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22)
표절(剽竊)을 타기(唾棄)했던 보한집(補閑集)의 저자 최자(崔滋)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8. 尙州牧 名臣條]
이 웅 재
최자(崔滋)는 자를 수덕(樹德), 초명은 종유(宗裕)였는데 안(安)으로 고치었다가 후에 자(滋)로 바꾸었다. 9재학당(九齋學堂)을 세워 유학을 보급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등 사학(私學) 발전에 크게 공헌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칭송되는 최충(崔冲)의 7대손이다. 천성이 순박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몸가짐에 무게가 있었다. 강종(康宗) 원년 임신(壬申;1212년)에 진사(進士) 과거에 뽑히어 예에 의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에 임명되었다가 들어와 국학 학유(國學學諭)가 되었고, 뒤에 또 목사로 나갔다.
일찍이 최이가 조정 선비의 등급을 매길 때 문필[文才]과 사무[吏才]에 능한 자를 제일로 삼고, 문필은 있으나 사무에 능하지 못한 자를 다음으로 삼고, 사무에는 능하나 문필에는 능하지 못한 자를 또 그 다음으로 삼고, 문필과 사무에 다 능하지 못한 사람을 하(下)로 삼아서 매양 전주(銓注;인물을 심사하여 적당한 벼슬자리에 배정하는 일)할 때에 상고하여 보았는데, 어쩐 일인지 최자(崔滋)의 이름이 늘 하등에 있었기 때문에 10년 동안 승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자가 일찍이 ‘우미인초가(虞美人草歌)’와 ‘수정배시(水精盃詩)’를 지었을 때, 이규보(李奎報)가 보고 매우 훌륭하게 여기었다. 뒤에 당시의 실권자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이(崔怡)가 이규보에게 말하기를,
“누가 공을 이어서 문한(文翰)을 잡을 만하오?”
하니, 대답하기를,
“학유(學諭) 최안(崔安)이란 자가 있고, 급제 김구(金坵)가 그 다음입니다.”
하였다. 그때에 ‘이수(李需)ㆍ이백순(李百順)ㆍ하천단(河千旦)ㆍ이함(李咸)ㆍ임경숙(任景肅)이 문명(文名)이 있었는데, 최이가 그 문재를 시험하려고 제서(制書)와 표(表)를 짓게 하여 규보로 하여금 등급을 정하게 하였다. 무릇 열 번을 뽑았는데 최자가 다섯 번 장원하고, 다섯 번 차상이 되었다. 이가 또 사무의 재주를 시험하려고 급전도감녹사(給田都監錄事)를 제수하니, 역시 부지런하고 민첩하였다.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가서는 판결이 귀신 같아 아전들과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사랑하였다. 이런 점을 두고 보아서는 요사이 각 정당에서 국회의원 공천 심사를 하는데, 혹시라도 최자처럼 실력은 있으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계속 탈락하는 인재는 없을까 근심스러운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다.
고사(故事)에 정월ㆍ동짓달에 도호부사(都護府使 ) 등에서 전(牋)을 올려 하례하면 중서문하(中書問下)에서 그 높고 낮은 차례를 정하여 방(牓)을 붙이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상주(尙州)의 표전(表牋)이 늘 일등을 차지하여, 문사(文士)들마다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하니 그의 문재를 능히 알 만하다. 뿐만 아니라 상주는 도(道)에서도 으뜸인 지역이므로 옥 송사가 매우 잦았는데, 최자가 판결하는 날에는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귀신같이 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윤상(倫常)을 어지럽히고 강기(綱紀)를 범하는 자가 없어서, 얼마 안 되어 옥이 텅텅 빌 정도로 태평스러운 고장이 되었다고 한다. 기한이 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로 소환된 것은, 바로 그 특수한 포장(褒獎)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는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을 보충한다는 의미를 지닌 보한집을 저술했다. 당시의 실권자인 최이가 “파한집”이 너무 소략하니 보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말을 따라 산일(散逸)된 시화(詩話)들을 모아 저술한 것으로 처음의 명칭은 “속파한집”이었다고 한다.
“보한집”은 상·중·하 3권이다. 권상(卷上)에는 고려 태조의 문장을 비롯한 역대 명신(名臣)들의 언행 따위를 소재로 한 글 52화(話), 권중(卷中)에는 이인로· 이규보 등 선배 문인들의 일화를 비롯한 46화, 권하(卷下)에는 21품(品)에 걸친 시평과 함께 자신의 시문론을 밝힌 글 등 49화가 수록되어 있다.
당시의 시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그것은 바로 ‘용사론(用事論)’과 ‘신의론(新意論)’이라고 할 것이다. ‘용사’란 전고(典故) 곧 고사(故事)를 많이 이용하는 글쓰기요, ‘신의’란 글자 뜻 그래로 창의적인 뜻을 중시하는 시작 태도라고 할 것이다. 이인로가
용사론의 대표자라고 한다면 이규보는 신의론의 대표자라 하겠는데, 이규보에 의해 사환(仕宦)길이 트이게 되었던 최자로서는 그러지 않아도 신흥사대부로서의 특징이랄 수 있는 신의론 쪽으로 기울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보한집서문에서,
“문(文)이라는 것은 정도(正道)를 밟아 나가는 문(門)이기에 법도에 맞지 않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러나 기운을 돋우고 말을 생동하게 해서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고자 혹 험괴(險怪)한 것도 말하게 된다. 하물며 시를 짓는 데 있어서랴? 시는 비(比; 『시경』 문체의 하나. 비슷한 것을 이끌어다가 견주어 표현하는 비유법), 흥(興; 『시경』 문체의 하나. 먼저 다른 것을 서술하고 거기서 연상하여 본론을 서술하는 방법)과 풍유(諷諭)를 근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기궤(奇詭)에 우탁(寓託)한 뒤에야 그 기운이 씩씩하고 그 뜻이 깊으며 그 말이 뚜렷하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깨닫게 하고 깊고 미묘한 뜻을 드러내어 마침내는 올바른 데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남의 것을 표절(剽竊)하든가 모방하여 지나치게 떠벌리는 것은 선비는 진실로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표절, 그것은 도둑질이다. 도둑질 중에서도 정신적 산물을 훔쳐가는 악질적 도둑질이다. 어찌 보면 강탈(强奪)보다도 더 악랄한 것이 표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요사이 정부 고위급 인사에서 심심찮게 표절 문제가 거론되는 것을 보며, 대쪽 같았던 우리 옛 선인들의 성품이 새삼스레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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