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 줄 세우기 2
낱말 줄 세우기 2
이 웅 재
5월 9일, 일요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가랑비가 내린다. 문득 '가랑비'의 정확한 뜻을 확인하고팠다. 국어대사전을 펼쳤더니, '이슬비보다는 좀 굵으나 잘게 내리는 비. 세우(細雨).'라 설명되어 있었다. '굵으나', '잘게', '세(細)' 등의 표현으로 보아서 '가랑비'란 비의 굵기에서 명명된 이름임에 틀림없었다.
'이슬비보다는 좀 굵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슬비'는 어떻게 풀이되어 있을까?
'이슬비: 아주 가늘게 내리는 비. 는개보다 굵고 가랑비보다 가늚.' 그럼 '는개'는? ‘안개보다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 좀 가는 비.’ ‘안개’는?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미세한 물방울이 되어 지상에 가까운 대기 속을 연기처럼 부옇게 부유(浮遊)하는 것. *이내.’
여기까지를 정리하면, ‘가랑비〉이슬비〉는개〉안개’가 되는 셈인데, 그 이상과 이하에로의 전개는 연결이 되질 않는다.
*표의 ‘이내’를 찾아보니, ‘해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호젓한 기운. 남기(嵐氣)’라 되어 있고, ‘남기’는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에 ‘山에 가득한 안개. 山氣’로 풀이되어 있었다. 다시 ‘山氣’는 ‘산에 끼는 雲氣, 또는 뽀얗게 피어 오른 안개’란다.
‘嵐’자가 ‘아지랑이 남’자이기에, 국어대사전에서 ‘아지랑이’를 찾았다. ‘아지랑이: 맑은 봄날 먼 공중에 아른거리는 공기 현상(空氣現象). 복사열(輻射熱)로 말미암아 공기의 밀도가 고르지 못하여 빛의 진로가 불규칙하게 굴절되어 아른아른하게 보임. 부기(浮氣). 야마(野馬). 양염(陽炎). 유사(遊絲).’ 아지랑이를 가리키는 한자 어휘가 그렇게 많다는 것, 그리고 ‘야생마(野生馬)’의 준말인 ‘야마(野馬)’로도 불린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번에는 이들과 비슷한 ‘노을(놀)’의 낱말풀이를 찾아보았다. ‘해가 뜰 무렵이나 질 무렵에, 공중에 있는 수증기가 햇빛을 받아 하늘이 벌겋게 보이는 기운.’
이들의 차이를 확인해 보면, ‘안개…아침에, 이내…저녁에, 남기…산에, 아지랑이…봄에’ 끼는 것이요, ‘노을은…아침이나 저녁에’ 끼는 것으로, ‘안개’나 ‘이내’와의 차이점은 ‘벌겋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노을’의 뜻에는 또 한가지, ‘바다의 사나운 큰 물결(뱃사람 말)’도 있었다. ‘바다의 사나운 큰 물결’은 한자어로 ‘백두파(白頭波)’라고도 하는 것인데, ‘석양에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의 수평선에서 희번덕거리는 놀’로서 우리말로는 ‘까치놀’이라 하기도 한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어 버렸는데, 다시 비의 크기로 돌아가 본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고, ‘가랑비’를 ‘세우(細雨)’라 하였으니, 그보다 더 큰 비가 있어야 하겠는데, 사전을 통해서는 연결이 되질 않는다. 상식적인 접근으로 ‘장대비’를 찾아보니, ‘장(長)대비: 장대처럼 굵고 거세게 내리는 비. 작달비.’라 되어 있었다. 따라서, 비의 크기는, ‘장대비=작달비〉가랑비〉이슬비〉는개〉안개’의 순으로 줄 세우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럼 ‘소나기’는? ‘소나기: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곧 그치는 비. 특히 여름에 많은데,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는 수가 있음. 백우(白雨). 취우(驟雨)’라는 풀이였다. ‘소나기 삼형제’라는 말이 있어, ‘소나기는 반드시 세 줄기로 쏟아진다’는 설명도 덧붙어 있었다. 대한한사전의 ‘白雨’에는 ‘①누리 ②소나기’로 나와 있었고, ‘驟雨’는 ‘날이 말짱하다가 별안간 쏟아지는 비’라 설명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소나기’는 ‘갑자기(별안간) 쏟아지다가 곧 그치는 비’로서, 특히 시간의 지속성과 관련된 말이라 여겨진다. ‘여우비’의 ‘볕이 나 있는 날 잠깐 오다가 그치는 비’와의 구별점은 볕의 유(여우비) 무(소나기)와 그 크기 (소나기>여우비)임을 알 수가 있었고, ‘소낙비’는 방언이었다. ‘소나기’를 가리키는 말에는 폭우(暴雨), 능우(凌雨), 능우(陵雨), 맹우(猛雨), 호우(豪雨), 심우(甚雨), 쾌우(快雨), 급우(急雨), 대우(大雨) 등의 표현도 있었으나, 그 차이점을 규명할 수는 없었고, 그 정도가 심한 우리말로는 ‘억수’라는 말도 쓰이고 있었고, 그 반대쪽에 있는 말에는 ‘소우(小雨)’가 있었다.
시간의 지속성과 관련된 비의 명칭으로서는 또 ‘장마’가 있겠다. ‘소나기’는 그 지속성이 짧은 것임에 비해 ‘장마’는 그 지속성이 며칠, 몇 달을 이어지는 것으로, 고어에서는 ‘마(ㅎ)’라고도 했으며, ‘임우(霖雨), 장림(長霖), 구림(久霖), 구우(久雨), 적우(積雨), 적림(積霖), 숙우(宿雨), 장우(長雨), 매우(梅雨), 황매우(黃梅雨: 매화나무의 열매가 노랗게 익을 무렵에 내리는 비라는 뜻), 음우(霪雨), 음우(淫雨), 음우(陰雨), 음림(霪霖) 등이 있었고, 고전작품에서는 가끔 ‘삼일우(三日雨)’와 같은 말을 쓰기도 했다.
때를 맞추어 알맞게 내리는 비로는 ‘호우(好雨), 시우(時雨), 적우(適雨), 영우(靈雨)’ 등이 있었으며, ‘영우(零雨)’라는 표현도 있어 ‘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비’를 가리켰다. 말하자면, 이는 비가 내리는 모양과 관련된 말이겠는데, 이에는 ‘보슬비(바람 없이 조용히 내리는 가랑비. 보슬보슬 내리는 비)< 부슬비’도 있었다.
너무 딱딱한 낱말 줄 세우기를 한 것 같아 이번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속 타는 ‘가물(가뭄)’이 들었을 때, 비를 내려달라는 기우제의 기도문 하나를 소개하며 끝을 맺으려 한다.
‘龍雨龍雨龍雨龍龍龍不雨龍龍龍雨龍雨’ [權重求, 漢文大綱, 通文館, 1980, 卷頭辭에서]
(용아 비를 내려라, 용아 비를 내려라, 용이 비를 내려야 용이 용이지, 용이 비를 내리지 아니하면 용이 용인가, 용아 비를 내려라, 용아 비를 내려라)
용의 자존심을 건드려서(龍不雨龍龍: 용이 비를 내리지 아니하면 용이 용인가) 비를 내리게 하려 한 우리 선인들의 용심(用心)의 발상이 재미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