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문화 체험기 32)레몬과 오렌지의 차이는 무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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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문화 체험기 32)
레몬과 오렌지의 차이는 무어지요
이 웅 재
폼페이에서 협궤열차를 탔다. 열차는 터널을 많이 지나갔다. 기차는 국영철도가 아닌 사철(私鐵)이란다. 그래서인지 터덜터덜대는 고물 중에서도 고물이었다. 로마 시대부터 쓰던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하긴 그 시절에는 기차가 없었을 것이 나의 이러한 추측을 멍청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 고물 사철이라서 더 재미있기도 했다. 어떤 할아버지는 핸드폰을 날치기 당하고는 기차를 세웠다. 기차가 멈추자 뛰어가서 치기 범을 잡고서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이 폰, 약정 기간이 아직 3년이나 남았어.”
치기 범도 놀랐을 거다. 기차까지 멈추게 하고 쫓아와서 잡을 줄을 생각이나 했을까? 현지 가이드가 그럴 때 필요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우리가 그런 사정을 알고 ‘세상 차암!’ 하면서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 가이드 때문이었던 것이니까 말이다.
기차가 30여 분 해변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소렌토(Sorrento)였다. 이탈리아어로 ‘청춘, 열정’을 뜻하는 이 말은 기아자동차에서 차 이름으로 가져다 쓰기도 했다. 그런데 차 이름으로 쓸 때에는 통상 ‘쏘렌토’라고들 한다.
역에서 내리자 웬 아이를 안을 여인이 우리를 반긴다. 나는 피사의 사탑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던 기억 때문에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보면 가슴이 철렁한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동전 몇 푼을 건네주었더니 우리말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치기가 주업이고 구걸은 부업이라는데, 부업의 경우에서도 저처럼 관광객의 출신 국가까지도 판별하여 인사를 하는 그 직업의식은 정말로 철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의 중심지는 타소(Tasso) 광장이었다. 광장에는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유명한 시인 토르쿠아토 타소(Torquato Tasso)의 기념비가 우뚝 서 있었다. 광장 근처에는 야자수도 많았고 가로수로는 주로 오렌지 나무가 심겨져 있어 얼핏 제주도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가이드가 물었다.
레몬과 오렌지의 차이는 무어지요?”
레몬은 매우 ‘시고 어쩌고’ 하는 식의 상식적인 멘트는 답이 못 된단다. 시인 이상(李箱)이 죽음 직전에 했다는 말이 ‘레몬 향기가 맡고 싶소’였다는 것도 정답에서 한참 먼 오답이란다. 그러면 정답을 알아보자.
“길거리에서 흔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 오렌지여요.”
그저 형이하학적인 단순하고도 직설적인 말만을 정답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우리 ‘첩’의 채점 기준에 우리는 아무런 토를 달지 못했다. 정답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히 자리매김했던 오렌지 나무들과 헤어져 해안가로 가노라니, 60m 정도에까지 이르는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수직절벽 위의 건물들이 이방인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높은 언덕 위의 건물들은 6․25 직후에 청계천이나 봉천동, 또는 부산 영도에서 흔히 보던 판잣집과는 전혀 달랐다. 거의가 멋지게 치장한 호텔 아니면 고급 별장들이었다.
절벽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한참 내려가서 해안가 쪽으로 가 보았다. 한여름이라야 푸른 바다 위를 떠다니는 보트, 선텐하는 피서객들만으로도 볼거리가 넘쳐날 것인데, 4월의 소렌토는 조금은 쓸쓸했다. 멀리 보이는 나폴리와 폼페이의 베수비오 화산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다가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가는 곳마다 지천으로 피어 있는 친근한 느낌의 뽀리뱅이의 노란 꽃들만이 그런 마음을 살짝 살짝 달래줄 뿐이었다.
푸른 바다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바라보며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노래를 생각하니, 불현듯 소렌토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세이렌(Seiren)과 오디세우스(Odysseus)의 전설이 떠올랐다. 인면조신(人面鳥身: 후대에 와서는 주로 人面魚身으로 바뀐다)의 세이렌은 노래를 너무나 아름답게 불러서 근처를 지나가던 선원들이 그 노래를 듣다가는 모두 물에 빠져 죽게 된다는 전설 말이다.
20년간의 긴 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세이렌의 섬을 지나게 되었을 때, 그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못하도록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만든 귀마개로 틀어막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은 꼭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 부하들에게 자신의 몸을 돛대에 꽁꽁 묶으라고 하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았고, 그것을 본 세이렌은 그만 낙담하여 자살을 해 버린다는 얘기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매우 애틋하게 만들었는데….
경보(警報)를 뜻하는 사이렌(siren)이라는 말은 이 ‘세이렌’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했다. 전 세계적인 커피 스타벅스(Starbucks)의 로고도 이 세이렌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http://sh2009.egloos.com/2250778’ 참조) 어찌 보면 독일의 ‘로렐라이(Loreley) 전설’과도 맥이 통하여, 아마도 ‘이주전설(移住傳說)’에 해당하는 얘기가 아닐까 싶었다.
소렌토는 얼핏 친퀘테레의 마나롤라와 비슷한 인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단, 친퀘테레보다는 훨씬 상류사회로 여겨지는 점이 다르다고나 할까? 더구나 이곳은 근처에 폼페이, 카프리, 나폴리 등의 여러 관광지가 있어서 훨씬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까닭에 활기에 차 있었다. 항구에서는 비린내도 별로 나지 않았다.
우리는 ‘SNAV’라는 영문자가 쓰인 배를 타고 카프리 섬으로 갔다. 배에서는 무조건 화장실엘 다녀오라는 가이드의 말을 따라 사람들은 화장실 이용료를 절약하라는 말로 듣고 너도 나도 화장실엘 다녀왔더니, 우리의 ‘첩’이 또 농담 따먹기를 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이름까지는 몰라도 지중해에 왔다 가면서 흔적 정도는 남겨야 할 것 아니겠어요?”
(16.4.1. 15매, 사진 3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