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⑪ 말로 병을 고친 녹진(祿眞)
경북 인물열전 ⑪
말로 병을 고친 녹진(祿眞)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州府 人物條]
이 웅 재
얼마 전 캄보디아 여행 중의 일이었다. 바프온 사원을 지나 피미아나카스(Phimeanakas) 궁전으로 가는 길목에서였다. 처녀 하나가 앉아서 손을 벌리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다리가 없다. 지뢰의 피해자인 듯했다. 꽃다운 나이에 앵벌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딱하게 보여 1달러를 적선하고서야 그곳을 지나갈 수 있었다. 아가씨는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감사하게 느끼는 쪽은 오히려 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말이란 그런 힘을 갖고 있는 사물이다.
지극히도 재수가 없던 날, 퇴근을 하고 저녁상 머리에 앉아서 남편이 말한다.
“오늘, 출근하다가 소매치기를 당했어!”
“그래요? 그래도 사람 상하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아내의 말 한 마디는 그렇게 푸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 오늘 퇴근하다가 자동차 사고를 냈어!”
아내는 내 몸 상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만하길 다행이지 뭐.”
말 한 마디에 그만 감동을 먹는다.
그렇다. 말이란 그와 같은 힘을 갖고 있는 사물이다.
신라 때의 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신라 39대 소성왕(昭聖王) 12년의 일이라고 했지만, 소성왕은 즉위한 이듬해에 승하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연대를 원용한다. 사기열전 녹진(祿眞)조에서는 헌덕왕(憲德王) 14년(819) 때의 일이라 하였다.
각간 충공(忠恭)이 상대등이 되어 정사당(政事堂)에 앉아 내외 관원을 전형, 선발하는데,(신라본기 헌덕왕 13년조에서는 김충공이 이때 죽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왕명은 혼동되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12년의 일이 아닐까 싶다.) 청탁이 쇄도하여 처리할 바를 몰라 고심하다가 병을 얻게 되었다. 의사를 불러 진맥하니 ‘병이 심장에 있으므로 용치탕(龍齒湯)을 복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충공이 드디어 삼칠일(21일)간의 휴가를 얻어 문을 닫고 손님을 만나지 아니하였다. 집사시랑(執事侍郞) 녹진이 가서 뵙기를 청하였다.
“상공께서 병환으로 손님을 사절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꼭 한 말씀을 드려서 답답한 근심을 풀어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문지기가 두세 번 아뢰어서야 뵈올 수가 있었다.
“듣건대 귀하신 몸이 편치 않으시다 하오니, 이는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여 이슬과 찬바람에 시달려 혈기가 조화를 잃어 몸이 불편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 정도는 아니다. 다만 어릿어릿하여 정신이 개운치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공의 병은 약석(藥石)을 쓸 필요 없이 한 마디 말로써도 치료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목수가 집을 지을 때, 재목이 큰 것은 들보와 기둥, 작은 것은 서까래로, 또 굽은 것과 곧은 것을 각각 그 쓰일 곳에 배치한 후에야 큰 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진 재상이 정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인재는 높은 지위에 두고 작은 인재는 가벼운 소임을 주어서, 중앙에는 육관(六官)과 온갖 관서, 지방에는 방백(方伯)·태수(太守)·군수(郡守)·현령(縣令)에 이르기까지 결원이 없이 직위마다 적합한 인재를 얻은 연후에 왕정(王政)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사(私)를 따르고 공(公)을 해치며, 위인택관(爲人擇官), 총애하는 사람이면 비록 재주가 없더라도 반드시 높이 등용하고, 미워하는 사람이면 유능한 인재일지라도 배척하니, 취하고 버리는 것이 마음을 괴롭히고 옳고 그른 것이 뜻을 현란하게 하므로, 나라 일이 혼탁해질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 역시 수고롭고 병이 드는 것입니다. 만약 관직을 맡음에 청백하고, 일을 처리함에 정성을 다하여 뇌물을 물리치고, 청탁하는 폐단을 멀리하며, 승진과 강등을 오직 그 사람의 어두움과 밝음으로써 하고, 관직을 주고 뺏는 것을 사랑과 미움으로써 하지 아니한다면, 저울에 달고 먹통줄로 긋는 것처럼 곡직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형정(刑政)이 발라지고, 국가가 화평하여, 비록 공손홍(公孫弘)(한나라 武帝 때의 정승. 집안의 東閣을 개방하여 빈객들을 맞아 정치를 자문하였다.)처럼 집의 문을 열어 놓고, 조참(曹參)(한나라 惠帝 때의 정승. 그는 한나라의 두 번째 정승으로 첫 번 정승인 蕭何가 정해 놓은 법규만을 따랐다. 그리고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아니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의견을 말하려고 찾아가면 술을 취하도록 먹여서 아무 말도 못하게 하였다.)과 같이 술을 내어 친구들과 담소하고 스스로 즐기더라도 무탈할 것입니다.”
충공이 기뻐하여 의원을 사절하고 임금께 알현하였다.
“신이 녹진의 말을 들으니 약석(藥石)과 같았습니다. 어찌 용치탕 따위를 마시겠습니까?”
이야기를 전해들은 왕이 말하였다.
“이렇게 직언하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녹진은 일길찬 수봉(秀奉)의 아들로 23세에 벼슬하여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헌덕왕 10년(818)에는 집사시랑(執事侍郞)이 되었다. 충공 에게 인재등용의 요체를 직언했던 그는 같은 해 3월 웅천주도독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왕이 그에게 대아찬의 관등을 주었으나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였던 직간신이다.
요즈음 그와 같은 인재가 그리워 그의 인품을 다시 한 번 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