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수필 쓰기 3) [착상, 주제, 제목, 소재, 제재]

거북이3 2008. 10. 14. 00:12

(수필 쓰기 3) [착상, 주제, 제목, 소재, 제재]

 “삼국유사” 권2 경문대왕조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 온다.

 경문대왕은 왕이 되고 난 뒤 갑자기 귀가 길어져서 나귀 귀처럼 되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왕의 두건을 만드는 복두장(幞頭匠)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그 비밀을 남에게 말하지 않더니 죽을 때가 되어 도림사(道林寺)의 대나무 숲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를 향해 외쳤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의 귀와 같다." 그 후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가 서로 부딪치며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의 귀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자 왕은 그 소리를 싫어하여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 산수유를 심었더니, 바람이 불면 다만 "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고만 하였다고 한다.

표현 본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기에 죽어가면서까지 그 비밀을 발설하고야 말았을까? “너만 알고 있어!”라면서 옆 사람에게 귀엣말로 한 얘기는 얼마 안 되어 그 “너만 알고 있어!”라는 말까지 꼬리표처럼 달고서 처음 말한 사람에게로 전달되는 게 현실이다.

 표현하고픈 본능, 그건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글쟁이들은 특히 그 표현 본능이 강렬한 사람들이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브리게의 수기”에서 말했다.

 “그것을 쓰지 않으면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죽어도 못 배길 그런 내심의 요구가 있다면, 그때 너는 네 생애를 이 필연성에 의해서 건설하라.”

 그러면 무엇을 써야 하는가? 컴퓨터 앞에 앉기는 앉았는데 막막하다. 넓은 바다 한가운데 나 홀로 유기된 듯싶은 느낌이다. 걱정하지 말라. 아무것이나 쓸 수는 있다. ‘아무것’이나. 그 ‘아무것’이 바로 소재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소재가 될 수 있다. 일반적인 말로 하면 재료요, 논문 따위에서는 자료라고도 하는데, 글쓰기에서는 그것을 소재(素材)라고 한다. 우리말로 한다면 글감이 되겠다. 들이나 산에서 자라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도 소재가 될 수 있고, 발길에 차이며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 바닷가 백사장의 수많은 모래알 하나하나도 소재가 될 수 있다. 동물, 식물, 무생물…,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글감이 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생각, 느낌, 주장…무엇이라도 좋다. 그런 것들은 모두 소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아무것이나 쓸 수는 없다. 그건 글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의 글로서 대접받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대접받을 수 있는 글, 그것은 글 쓰는 이의 메시지가 담겨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표현 의도가 분명한 글이라야 하는 것이다. ‘표현 의도’,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주제’(Thema, Theme, Subject)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고 싶은 것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그것이 곧 주제가 되는 것이다. 주제는 가치지향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그것이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나면 설득적, 지도적 기능을 지니게 되어 독자로부터 반발을 살 수도 있다. 그래서 대체로 암시적으로 주제를 드러내는 방법을 즐겨 사용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라서 때에 따라서는 명시적인 주제를 사용할 수도 있다.


 윤오영의 ‘달밤’을 보자.


 내가 잠시 낙향해서 있었을 때 일.

 어느날 밤이었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 웃마을 김군을 찾아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맞은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가겠습니다." 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 마을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노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

 "마침 잘 됐소. 농주 두 사발이 남았더니...." 하고 권하며, 스스로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먹어 본 적은 일찌기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 버렸다. 이윽고

 "살펴 가우." 하는 노인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왔다. 얼마쯤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짤막하지만, 잘 익은 농주처럼 푸근한 인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명시적이지 않은 주제가 달밤의 배경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김규련의 ‘거룩한 본능’ 같은 작품은 주제가 제목에 그대로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주제는 대체로 제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앞에서 말한 바대로 가급적이면 제목에서 주제를 암시적으로 넌지시 일깨워주는 것이 좋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니까 작품에 따라 걸맞은 방법을 사용하면 될 것이다. 명시적인 주제는 ‘거룩한 본능’처럼 대체로 추상적인 낱말을 사용한 제목을 주로 사용하며 대부분 세태 풍자적인 느낌을 가지게 만든다. ‘거룩한 본능’의 경우, 황새들도 그처럼 암수 사이의 정이 거룩한 본능으로까지 여겨지는데, 우리 인간은 오히려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명시성에서 오는 단순함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라고나 할까?

 암시적인 주제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구체적인 사물을 제목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다음 예문을 보자.


  달걀 꾸러미

                                                            이 웅 재

 1․4 후퇴 시 맨몸으로 남하한 아버지는 말하자면 돌팔이 한의사였다. 한의사라는 아무 증명서도 없으니, 의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확고한 의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위에 급한 환자가 있을 때에는 그냥 모르는 체할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서는 간혹 첩약 몇 첩씩을 지어 주시기도 했다. 어린 나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러시면서도 환자나 그 보호자에게서 약값 따위를 요구하신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쩌다 어머니께서 바가지라도 긁을라치면, 󰡒�난 면허가 없지 않소.󰡓�하는 말씀 한 마디로 끝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버지는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무능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가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문 밖에 분명 사람의 인기척이 있는데, 집안으로 들어오는 기색은 없다. 한 동안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께서 뒷간에라도 가시는 기척이 있으면, 그 때에야 그 얼굴 없는 사람은 아버지가 거처하시던 사랑방 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닫는다. 안방에 있던 내가 궁금하여 삐죽이 머리를 내밀면, 아버지의 혼잣말만 내 머리통 위에 내려앉곤 했다.

 󰡒�쯧쯧, 이런 건 왜 가져 오누?󰡓�

 사랑방 문 앞에는 달걀 꾸러미 하나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은근히 아버지의 인품을 나타낸 이 글은 그 제목을 ‘달걀꾸러미’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것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객관적 상관물인 것이다. ‘객관적 상관물’이란 엘리어트가 실생활에 있어서의 정서와, 문학작품에 구현된 정서의 절대적 차이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사용한 말로서,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떼의 사물, 정황, 일련의 사건으로서, 바로 그 정서를 곧장 환기시키도록 제시된 외부적 사실들(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민음사, 1976. pp.15-16)”을 말한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분명히 김소월의 개인적 정서와 관계가 있으나, 이별하는 남녀 관계에서 버림받는 여자가 혼자 말하는 자가 되어 있는 객관적 정황을 마련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정황이 김소월의 개인적 감정의 객관적 상관물이 된다. 슬픈 감정을 그냥 ‘아아 슬프다!’고 토로하는 것은 객관화되지 못한 것이다.”(위의 책, p.16)


 이처럼 주제는 대체로 그 글의 제목에서 명시적이거나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제목을 정하는 일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사람의 경우에도 이름이란 매우 소중한 것이 아니던가? 뿐만 아니라 제목은 사람으로 치자면 얼굴과도 같은 것이다. 독자가 가장 먼저 대하고 첫 인상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 다름 아닌 제목인 것이다. 제목 하나 바꾸고 난 다음에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도 있지 않은가?

 주제는 어떻게 정하는가? 때에 따라서는 주어진 주제로 글을 써야 하는 경우도 있고, 청탁 원고가 아니더라도 주제를 정해 놓고 글감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흔한 방법으로는 이것저것 글감을 찾아 헤매다가 이 소재야말로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효과적으로 나타내줄 수 있겠다 싶은 것은 것을 맞닥뜨리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바로 착상(着想)이라 할 것이다. 발상(發想)이나 영감(靈感)이라는 말로도 표현하는 것으로, 한 편의 글을 쓰게 되는 동기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영감이란 말로서도 표현하듯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는 차별화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창의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만의 생각, 나만의 정서, 나만의 표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한 착상이 잘 되는 곳으로는 옛날 중국 북송의 구양수(歐陽脩)가 ‘귀전록(歸田錄)’에서 말한 ‘삼상지학(三上之學)’이 있다. 곧 마상(馬上), 침상(枕上), 측상(厠上)이 그것인데, ‘마상’을 ‘자동차 운전 중’으로 바꾸면 오늘날에도 유효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

 문득 떠오른 생각, 그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도 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라도 머릿속에 번쩍 떠오르는 그 영감을 위하여 우리들은 언제나 메모지와 볼펜을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하윤(異河潤)이 말한 '메모광(狂)'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즐겨 쓰는 여행기들은 바로 그러한 메모 때문에 가능한 글이라 하겠다.

 착상에 의해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표현하고픈 주제가 결정되면 그 주제를 형상화하기에 적합한 소재들을 수집해야 한다. 글감이 풍부해야 많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는 점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글쟁이들은 늘 좋은 글감을 찾기 위해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좋은 글감을 찾기 위해서는 가급적 많은 사물과 맞부딪쳐서 체험을 확충하여야 한다. 책상머리에서 생각하여 찾아내는 소재도 있지만, 그건 생동감, 현장감이 부족하기 십상이다. 될 수 있는 한 신문기자처럼 발로 뛰어야 한다. 좋은 일도 행해보고 나쁜 일도 겪어보아야 한다. 사랑도 하여보아야 하고 때로는 배신도 하여보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그 상황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 느낌 등을 적확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발로 뛰어서 얻을 수 있는 소재라면 무엇보다도 ‘여행’이 중요한 소재 헌팅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여행이란 무엇보다도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그러니까 일종의 ‘벗어남’이라 할 수 있겠는데, ‘벗어남’, 그것은 일종의 짜릿한 맛,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동반하는 일이라서 매우 훌륭한 소재를 제공해줄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그리워하면서 살아왔다. 둥실둥실 산 너머로 떠가는 뭉게구름을 보면서 그곳에는 어떠한 세상이 존재하고 있을까? 떠나고 싶은 마음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동경(憧憬)이라 하겠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리움, 곧 노스탤지어(Nostalgia)인 것이다. 그렇다. 여행이란 비일상적인 세계와의 대면이다 보니,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나 ‘발견의 기쁨’을 선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항에 놓여있는 그리움도 있다. 그건 바로 향수(鄕愁), 잃어버린 고향,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과거의 경험에 대한 그리움이다. 영어로는 홈식니스(Homesickness)에 해당하는 것이다. 미래지향적인 동경이 보다 유의적(有意的)일 수 있겠지만, 향수도 버리기에는 아까운 그리움이다. 여행이란 여러 가지 면에서 글쟁이들에게 많은 글감을 제공받을 수 있는 훌륭한 소재 헌팅의 방법이랄 수가 있겠다.  

 그러나 모든 것을 체험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진정으로 있어서는 안 될 배신이라든가, 또는 절대로 실행해볼 수 없는 일, 예컨대 독약을 먹고 죽을 때의 심정을 알아보자고 진짜로 독약을 먹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체험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경험이다. 체험이 직접적인 데 비하여 경험은 간접적이라고 하겠다.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것들이 말하자면 간접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글쟁이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 바로 경험이라고 하겠다. ‘알아야 면장’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많은 책을 읽자. 독서야말로 국력을 좌우하는 힘이 아니던가? 글쟁이가 글을 읽지 않으면 누가 글을 읽겠는가? 누구보다도 많은 독서를 해야 할 사람이 글쟁이임을 잊지 말자.


 그렇게 해서 얻은 글감들, 그러나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작품으로 형상화되기엔 아직 이르다. 아무리 그럴 듯한 글감이라도 주제에 걸맞지 않는 것은 작품에 사용될 수가 없다. 그러한 소재들은 과감히 제외시킬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소재들은 다음 날 다른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쓸 때를 위하여 메모지 속에 고이 보존해야 할 것이다.

 주제와 관련된 소재라고 해서 모두 선택받아 글로서 표현될 수는 없는 것이다. 글의 효과를 위하여, 또는 글의 분량을 위하여 배제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소재와 제재가 구분된다. 소재는 글을 쓰기 이전의 글감인데 비하여 선택되어진 소재, 곧 의미가 부여된 소재, 작품 속에 들어와 있는 소재가 제재라고 할 수가 있으니 이를 혼동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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