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미립

검정 고무줄 사오기

거북이3 2013. 1. 19. 11:55

 

 

@검정 고무줄 사오기.hwp

 

          검정 고무줄 사오기

                                                                                                           

                                                                                                               이 웅 재

 

명령이 떨어졌다. 아내의 명령이다. 검정 고무줄을 사오라는 것이었다. 분당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까 모란시장에 가서 사오라는 것이었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아들놈이 군 생활을 하는 전방 OP 막사에 쥐란 놈들이 전세금도 안 내고 월세도 없이 들끓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쥐덫을 사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요새 그런 구닥다리를 파는 곳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아, ‘처녀붕알’도 살 수 있다는 모란시장이었다. 그랬다. 쥐덫은 거기서 아주 쉽게, 돈도 몇 푼 들이지 않고 살 수가 있었다.

모란시장까지 걸었다. 야탑역에서 전철을 타도 경로우대, 무임승차권이 있지만 삼가기로 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민주당을 지지하는 젊은이들이 ‘노인들의 전철 무임승차’를 폐지하라고 하지 않는가? 참으로 고마운 세상이다. ‘노인들은 힘드시니까 투표 같은 허접스러운 일일랑 그만두시라’는 배려(?)에 이어, 전철 무임승차까지도 폐지하라고 하니 이 어찌 고맙지 않으랴? 노인들 건강을 위하여, 걸어서 30분 내외쯤 걸리는 곳일랑 시간도 넉넉한 분들이니 스적스적 ‘산책’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데에는 미상불 고맙다는 마음을 아니 가질 수가 없는 일이다. 한겨울, 몇십 년 만의 추위라나, 뉴스 때문에 좀더 추위에 떨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검정 고무줄은 왜 필요한 것일까? 마님답지 않았다. 울 마님, 그래도 나름대로 멋을 아는 사람인데, 그 고무줄을 엮어서 신발에 묶어 신고 다니려고 한다는 것이다. 시상에…. 키가 훤칠하니 커서 시원시원하게 생겼는데, 그 덩치에 고무줄로 묶은 신발이라니…, 가당찮다. 팔불출이 되어도 할 수가 없다. 울 마님, 싸구려는 딱 질색인 사람이다. 명품족까지는 못 되어도 상당히 세련된 물건만 골라 사는 사람이다. 나하고는 격이 다른 종족이다. 나는 싸고 실용적이면 최고인 사람인데, 울 마님에겐 천만의 개말이다.

그런 분께서 신발에 묶어 신고 다니려고 검정 고무줄을 사오라는 명령이다. 요새처럼 ‘도시형 아이젠’까지 등장한 시대에 눈길에 미끄러질까봐 검정 고무줄로 신발을 감고 다니겠다니, 이젠 정년퇴직하고 백수가 된 처지에 감읍할 수밖에 없지를 않은가? 어느 영(令)이라고 그 ‘말’을 거역할 것인가? 젊은이들의 ‘고마운 배려’에 십분 감읍하면서 집을 떠나 ‘무잡(물잡<물잡이)모퉁이’를 지나 삼천갑자 동방삭이가 숯을 씻고 있는 저승사자에게 끌려갔다는 탄천(숯내)변을 헉헉대도록 걸어서 모란시장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드디어 시장의 입구, 초등학교 소풍을 갔을 때, ‘보물찾기’를 안 해 본 사람이 있을까? 눈을 부릅뜨고 ‘검정 고무줄’을 찾아 헤매던 나는, 드디어 내 보물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야호! 야호다.

고무줄을 파는 사람은 고무줄을 손목에다가 걸고는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일까? ‘호객’하는 소리는 없었다. 그래서 조금은 마음이 낙낙해졌다. 나는 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물었다.

“이 고무줄 천 원에 몇 개입니까?”

“네 개요.”

네 개? 뭔가 찜찜하다. 다섯 개도 아니고 네 개라, 다섯이라면 짝이 맞지 않은 숫자인데 이상하게도 다섯이라는 숫자에는 익숙한 느낌이 들고, 네 개가 짝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손가락·발가락의 숫자, 오행(五行), 오대양(五大洋), 오감(五感), 오미(五味), 오곡(五穀), 오장(五臟) 등이 모두 5란 숫자와 관련이 있다. 그런가 하면, 농구에서 한 팀을 이루는 인원도 5명이요, 장기에서 가장 작은 말인 졸(卒)과 병(兵)도 각각 5개씩이다. 어디 그뿐인가?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도 5년마다 시행되지 않던가?

한 개, 두 개, 세 개에서도 소원(疏遠)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네 개만이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죽을 사(四)’ 자가 들어서 그럴까? 그래서 말했다.

“다섯 개 줘요.”

선뜻 ‘그래요.’라고 할 줄 알았다. 그도 네 개는 짝이 맞지 않는 느낌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까. 그런데 안 그랬다. 그에게는 짝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 됩니다, 안 돼요. 얼마나 남는다고….”

이상했다. ‘안 됩니다.’라는 말 한 마디만 했으면, 두 말 없이 샀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은 세 마디. 짝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세 마디였다. 그래서 살 생각이 사라졌다. ‘치! 딴 데 가서 사지.’ 속으로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나는 기다렸다. ‘에이, 그까짓 것 한 개 가지고…. 옛수, 가져 가슈.’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안 그랬다. 그래서 내 발걸음은 돌아설 수가 없었다. 주춤주춤 걸어서 예전 버스 터미널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걸으면서 좌우 쪽을 유심히 살폈다. 검정 고무줄을 파는 사람이 또 없나 하고. 그런데 한참을 걸어가도 한 곳도 없었다. ‘그냥 살 걸 그랬나?’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없었다. 고무줄을 파는 다른 사람은 정녕 없었다. 할 수 없었다. 마님 명령을 안 지킬 순 없는 일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가는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사람이 없었다. 고무줄은 있는데, 그걸 파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우두망찰, 나는 고무줄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지나가던 아줌씨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고무줄, 천 원에 몇 개유?”

“나는 고무줄 장수가 아닙니다.”

그녀는 갔다. 조금 있더니 고무줄 장수가 왔다.

“자아, 천 원. 고무줄 주시오. 도대체 어딜 갔다 오는 거요. 어떤 아줌씨 한 사람도 사러 왔던데….”

“그러면 팔지 그랬어요. 소피가 마려워설랑은….”

“남의 것을 어떻게 내가 팔겠소?”

퉁명스레 말하며 고무줄을 받은 후 뒤돌아섰다. ‘그러면 팔지 그랬어요.’ 하는 소리가 나를 따라왔다. 마음은 가뿐했다. 순박한 믿음이 훈훈했던 것이다. 돌아서 나오는 길에 보니, 아, 이게 웬 일인가? 고무줄을 놓고 파는 좌판이 오른쪽에도 하나, 왼쪽에도 하나가 있질 않은가? 세상사란 원래가 그런 법이 아니던가? 이런 것도 ‘머피의 법칙’과 관련되는 일일까?

울 마님 명령만 완수했으면 됐지,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공? 훈훈했던 순박한 믿음까지 얻어보질 않았는가 말이다. (2013.1.19. 원고지 17매)

 

 

 

 

 

@검정 고무줄 사오기.hwp
0.03MB
댓글수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