 그 손바닥에 있으므로, 공경들이 많이 절개를 굽혀 섬기니, 곡식을 쌓고 뇌물을 거두어 문권(文卷)과 증서가 산 같아 이루 셀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람을 접하고 인물을 대함에도 어질고 불초함을 묻지 않고, 비록 시정(市井) 사람이라도 재물만 많이 가진 자면 다함께 사귀고 통하니, 이른바 시정의 사귐이란 것이다.

 때로는 혹 거리의 악소년(惡少年)들과 어울려 바둑 두기와 투전하기로 일을 삼아서, 자못 연낙(然諾)을 좋아하므로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방(孔方)의 말 한마디면 무게가 황금 백근 만하다.” 하였다.

 원제(元帝)3)가 위(位)에 오르자 공우(貢禹)4)가 상서하여 아뢰기를, “방이 오랫동안 극무(劇務)를 맡아 보면서, 농사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한갓 장사치의 이익만을 일으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하여 공사가 다 곤궁하오며, 더구나 뇌물이 낭자하고 청탁이 버젓이 행하오니,…중략… 청컨대 그를 면직시켜 욕심 많고 더러운 자를 징계하옵소서.” 하였다.…중략… 방이 드디어 쫓겨나게 되었다.

 그가 문인에게 하는 말이, “내가 얼마 전에 임금님을 뵙고 혼자 천하의 정치를 도맡아 보아, 장차 나라의 경제가 족하고 백성의 재물이 넉넉하게 하고자 하였더니, 이제 하찮은 죄로 내버림을 당하게 되었지만, 나아가 쓰이거나 쫓겨나 버림을 받거나 나로서는 더하고 손해날 것이 없다. 다행히 나의 남은 목숨이 실오라기처럼 끊어지지 않고, 진실로 주머니 속에 감추어 말없이 내 몸을 용납하였다. 가서 뜬 마름[萍]과 같은 자취로…중략… 술배[酒船]에 둥실 떠 마시면서 한 평생을 마치면 그만이다. 비록 천종(千種)의 녹(祿)과 오정(五鼎)의 밥인들 내 어찌 그것을 부러워하여 이와 바꾸랴. 그러나 나의 술(術)이 아무래도 오래면 다시 일어나리로다.” 하였다.…중략…

 오직 완선자 적(阮宣子 籍)5)만은 방달(放達)하여 속물(俗物)을 즐기지 않았으되, 방 의 무리와 더불어 막대를 짚고 나가 놀아 목노술집에 이르러 문득 취하도록 마셨고, 왕이보(王夷甫)6)는 입에 일찍이 방의 이름을 담지 않고 다만 그것7)이라 일컬었으니, 그가 깨끗한 자에게 비천하게 여겨짐이 이와 같았다.

 당나라가 일어나자 …중략… 다시 방의 술(術)을 써서 나라의 씀씀이를 편하게 하자 하였으니, 그의 말이 식화지(食貨志)에 있다. 그때에 방은 죽은 지가 이미 오래였고, 그 문도로서 사방에 옮아 흩어져 있는 자들이 물색 되어 찾아서 다시 쓰이게 되었다.…중략…

 소식(蘇軾)8)이 그 폐단을 극론하여 그들을 모조리 배척하려다가 도리어 모함에 빠져 쫓겨나 귀양 가게 되매, 그로부터 조정의 인사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사마광(司馬光)9)이 상(相)으로 들어가 그 법을 폐하기를 아뢰고 소식(蘇軾)을 천거하여 쓰니, 방(方)의 무리가 조금 세력이 감쇠되어 다시 성하지 못하였다. 방의 아들 윤(輪)은 경박하여 세상의 욕을 먹었고, 뒤에 수형령(水衡令)이 되었으나 장물죄(臟物罪)가 드러나 사형되었다고 한다.…후략…

(민족문화추진회, 고전국역총서, 동문선 제100권, 전, 공방전에서)

* 가전체를 수필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이미 ‘화왕계’를 소개할 때 언급한 바이다. 조동일(趙東一)은 조선조 임제(林悌)의 수성지(愁城誌)를 설명하면서, “이런 작품에 이르면 허구적인 수법으로 복잡한 생각을 나타내는 데 커다란 진전이 이루어져 단순하거나 일차적인 교술은 넘어섰으나 그렇다고 해서 가전체가 소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제2권. 知識産業社. 1983. p.449.)

 지은이 임춘(林椿)의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고려 중·후기의 문인으로 예천임씨의 시조. 고려 건국공신의 후예로 음서로서도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능력을 입증하고자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실패함. 강좌칠현의 한 사람으로 30대에 요절하였다. 유고집으로 “서하선생집”이 있으며, “동문선”에 가전체 ‘공방전(孔方傳)’과 ‘국순전(麴醇傳)’이 전한다.

 

[주]

1) 王莽이 주조한 貨泉.

2) 외국의 빈객을 접대하는 벼슬

3) 漢나라 8대 황제인 劉奭

4) 漢나라 때의 經典에 밝고 깨끗했던 博士. 元帝가 즉위하자 王吉과 함께 諫議大夫가 됨.

5) 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白眼視 고사의 주인공. 好酒家이며 거문고를 잘 탔다.

6) 晉나라의 王衍. 夷甫는 字.

7) 阿堵物.

8) 蘇東坡.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9) 宋나라의 名臣. 司馬溫國公이라고도 함. 유명한 編年史인 資治通鑑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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