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116

괄태충(括胎蟲) 퇴치기

괄태충(括胎蟲) 퇴치기 이 웅 재 나는 괄태충(括胎蟲)과 함께 산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가 없어 같이 산다. 놈은 베란다(실은 발코니)에서 내 허락도 없이 산다. 물론 셋돈도 내지 않고 막무가내로 산다.‘괄태충’이란 이름은, 태(胎)처럼 생긴 놈들이 서로 짝짓기를 할 때의 모습이 꼭 서로를 묶어놓은 듯하다[括]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머리에 2쌍의 자루[柄]처럼 생긴 촉각(더듬이)이 눈[眼]처럼 붙어 있어서 일명 ‘병안목(柄眼目)’이라고도 한다. 이 촉각으로 위험을 느꼈을 때에는 몸 전체를 둥그렇게 말기도 한다. 그 이름이 상당히 유식하게 여겨지는 놈이다. 놈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은빛 줄이 이리저리 그어져 있다. 그뿐만이 아니고 만지면 미끌미끌한 게 기분이 되게 불쾌한 느낌이다. 놈들을 잡아..

수필 2021.06.24

가을 ‧ 가로수 (이웅재 칼럼(20),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11월호, pp.82~83.)

이제 시월이다. 가을인 것이다. 가을만큼 빨리 가는 계절도 없다. 시월은 더욱 수월하게 지나간다. 「아-(하품 한 번 길게 하고) 가을인가 봐!」하고 멋진 세리프를 한 마디 뱉고 보니, 벌써 가을은 그 짤막한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겨울의 골목으로 사라져 가더라는 우스개는, 그런대로 가을의 빠름이나 짧음을 나타내는 데 있어 近似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현대를 초스피드 시대라고 하던가? 두 살 난 자식 놈이, 「나 장가 갈 테야」하고 보채는 바람에 삼십 전의 신혼 부부가 며느리감 구하러 다녀야할 그런 바쁜 세대이고 보면, 초스피드 세대라는 현대라는 것에 대해서, 네째 딸 시집 보낸 집 쌀독에 낟알 떨어지듯 정나미가 똑 떨어져 버리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아직은 그렇게까지 보..

수필 2021.01.16

내 목숨, 그건 내 것이 아닌가요 이 웅 재

누가 나를 대신해 줄 수 있을까? 대리 출석, 대리 신청, 대리 시험, 대리 투표, 대리 운전…. 이런 ‘대리’ 중에는 법적으로 허용되는 것도 있고 금지되어 있는 것도 있다. 때에 따라서는 ‘대리’가 공식적 직함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국장 대리, 과장 대리에 아예 달랑 ‘대리’만으로 직함을 대신하는 일도 있고, 대리 영사, 대리 대사, 대리 판사… 등등 여기저기 대리가 넘쳐나기도 한다. 그러나 대리 또는 대신하는 일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내가 배가 고플 때 누가 대신 먹어주어서 내 배가 불러질 수가 있는가? 누가 내 대신 잠을 자 주고, 누가 내 대신 화장실엘 가서 소변이나 대변을 대신 배설해줄 수가 있는가? 더더구나 그것이 사람에겐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인 경우에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수필 2020.12.19

효도, 그거 해야만 되는 건가요 이 웅 재

요즘 젊은이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도 자신에게 충실한 세대다. 자신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 효도? 그건 케케묵은 봉건시대의 낡아빠진 관습쯤으로 치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누가 낳아 달랬어요?” 부모가 낳아주고 키워줬으니 그걸 갚아야 한다고? 어림 반 푼도 없는 얘기다. 그렇다면 살든 말든 내팽개칠 걸 그랬나? “낳았으니까 책임져야 하는 건 당근 아녜요?” 글쎄, 그럴 것 같기도 한데…. 효경(孝經)에는 효도의 ‘처음과 끝’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효도의 처음은 내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터럭 하나라도 헐게 하여서는 안 된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毀傷 孝之始也)고 하였다. 말하자면 자신의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교통사고를 당해서도 안 되고, 몹쓸 병에 걸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다..

수필 2020.12.07

죽으면 그만이라더니… 이 웅 재

그 할머니는 평소에 종교를 믿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이제 인생도 황혼에 접어들었는데, 무어 하난 믿어야 할 것 아니냐고 하면, ‘믿긴 무얼 믿어?’하고 콧방귀를 뀌셨다. 그래도 무어든 믿는 데가 있어야 죽은 다음 어디 갈 곳이 생기질 않겠느냐고 하면, ‘가긴 어딜 가?’하며 시큰둥하셨다. ‘천당도 있고 극락도 있지 않느냐?’고 다그치면, 모두 다 쓸데없는 소리라고 하셨다. 천당, 그곳은 하느님을 믿어야만 간다는 곳이잖아? 우리나라에 천주교나 기독교가 들어온 지가 얼마나 됐어? 그 이전 사람들은 모두가 천당을 갈 수가 없었잖아? 단군왕검도 박혁거세도, 왕건도, 이성계도…아니, 세종대왕도 이순신도 천주교나 기독교를 믿을 수가 없었잖아? 그런 분들 한 분도 못간 곳엘 내가 가서 무얼 하겠다고? 아니, 그런..

수필 2020.11.30

충과 효, 어느것이 우선일까 이 웅 재

내게는 해위(海葦:尹潽善 전 대통령) 선생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 도자기에 써서 남긴 글이 하나 있다.‘충국효친(忠國孝親)’, 나라에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라는 말이다. 전통적인 유교 덕목이라 하겠다. 우리는 충효(忠孝)라는 말을 흔히 들어왔다. 순서를 바꾸어 효충(孝忠)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뒤바뀐 것이다.‘충’보다는 ‘효’가 우선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제까지 순서를 뒤바꾸어 써 왔을까?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살펴보자. 먼저 삼강(三綱)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다. 이는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될 도리를 가리킨다. 이에 비해 오륜(五倫)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수필 2020.11.24

놀기가 얼마나 힘들다고요 이 웅 재

통상 일을 한다는 것은 힘든 것으로 인식한다. 육체적 노동이 뒤따르는 작업이 아니라 할지라도 일을 하는 것은 힘든 것으로들 치부한다. 아무리 정신적인 작업이라 할지라도 육체적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때문이다. 때문에 한 동안 계속 일을 하고 나서는 적당히 쉬어야만 했다.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 것을 보이는 한자 ‘휴(休)’자를 보면 ‘쉬는 것’은 ‘일하는 것’보다 훨씬 육체적으로 편안함을 누리는 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쉬다’의 사전적 의미가 ‘피로를 풀려고 몸을 편안히 두다’라는 점을 보아서도 ‘쉬다’는 ‘일하다’와는 반대가 되는 말임을 쉽게 알 수가 있겠다. ‘쉬다’와는 비슷하다고 생각되면서도 조금 다른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 ‘놀다’라는 말도 있는데, 그 뜻풀이를 보면..

수필 2020.11.22

방짜유기 이 웅 재

아내에게 언니의 딸인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기(祭器)를 사려고 하는데, 방짜 유기(鍮器)가 좋다는 사람이 있어서 가격을 보았더니 꽤 값이 나가던데….” 방짜 유기,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사전에서는 ‘품질이 좋은 놋쇠를 녹여 부은 다음 다시 두드려 만든 그릇’이라고 풀이되어 있는데, 1200도가 넘는 고온에서 11명의 사람이 함께 만드는 그릇이어서,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고도의 숙련 기술이 요구되기에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기도 안성시가 그 유기 제조로 유명해서, '안성맞춤'이라는 말까지도 생겨났다고 하지 않는가? ‘방짜’란 한문으로 ‘方字’라 쓰기도 하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박완서 님의 대하소설 『미망』에도 “툇마루엔 장중하게 번들대는 방짜 놋대야..

수필 2020.11.06

스타가 되고 싶다구요 이 웅 재

“넌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장래 희망이 뭐지?” 초등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질문이다. 어른들은 왜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을까? 초등학생이 무슨 확고한 인생관, 직업관을 가졌을 것이라고 그토록 보채는 걸까? 어이없는 일들이다. “탤런트요.” “스타요.” 하늘에는 별도 총총하지만, 그러나 지상의 별(스타)은 그렇게 많을 수가 없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한술 더 뜨기도 한다. “톱스타요.” 톱스타는 많을 수가 없다. 그건 단 한 사람, 톱스타급이라는 말로 조금 넓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많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많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 보니 일약 스타가 되어 있더라는 연예계 가십난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스타를 아..

수필 2020.10.21

무슨 책을 읽을까요 이 웅 재

내 연구실을 처음 방문하는 학생들은 가끔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으신 건가요?”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게 많은 책도 아닌데, 학생들이 보기엔 그렇지 않은가 보다. 글쎄, 다 읽었다고 대답한다면 내게 대한 학생들의 존경심이 더욱 높아질까? “아니, 그걸 언제 다 읽었겠나?” 대답하는 순간, 학생들은 내게 실망의 눈길을 보낸다. 책 가운데에는 참고하기 위해서 필요한 책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전류라 하겠다. 매일같이 백과사전을 몇 장씩 찢어 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외우는 학생이 있었다. 그렇게 몇 년만 지나면 자신은 살아있는 백과사전이 된다는 것이다. 그 집념에 놀랐다. 살아있는 사전이 필요할까? 기만 원 또는 기십만 원이면 늘 책상머리에 놓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볼 수..

수필 2020.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