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25) 소중하고 귀한 책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 일연(一然)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7. 慶尙道 慶山縣 建置沿革 條]
이 웅 재
*경산현(慶山縣)은 압량소국(押梁小國)이었는데, 경덕왕 때 장산(獐山)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장산(章山)으로 바뀌었고, 현종(顯宗) 때에는 경주에 소속시켰다가 충선왕(忠宣王) 초년, 기휘(忌諱)하여(충선왕의 이름이 璋) 이름을 경산으로 고쳤으며 충숙왕(忠肅王)이 국사(國師) 일연(一然)의 고향이라 해서 다시 현으로 승격시켰다.(建置沿革 條) 그런데 정작 경산현의 인물 조 등에는 일연의 이름이 나오지를 않아서 안타깝다. *일연(一然;1206-1289)의 속성은 김(金)씨, 이름은 견명(見明)이요, 처음의 자는 회연(晦然), 후에 일연이라고 고쳤으며, 호는 무극(無極) 또는 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이었다. 경주 장산군(章山郡 : 지금의 경산시) 출신으로, 아버지는 지방 향리 출신인 언필(彦弼; 뒤에 좌복야[左僕射]로 추증됨)이다. 9살 때 해양(海陽: 지금의 光州)에 있는 무량사(無量寺)로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12살 때에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대웅장로(大雄長老)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227년(고종 14)에는 선불장(選佛場)에서 장원급제에 맞먹는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고, 이후 포산(包山 : 경주 근처 현풍현 琵瑟山)의 보당암(寶幢庵)으로 들어갔다. 포산 곧 비슬산은 산의 모습 또는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의 모습이 거문고와 같아서 붙은 명칭이라고 하는데, 다양한 불교 형태가 공존했던 지역이다. 이는 일연이 어느 특정 신앙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는 『삼국유사』와 같은 저술을 이루게 되는 토양을 이루어준 것으로 여겨진다. 1236년 10월, 몽고가 침입하자 병화를 피하려고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를 염하니, 문득 문수가 현신하여 "무주(無住)에 있다가, 명년 여름에 다시 이 산의 묘문암(妙門庵)에 거처하라."고 하여 보당암의 북쪽에 있는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는 무인정권의 최이(崔怡)가 정권을 담당하던 시기였는데, 1249년 최이와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있던 정안(鄭晏)의 초청으로 남해(南海)의 정림사(定林社)에 머물면서 대장경 조판 작업에 참가하였으며, 1259년에는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1261년(원종 2)에는 강화도 선월사(禪月社)에 머물면서 지눌(知訥)의 법맥을 계승했다. 1268년에는 왕명에 의해 운해사(雲海社)에서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를 주관하고, 1274년 비슬산 인홍사(仁弘社)를 중수한 후 왕의 사액에 따라 인흥사(仁興社)로 개명했으며, 같은 해 비슬산 용천사(湧泉寺)를 중건하여 불일사(佛日社)로 개명했다. 1277년(충렬왕 3)부터 충렬왕의 명에 따라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집필에 착수하게 되니, 선사의 나이 72세 때이었다. 1283년(78세) 3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라는 호를 받았으나, “부모가 계신 까닭으로 내가 생겼으니, 어머니께 효를 해야 한다”면서 왕의 만류도 뿌리치고 인각사(麟角寺)로 내려와 옴병(지금의 나병)으로 주위의 천대를 받고 있는 95세의 속가(俗家) 어머니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을 1년여 동안 봉양하며 그 임종을 보았다고 하니 그 효성의 지극함이 이와 같았다. 인각사는 지금의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약전리에 있는 절로서 은해사(銀海寺)의 말사(末寺)로, 절이 들어선 자리가 4영수(靈獸)의 하나인 상상의 동물 기린(麒麟)의 뿔에 해당하는 지점이라 한다. 이곳이 일연이 『삼국유사』를 완성한 곳이라고 하며, 경내에 일연 보각 국사의 탑과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속칭 인각사비(麟角寺碑; 원명은「高麗國義興華山曹溪宗麟角寺迦智山下普覺國尊碑)가 남아 있다. 인각사비는 보각국사 일연의 생애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서, 신(臣) 민지(閔漬)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 죽허(竹虛)가 교칙(敎勅)에 의하여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겼다고 한다. 그 후 1289년 6월에 병이 들자 7월 7일 왕에게 올리는 글을 남기고 8일 새벽 선상(禪床)에 앉아 제자들과 선문답을 나눈 뒤 거처하던 방으로 돌아가서 손으로 금강인(金剛印; 합장하는 방법의 하나인 듯)을 맺고 입적하였다. 그의 생김새는 ‘포동포동한 볼에 꽉 다문 입, 걷는 모습은 소와 같이 유유하며 눈은 호랑이 눈처럼 빛을 발하고 힘도 장사였다’고 한다.(이은직 지음, 정홍준 옮김, 한국사 명인전 1, 일빛, 1989,p.137.) 『삼국유사』는 '유사(遺史)'라는 이름에서 보듯, 『삼국사기』나『해동고승전』등의 기존 사서에 대한 보족의 의도에서 찬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연은 젊은 날 황룡사(黃龍寺)를 찾은 적이 있다. 그리고 76세 때 노구를 이끌고 다시 황룡사를 찾았다고 한다. 그때는 이미 황룡사는 몽고의 병화로 인해 잿더미로 화해 있었다. 『삼국유사』의 민족자주의식은 이러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삼국유사』에는 신이한 내용의 설화, 불교의 영험설화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흔히『삼국유사』를 허황된 이야기들로서 폄하하려 하기도 하지만, 기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협주(夾註; 본문보다 작은 글자로 본문 속에 끼워 넣은 주)를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기사의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을 했는가 하는 점을 실감할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삼국유사』의 설화를 그 상징적 의미로서 파악해야만 할 것이요, 아울러 그의 민족자주의식(民族自主意識)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는 일찍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까지 하였을 정도로 매우 소중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단군신화(檀君神話)가 처음 기록된 책이요, 14수의 향가가 실려 있는 책이라는 면으로서도 삼국유사의 가치는 불멸의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