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기

버리는 일에도 아픔이 따른답니다

거북이3 2007. 1. 29. 00:03
 

버리는 일에도 아픔이 따른답니다

                                                                이   웅   재


 오늘 또 버렸습니다. 얻는 일은 힘들어도 버리는 일은 쉬운 줄 알았습니다. 내 소유가 아닌 것을 나의 것으로 하려면 금전이나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지요. 때로는 투쟁까지 필요한 일이 아니던가요? 하지만, 그 반대의 버리는 일은 아주 쉬운 줄로만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더라구요.

 나는 몇 년 전에 좋지 못한 습관 하나를 버렸습니다. 바로 담배 피우는 습관을 버린 것이지요. 어렵게어렵게 버렸지만, 주위로부터 잘 버렸다는 칭찬을 자주 들어 그 어려움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은 버림이었습니다. 얼마 전엔 또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버렸습니다. 아니, 그런 건 버린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기증한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도 상당한 보상을 받은 버림이라고 생각이 되는군요. 그런데 며칠 전에 버린 건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한 버림이었습니다.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은 둘째 문제요, 버리면서 엄청난 아픔까지 느껴야 했었으니, 그런 버림은 다시는 없었으면 싶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전적으로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못 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었지요.

 효경에서는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고 했습니다. 머리터럭 하나라도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헐게 하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나는 그 신체발부 중의 하나를 버린 것입니다. 감히 훼상시켜서는 안 되는 몸의 일부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털끝 하나라도 다치면 그 얼마나 애처로운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일까요? 그런데 그것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라면 틀림없이 불효에 값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버리는 데에는 엄청난 아픔이 뒤따르고 있더군요. 오죽하면 마취까지 하고 버렸겠습니까?

 한 동안 밥 먹기가 불편했습니다. 여기저기 씹는 곳마다 시큰시큰, 뜨끔뜨끔…. 예전에 이병철 삼성회장이 흔히 했다던 말이 생각났지요. 회식 때 그 회사의 말단 직원이 게걸스럽게 갈비를 뜯는 모습을 보고 했다는 말…, 행복이란 바로 저런 것이지,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것이 바로 저런 것이라니까…. 누가 만들어 낸 말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마음껏 갈비를 뜯을 수 있는 일, 그거 얼마나 축복받은 삶을 사는 일이냐구요. 아하, 그건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 옛적 얘기라구요? 그래요, 요샌 그 뭐 다이어튼가 뭔가 해서 안 먹는 것이 유행이라니 그럴 만도 하네요. 그렇지만, 모르긴 하지만, 다이어트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무식한 갈비 뜯기를 보고서는 꿀꺽! 침을 삼키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 일은 웬 일일까요? 그래서 이[齒]는 자식보다도 낫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러한 이가 몹시 아팠던 것입니다. 몸 어느 곳이 아프더라도 그곳이 가장 불편한 것으로 느껴지겠지만, 그러나 실제로 이가 아픈 경우, 그것보다 참기 힘든 일이 또 있던가요? 오죽하면 ‘앓던 이 빠진 듯하다’는 말까지 생겨났겠습니까?

 엊그제 바로 그 이가 아파서 큰 맘 먹고 발치(拔齒)를 했던 것입니다. 부분 마취를 하고 빼었는데도 얼얼하더라구요. 그래서 버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엄청 아픈 일이라는 걸 아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요. 그래서 앞으로는 함부로 버리는 일은 삼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처럼 어렵게, 아니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아픔을 인내하면서 버리는 일 이상으로 더욱 괴로운 일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었습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이범선 씨의 ‘오발탄’ 생각나시죠? 어금니 두 대를 빼고는 까무룩이 정신을 잃어가는 철호.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지금 나도 어금니 두 대를 빼 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 글이 발표된 1959년과는 의술의 눈부신 발달로 ‘까이꺼’ 어금니 두 대쯤 빼는 일쯤이야 별 일 아니겠지만, 문제는 바로 하루라도 못 마시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내 ‘술’ 습관인 것입니다.

 의사에게 애절한 심정으로 물었지요.

 “술은 마시면 안 되겠지요?”

 “사흘 동안은 드시지 마세요.”

 그래도 그 의사 나으리, 옛날 내 제자의 친구 분이라서 최소한의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계산을 하려고 신용카드를 내미는 나에게, 간호사가 말했습니다.

 “일주일 동안은 술 드시지 마세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어떻게 일주일씩이나….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간호사의 말을 따르기보다는 의사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 백번 천번  옳은 일이 아니냐고요. 이제 더할 수 없는 결기로 사흘을 버티려고 합니다. 사흘 동안이나 되는 시간을 버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생일대에 이처럼 다부진 결의를 한 적이 별로 없는 처지이지만 어쩌겠습니까? 간호사의 말이 아니라 의사 선생님의 말씀인 데야 별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진로 회사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입니다. 최소 20.1 도짜리 쐬주 6병 정도는 매출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기에 말씀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사흘이 지난 다음에는 기념으로 몇몇 친구와 함께 그 동안 못 마셨던 것 고스란히 보충을 할 생각이니까요.

 이번에 정말로 깨달은 것은, 버리는 일에도 아픔이 따른다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버려야 마땅한 일에도 아픔이 따르는데 버려서는 안 될 것, 예컨대 신의, 인연 등등의 것을 버려서는 안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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