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46) 식량은 백성들에겐 하늘과 같은 것이라고 나라의 명도
경북 인물열전 (46)
식량은 백성들에겐 하늘과 같은 것이라고 나라의 명도 어겼던 김이(金怡)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4. 慶尙道 安東大都護府 人物 條]
이 웅 재
김이(金怡: 1265[원종 6]- 1327[충숙왕 14])의 자는 열심(悅心) 또는 은지(隱之)이고,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 춘양현(春陽縣)사람으로 춘양 김씨의 시조이다. 초명은 지정(之琔)이고 후에 정미(廷美)로 고쳤는데 충선왕이 이(怡)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어머니의 꿈에 하늘이 온통 붉은데, 해가 붉은 햇무리를 띠고 품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그를 낳았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크고 용모가 건장하며 의젓하였고, 일찍부터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안향(安珦)이 일찍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후에 틀림없이 귀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나이 겨우 10여 세에 도평의사(都評議司)의 연리(掾吏: 대신은 사적[私的]인 보좌관을 두었는데 이를 연[掾], 연속[掾屬], 연리[掾吏]라 한다. 연을 수석보좌관으로 보면, 연속은 보좌관, 연리는 행정관과 비슷한 말단관리이다.)로 있었는데, 비록 하는 일이 보잘것없었지만, 그것을 개의치 않았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은 그를 달리 보았다.
1288년(충렬왕 14)에 우연히 화장사(華藏寺)에 유숙하게 되어 꿈을 꾸니, 왕이 정전(正殿)에 나와 앉아 있는데 여러 신하가 좌우로 호위하고 상서로운 구름이 어려 있었다. 왕이 시 한 수를 읊기를, “푸른 구름에 붉은 기운이 서렸으니, 여기가 정녕 선경이로다(靑雲紫氣知仙閣).”라고 하였는데, 김이가 화답하기를, “푸른 머리 맑은 말씨 향기 풍기니, 이가 필시 귀인이로다(綠髮淸談是貴人).”라고 하였더니 왕이 감탄하여 옷을 벗어 그에게 입혀 주었다. 그해에 장흥부(長興府)의 수령이 되었다.
1290년에 원나라의 반적(叛賊) 합단(哈丹)이 침입하자 나라에서는 주(州)와 현(縣)에 명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험지(險地)로 피난하고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김이가 안렴사(按廉使) 강취(姜就)에게 말하기를, “…식량은 백성들에겐 하늘과 같은 것이며 농사는 때를 놓칠 수 없는 것이니 나가서 농사짓는 것을 허락하여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니, 강취가 말하기를, “명을 거역하면 견책을 받아야 할 것이니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김이가 물러나와 탄식하였다.
“농부가 밭을 갈지 않으면 세상이 다 굶주린다. 이제 만일 명에 충실하여 농사에서 손을 뗀다면 굶어죽는 자가 허다할 것이며, 명을 거역하여 농사를 짓게 한다면 죄를 짓는 자는 나 하나뿐이다.”라고 하며,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 뒤 적이 연기(燕岐)에 와서 섬멸되었는데, 다른 고을은 모두 수확이 없었으나 장흥부에서만은 대풍작을 이루어 이웃 고을들이 그 혜택을 입었다.
1292(충렬왕 18) 그는 만기가 되자 소환되어 내시직(內侍職)에 종사하였으며, 1298년에는 원나라에 머물러 있던 충선왕을 시종하여 왕 부자(父子)를 이간시키려는 간신배를 제거하는 데 공이 컸다. 1304년(충렬왕 30) 류청신(柳淸臣)과 박경량(朴景亮) 등이 정권을 독점할 생각으로 충선왕을 꾀어 말하였다.
“본국의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는 원나라 세조황제가 이미 그 직품(職品)을 2품으로 올리고 도장까지 주어 신임을 표시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관원에 대해서는 원나라 임금의 명령을 거친 후에 임명하여 원나라의 관직과 같이 임명합니다. 때문에 원나라 대신들도 그를 감히 능멸할 수 없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국가를 위하여 가장 안전한 방책입니다.”
충선왕이 그 말을 곧이듣고 앞으로 원나라에 청원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령군(大寧君) 최유엄(崔有渰)이 비밀히 김이에게 말하기를, “만일 두 사람의 말대로 된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 정령(政令)이 중국으로부터 나오게 되면 병합당한 것과 무엇이 크게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김이가 기회를 엿보아 충선왕에게 사리를 갖추어 설명하여 중지시켰다.
그 후에 충렬왕이 충선왕과 함께 원나라에 있게 되자 왕이 소인배들의 참소를 들어 충선왕을 폐하고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을 아들로 삼고 또 충선왕의 공주를 왕전에게 개가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두 왕의 신하들은 두 편으로 갈려서 사태가 심각하게 되었다. 김이는 앞으로 커다란 화가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몰래 충선왕을 책봉한 조책(詔冊)을 넣어둔 함에서 그 조책을 꺼내어 감추고 다른 종이를 빈 함에 넣어 봉하여 두었다. 며칠 후 과연 그 함은 도둑을 맞았다. 충선왕이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하자 김이가 조용히 말하였다.
“제가 불의의 사변이 생길 것을 근심하여 함에 든 물건을 꺼내어 간직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 달 남짓하여 소인배의 책동이 거의 성공할 무렵에 김이가 숨겨둔 책명(冊命)을 내놓고 증거로 증명하니 드디어 일이 무사히 풀리게 되었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동지밀직사사에 뒤이어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으며 수성보절공신(輸誠保節功臣)에 봉해졌다. 1320년에는 찬성사가 되고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졌다.
1321년 류청신(柳淸臣), 오잠(吳潛) 등이 왕위를 심왕(瀋王) 고(暠)에게 전하게 하고, 이른바 입성음모(立省陰謀)라고 하여 고려에 행성을 설치함과 동시에 고려의 국호를 폐지할 것을 원나라에 청하므로, 원나라에서 이를 실행하려 하자 최성지(崔誠之),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원나라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중지하게 하였다.
1324년에 다시 찬성사가 되었다가 1326년에 첨의정승, 이듬해 첨의중찬이 되고 추충보절동덕공신(推忠保節同德功臣)에 봉해졌다. 시호는 광정(匡定)이다.
성질이 활달하여서 장자(長者)다운 풍도(風度)가 있었다. 오랫동안 충선왕(忠宣王)을 좇아 원 나라에 가서 임금을 호위하며 바로잡은 공로가 있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절개를 지킨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