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화약고 기문(記文) 등 기문을 많이 쓴 정이오(鄭以吾)

거북이3 2012. 4. 25. 01:01

 

 

경북 인물열전 (65) 화약고 기문(記文) 등 기.hwp

경북 인물열전 (65)

          화약고 기문(記文) 등 기문을 많이 쓴 정이오(鄭以吾)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9. 慶尙道 善山都護府(現 龜尾市) 名宦 條]

                                                                                                                                                                                         이 웅 재

 

정이오(鄭以吾: 1347-1434)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장가요 명환(名官)이다.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 또는 우곡(愚谷), 시호는 문정(文定), 본관은 진주(晉州)로, 찬성사 정신중(鄭臣重)의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우왕 2)에 예문관검열이 된 뒤, 삼사도사, 공조‧예조의 정랑과 전교부령(典校副令), 지선주사(知善州事) 등을 역임하였다.

1398년에는 이첨(李詹)‧조용(趙庸) 등과 함께 군왕으로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린 후,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이 되었으며, 이어서 조준(趙浚)‧하륜(河崙) 등과 함께『사서절요(四書節要)』를 찬진(撰進)하였다.

1400년(정종 2) 성균관악정(成均館樂正)이 되었으며, 병조의랑(兵曹議郞), 예문관의 직제학 등을 거쳐, 1403년(태종 3) 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409년에는 병서습독제조(兵書習讀提調)로 동지춘추관사를 겸임,『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그 공으로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지공거(知貢擧: 과거를 관장하던 주 시험관)를 겸하였다. 1418년 70세의 나이로 스스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이 즉위 후에는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경상남도 진주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속현인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도 하였으며,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젊어서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의 문인들과 교유하였고, 늙어서는 성석린(成石璘)‧이행(李行) 등과 교유하였다. 청렴하고 간결하여 문치(文治)에 여유가 있었다는 평을 받는다.

저서에 『교은집(郊隱集)』·『화약고기(火藥庫記)』·『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등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구암서원(龜岩書院)에서 향사를 지낸다.

제주의 역사 자료로서 가장 오래된 문헌인 『성주고씨가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제38권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의 풍속과 형승에 관한 글과 함께 제주도에 관한 귀중한 자료라는 성격을 지닌다.『성주고씨가전』에는 제주의 개국신화인 삼성신화(三姓神話)가 실려 있는데, 삼성신화에 관한 자료를 당대 함께 활동하던 제주 출신의 문신 고득종(高得宗)으로부터 건네받았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성주고씨가전』에 수록되어 있는 삼성신화는 1454년(단종 2)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과 함께 양대 계보를 이룰 만큼 후대 사서의 전범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이오의 글 중에는 특히 기문(記文)이 많다. 기문 중 「음죽현향교기(陰竹縣鄕校記)」와 「연산현향교기(連山縣鄕校記)」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사대부들이 당시의 특권양반들의 사학(私學)에 대항하기 위하여 집중적으로 설립하였던 지방관학인 향교(鄕校)의 실태를 알아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런가 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경도(京都) 하(下) 문직공서(文職公署) 군기시(軍器寺) 조에는 그가 지은 화약고(火藥庫) 기문이 있어서, 그의 국가 안보관을 엿볼 수가 있기도 하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군기시(軍器寺≒武庫) 부정(副正) 최해산(崔海山) 군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군이 일찍이 왜구가 침입하면 제어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여, 수전에서 화공을 쓸 방책을 생각하고서 염초(焰硝: 불꽃[焰]이 일어나는 초석[硝石], 곧 질산칼륨으로 화약의 원료임.)를 구워서 쓸 기술을 찾았다. 당 나라 이원(李元)이란 자는 염초 굽는 장인인데, 공(公)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고, 은밀히 그 기술을 물어서 집에서 부리는 종 몇 명을 시켜 사사로이 기술을 익히게 하여, 그 효과를 시험한 뒤에 조정에 건의하여 홍무 10년 정사 10월에 처음으로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하여 염초를 굽고, 또 당 나라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자를 모집하여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고 공이 직접 감독하였다. 그러나 모두 공의 이러한 일을 위험하게 여겼더니, 왜구가 전라도ㆍ충청도에 크게 침입하여 그때 인심이 흉흉하였으나, 심덕부(沈德符)ㆍ나서(羅湑)와 우리 선군(先君)이 세 원수(元帥)가 되어 누선(樓船) 80척에 화통(火㷁)과 화포(火砲)를 비치하고서, 진포(鎭浦)에서 맞아 공격하여 왜선 30척을 불사르고 괴수 손시라(孫時剌)를 잡아 죽였으니, 이것은 홍무 13년 경신 8월에 있던 일이다.…

이상이 화약고 연혁의 대략이다.… ‘화기는 중국에서도 비밀로 취급하는 기술이므로…그 후 최군이 이 직책에 들어와서 그 화기를 보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완구포(碗口砲)이니 평소 선군(先君)에게서 그 이름과 제도를 익숙하게 들은 것이다.’ 하였다.…아, 최군은…그 아버지가 비밀리에 남겨 준 기술을 잃지 않아, 아버지가 앞에서 시작한 것을 아들이 뒤에서 계승하였으니, 참 유능한 신하라 하겠고, 또한 유능한 아들이라 하겠다. 아버지의 이름은 무선(茂宣)인데, 성품이 통달ㆍ민첩하여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상고하였고, 또 중국어를 잘 알았다.…

지금 왜구가 우리 수군과는 감히 배를 타고 승부를 비교하지 못하는 것은 앞서 진포(鎭浦) 싸움이 있었고, 뒤에는 남해(南海)의 승전(勝戰)이 있었기 때문이다.…

30년 동안 왜구의 침략을 당했을 때에도 태평을 유지하게 된 것은 다른 힘이 아니고 여기에 있었던 때문이니, 아, 참으로 힘쓸 바를 안 분이라 하겠다.…

정이오가 지은 기문에는 귀후서(歸厚署: 예조의 속아문으로 장례업무를 담당하던 관서, 귀후서라는 명칭은 죽은 사람에게 후하게 하면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간다는 민덕귀후[民德歸厚]라는 의미이다.)에 관한 것도 있다. (2012.4.24. 원고지 1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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