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수필 순례 33) 朴戴陽의 東槎漫錄 중 東槎記俗[상]
(고전수필 순례 33)
朴戴陽의 東槎漫錄 중 東槎記俗[상]
박대양 지음
이웅재 해설
…혼인에 중매가 없으며 납폐(納幣)하는 예절도 없다. 다만 남녀가 서로 보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비록 부모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않으며, 사모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즉시 서로 혼약(婚約)을 맺는다. 여자를 맞아 문에 들어오면, 친척과 벗을 모아놓고 신인(新人)으로 하여금 술잔을 권하게 하고 그대로 집에 살게 한다. 살다가 조금이라도 마땅하지 않은 데가 있으면 곧 쫓아 보낸다. 개가(改嫁)하거나 개취(改娶)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새로 시집가는 자가 자녀를 거느리고 가는 자가 있으며, 비록 태정대신(太政大臣; 首相)의 집안이라도 혼취(婚娶)는 모두 다 이와 같다. 할아버지가 같은 사촌 간에도 서로 장가들고 시집가곤 한다. 말하기에도 더럽다. 태정대신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 가묘(家廟)에서 선조에게 제사하는 예법이 없고, 오직 집 안에 한 신당(神堂)이 있어서 매일 아침에 밥 한 숟갈이나 혹은 과자 따위를 그 앞에 차려 놓고 손바닥을 치고 머리를 조아리고 마친다. 그나마 근간의 개화 이후로 이 풍속을 실행하는 자도 몇 사람 되지 않는다고 한다.
법률과 정령(政令)은 하나같이 불국(佛國; 프랑스)의 규칙에 좇으며, 비록 훈귀(勳貴)와 권요(權要)인 사람이라도 법령에 저촉되어 범하는 사람은 드물다. 일찍이 철도를 개조하고 사람의 경유 통행을 금지하였을 때에, 좌대신(左大臣)의 승용차가 잘못 그 길을 범하였다가 순사에게 붙잡힌 바 되어 벌금 백 여원을 물었다고 한다. 무릇 백성이 죄가 있어서 조사하여 다스리게 되면, 의원(議員)이 있고 재판이 있으며, 형벌을 사용하여 심문하지 않는다. 양조(兩造 원고와 피고)가 마주 앉아서 극도로 변설(辯說)을 개진(開陳)한다. 비록 유죄한 자일지라도 허물을 아름답게 꾸미고 잘못을 옳게 꾸미어 말로 능히 잘 변론하면 무죄로 벗어날 수 있고, 만약 말이 능히 도면(圖免)할 만하지 못하면, 정부에서 일찍이 대언관(代言官)을 두어, 죄 있는 자를 대신하여 마디마디 변론분석(辯論分析)하여, 가벼운 법에 따르기를 힘쓴다. 비록 사죄(死罪)를 범한 자일지라도 사형에 이르는 일은 드물며 오직 징역은 유기징역, 무기징역이 있을 뿐이다. 유기징역은 12년을 한계로 하고 붉은 죄수복을 입고 노역(勞役)에 진력하게 한다. 죄 있는 자라도 장형(杖刑)을 하거나 형살(刑殺)하는 법은 없고, 다만 징역에 구사(驅使)하여 붉은 옷을 입고 국역(國役)에 종사하게 하고 하루에 10전씩 우리의 돈 한 냥을 임금으로 주되, 10전 내에서 매일의 식비를 제하고 나머지는 관에 바친다. 관에서는 그것을 받아서 하나하나 장부에 기록한 뒤에 혹은 빚으로 내주어 이식(利殖)을 늘려주기도 한다. 징역 사는 자가 형기가 다 차서 면역(免役)할 때를 당하면 하나하나 내주고 하나도 빼앗는 일이 없다. 징역을 마치고 출옥한 자가 만약 다시 범죄하거나, 사죄에 해당하는 자는 놓아주지 않고 이 두 가지를 같게 일컬어[同謂;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 무기도형(無期徒刑)이라고 일컫는 종신징역에 처하고, 그가 남긴 돈은 그의 원하는 바에 따라 그의 가속이나 혹은 족척에게 나눠준다.
국내의 매년 사용하는 바의 예산은 위로 임금의 봉록에서부터 외국 부채의 이자에 이르기까지 본전은 물론 총계 7천 5백 60만 6천 59원인데, 매년의 세입은 항상 부족한 폐단이 있어서 지폐를 만들어 국용을 보충한다.
국내의 미곡 생산량은 비전(肥前; 에키젠, 지금의 사가[佐賀], 나가사키현[長崎縣] 지방), 비후(肥後; 에키고, 지금의 熊本縣 지방)의 두 주가 가장 많고 나머지는 다 땅이 척박하다. 그런 까닭에 부세(賦稅)를 수납하고 봉록을 나눠주는 것을 다 전폐(錢幣)로 한다. 세는 (稅穀을 돈으로 환산하는) 일정한 가액(價額)이 있다. 만약 흉년이 들어 곡가(穀價)가 비싸게 되면 수확한 곡식으로 세금을 마련해 바칠 수 있지만, 풍년이 들어 곡가가 떨어지면 부족액은 빌려야 한다. 완납(完納; 刷納)하지 못하는 자는 그의 가산을 관(官)에 몰수하고, 그 지세는 매년 배정(排定)하여 징납(徵納)하는데 이것을 신대한(身代限)이라고 이름한다. 그 몸이 마칠 때까지를 완납하는 기한으로 한다는 말이다. 비록 빈 대지(垈地)와 갈지 않은 땅과 재년(災年)에 씨를 뿌리지 못한 해에도 다 세금을 징수하되 조금도 가감하는 일이 없다. 근년에는 개화 이래로 비록 빈궁한 집의 서민일지라도, 사치하는 습속이 커져서 씀씀이가 매우 커졌다. 그런데 해를 잇따라 풍년이 들어 곡가가 등귀하지 않으니, 민생(民生)이 곤궁하여 신대한을 범하는 자가 10에 2∼3은 된다고 한다.
♣해설:
『동사만록(東槎漫錄)』은 갑신정변 직후에, 봉명사신으로 일본에 갔던 정사 서상우(徐相雨)의 종사관이었던 박대양(朴戴陽)의 문견 및 소감을 적은 여행기이다.…저자 박대양은 그때 유학(幼學)으로서 정사의 종사관으로 추천되어 처음 벼슬길에 나온 사람이다. 그에게 벼슬을 시키기 위하여 처음에 서반직 사용(司勇)에 붙이고, 다시 그것을 근거로 하여 동반직(東班職) 주사(主事)로 임명한 것이 이 기록 속에 나온다. 이 기록으로 보아 그는 문필이 능하였으며 시국관으로는 수구파에 속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저자에 대한 그 이상의 사적은 알 수 없다.…
이《동사만록》을 남긴 봉명사신(奉命使臣) 일행은 바로 이 갑신정변의 뒷수습을 위하여 사대당 정부가 일본에 보낸 사절이다. 정사 서상우와 부사 목인덕(穆麟德)과 종사관 박대양이었다.…우리는 이 여행기를 통하여 당시의 일본이 얼마나 개화에 열중하여 눈부신 전진을 하고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일본의 군대와 무기 제작을 보고 ‘어째서 덕을 닦지 않고 무기를 만드는가? 무기를 만드는 것이 무기를 녹이는 것만 못한데……’ 하고 개탄만 하였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南晩星의 해제에서 발췌)
(고전수필 순례 33) 박대양(朴戴陽)의 동사기.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