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베트남 문화 체험기 12) 톤레샵 호수의 수상족 (水上族)이 사라
(캄보디아, 베트남 문화 체험기 12)
톤레샵 호수의 수상족 (水上族)이 사라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 이 웅 재
다음 우리는 톤레샵 호수로 갔다. 동양 최대의 담수호라는 이 호수는 건기인 지금도 우리나라의 제주도 정도의 크기를 지닌단다. 호수로 들어가는 입장료를 받는 곳에서는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 노란색 점퍼를 입은 관청직원들과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티켓 셀러, 이 지방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선호하는 직업이라고 했다. 티켓은 원래 $1, 그러나 개별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행색을 보아가며 $5, 때로는 $10를 받기도 한단다. 그러니 그 삥땅 수입이 쏠쏠하다는 것이다.
버스는 매표소를 지나 비포장도로를 7km 정도 덜컹덜컹대며 달린다. 왼쪽 옆으로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만 같은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다. 우리의 50년대 말을 연상케 해 주는 모습들이다. 집 앞에는 거의 예외 없이 좌판을 늘여놓고 수산물들을 팔고 있었다. 두세 살 되는 어린애들은 모두들 벌거벗었다. 그보다 조금 큰 애들은 모두가 맨발이었다. 사방에는 온통 비닐 등 오물 천지였고, 비린내, 생선 썩는 냄새 등이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문득 6․ 25 직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맨발로 다니다 보면 물컹 밟히는 것이 있었다. 아무데나 배설해 놓은 대변이었던 것이다. 헐벗고 배곯는 일도 참기 어려웠지만 더욱 참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가이드가 말한다. 여기엔 아무나 말뚝 박으면 내 땅이 될 수 있는 곳이란다. 1960년대의 봉천동 산꼭대기가 바로 그랬었다. 친구 한 놈이 거기다 말뚝을 박아놓는 바람에 그 자리를 빼앗길까봐 시간만 나면 가서 지켜주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그래도 그놈은 판잣집 터라도 하나 마련했지만, 그제나 이제나 거북이인 나는 그런 공짜 집터마저도 차지하는 재주가 없어 늘 고생만 하면서 평생을 살아왔다. 매사 잽싼 그놈은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지금은 성공하여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우기라면 넘실거리는 물줄기로 채워져 있을 곳인데 지금은 말라서 누런 황토 흙만 보이는 호수 바닥이었다. 거기서 포클레인이나 준설차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버스가 멈춰선 곳에는 헙수룩한 보트들이 보였다. 그 중의 한 배로 탑승하는 우리를 누군가가 카메라로 열심히 촬영을 한다. 나중 그것은 접시 위에 인화되어 우리들에게 $3씩을 소비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우리는 880여 종의 민물 어족이 서식하고 있다는 호수에 떴다. 더러는 가옥의 형태로, 더러는 선박의 형태로 살아가는 수많은 수상족(水上族)들, 동남아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긴 했으나, 이곳의 모습이 한결 안쓰러웠다.
이들은 70년대 중반 이후 80년대 초에 몰려들기 시작한 베트남의 보트피플들이 대부분이란다. 선거철만 되면 2주 전쯤부터 이들에게 우리의 주민등록 비슷한 것이 부여된단다. 그리고 선거만 지나면 1주일 이내에 그걸 모두 회수해 간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뭍으로는 오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그들의 벌이 수준이 육지의 캄보디아인들보다도 낫다는 것이었다. 캄보디아인 단백질 공급원의 70% 이상을 이 톤레샵 호수에서 담당한다고 하니 그럴 법도 했다.
전기 공급이 되지 않아 자동차 배터리로 초저녁의 불을 밝히는 사람들, 그러니 자연적으로 출산율은 높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저 출산율 해소방안을 이런 데서 찾아볼 수는 없을까? 그러니까 저녁 7시 이후에는 전기 공급을 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한번 해보았다. 어쩌다 TV가 있는 집에는 이웃 사람들 모두가 모여 킥복싱 구경을 한단다. 전국적으로 수돗물의 혜택을 보는 사람은 9% 정도, 그래서 특히 수인성 전염병이 많다고 했다.
바다, 아니 호수 가운데로 들어갔다. 최은유 목사가 세웠다는 수상학교도 있었고,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는 대구 칠곡교회(大邱漆谷敎會)라는 한글간판의 선상교회도 보였다. 물은 누런 황토빛, 그런데도 1급수란다. 저 1급수가 얼마만큼 오래 버틸까, 걱정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르면 논두렁에 흐르는 물을 두 손으로 움켜 마셔도 별 탈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큰일 날 일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앞으로 30~40년, 아니 최근 급속도로 악화되는 오염실태를 감안하면 20~30년만 지나면 이 톤레샵 호수는 썩은 호수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보트 관광이 끝나는 곳에는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 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T를 입은 소년도 보였다. “초콜릿 기브 미!”를 외치던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10대 내지는 12대 경제 대국으로 변모해 있는데, 여기 캄보디아는 언제나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어떤 학자들은 오히려 이런 곳의 생활만족도가 경제 대국들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먹고 사는 게 급한 판국에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일, 그저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으면 만족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과거 우리의 경험으로 봐서도 그저 밤새 안녕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저는 배 터지게 먹고 나서 게트림 하면서 ‘가난한 나라일수록 삶의 만족도가 높았다’고 떠들고 있으니, 글쎄, 그런 걸 믿고 우리도 다시 50년대나 60년대로 되돌아가 볼까? 아니, 우리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고, 바로 그렇게 말하시는 고명하신 학자님들께서나 그 시절로 되돌아가 보심은 어떨는지? 본인 스스로 돌아가기 힘들다면 국가의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분들을 50년대나 60년대로 정중히 모셔가 보는 일은 어떨는지?
이곳 사람들의 가난을 보면서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 보느라니 저절로 울컥! 감정이 솟구친다. 천 년 이상을 지냈으면 이젠 풀어줄 만도 한 앙코르와트의 저주, 그러나 내가 보기엔 아직도 캄보디아의 앞날은 어두웠다. 저 수상족들을 육지에로의 이동을 허용하고, 톤레샵 호수의 수상가옥이 없어지는 날, 그날이 와야지만 톤레샵(넓은 호수)의 기적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다. 우리 다 같이 그날을 기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