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28)
한림별곡 제1장을 장식한 학사 금의(琴儀)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5. 慶尙道 奉化縣 人物 條]
이 웅 재
琴學士의 玉芛門生 琴學士의 玉芛門生
위 날조차 몃 부니잇고.
(금학사의 배출한 뛰어난 문하생들, 금학사의 배출한 뛰어난 문하생들
아, 나까지 몇 분입니까? [매우 많습니다.])
고려 고종 때(13세기 초) 한림원의 여러 유생들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총 8장으로 되어 있는 최초의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 제1장의 후소절(後小節) 부분이다. 여기서 금학사(琴學士)는 금의(琴儀)를 가리킨다. 그는 오랫동안 지공거(知貢擧, 과거 시험관)로 지내면서 많은 급제자를 배출하여 최자(崔滋)를 비롯한 뛰어난 문생(門生)들을 많이 두었던 것이다. ‘금학사의 옥순문생’이라는 말은 ‘학사 금의가 배출한 죽순처럼 많은 훌륭한 문하생’이라는 뜻이다.(玉芛은 玉荀과 같다.)
금의(琴儀;1153[의종 7]∼1230[고종 17])의 자(字)는 절지(節之)요 처음 이름은 극의(克儀)였다. 본래 봉화현(奉化縣) 사람이었는데, 뒤에 김포(金浦)로 본적을 하사받았다. 고려개국삼한벽상공신(高麗開國三韓壁上功臣) 태사(太師) 금용식(琴容式)의 후예이다. 금용식은 일찍이 기자(箕子)와 함께 우리나라에 온 금응(琴應)의 후손이다. 금응은 문장과 도학(道學)으로써 명성을 떨치고 예악문물과 삼강오상(三綱五常)으로 법치(法治)를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금응으로부터 금용식까지의 세계(世系)를 상고할 수 없고, 또 금용식으로부터 6세 내지 8세의 세계가 실전되어 봉화(奉化;鳳城) 또는 김포(金浦; 桂陽) 금씨는 금의를 1세조로 삼고 있다. 금씨는 우리나라 성씨(姓氏) 중 유일하게 수양(修養)과 도야(陶冶)를 뜻하는 악기 이름을 성으로 삼은 성씨이다. 금의는 금씨 성을 쓰는 인물 중 우리나라 역사와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물로 체격과 용모가 빼어나고 끼끗하였으며, 재주와 기량 또한 뛰어났고 도량이 넓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글을 잘 지었으나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한 채, 급제 이전에 청도(淸道)의 감무(監務;중앙의 관원을 파견하지 못한 지방의 작은 현을 다스리기 위하여 두었던 지방관.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縣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되었는데 강직하여 굽히지 않아서 백성들이 철태수(鐵太守)라고 불렀다 한다.
명종(明宗) 14년(1184) 괴과(魁科;文科의 甲科)에 장원급제하였고, 최충헌(崔忠獻)이 국정에 임하여 문사(文士)를 구할 때, 이종규(李宗揆)란 사람에 의해 추천을 받아 최충헌의 측근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신종(神宗) 때에는 상서우승 우간의대부 태자찬선대부(尙書右丞 右諫議大夫 太子贊善大夫)를 제수받는 등 영화를 누리다가 한때 집정(執政)에게 거슬려 장작감(將作監)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우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고 희종(熙宗) 4년(1208)에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시험관을 맡아 황보관(皇甫瓘) 등을 선발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요직을 맡아 임금이 그를 중하게 여겼더니, 자못 세를 믿고 교만 방자하여지자, 황보관이 직려(直廬; 宿直하는 집)에 나아가 시를 지어 벼슬 쉬기를 풍자하여 권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를 최충헌에게 고하여 황보관을 섬에 유배를 가도록 만들어 여론이 그를 야박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강종(康宗)이 즉위함에 금(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책명(冊命;책봉을 명함)할 때 금나라 사신이 궁궐 정문으로 들어오고자 하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논의가 분분하였다. 이에 왕이 금의에게 명하여 금나라 사신을 설득케 하였다. 금의가 금나라 사신에게 물었다.
“천자가 방악(方岳;四方의 岳, 卽 東의 岱宗[泰山], 西의 華山, 南의 衡山, 北의 恒山)을 순수(巡狩;巡幸)하는 것은 예로부터 있는 일인데, 만약 그대 나라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온다면 어느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금나라 사신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출입은 마땅히 정문(正門)이 아니고 어느 문이겠는가?”
금의가 이 말을 받아 말했다.
“그렇다면 정문은 천자의 출입문인데, 감히 신하가 되어 정문으로 들어옴이 옳겠는가?”
이에 금나라 사신이 크게 탄복하여 서문(西門)으로 들어왔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승지(承旨)로 삼았다.
고종(高宗) 2년(1215)에 정당문학 수국사(政堂文學 修國史)를 제수받고 이어서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 5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수태보문하시랑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판리부사(守太保門下侍郞 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 判吏副使)를 더하였다가 7년(68세)에 연로함을 내세워 퇴관을 청하니, 벽상공신(壁上功臣; 벽상에 이름을 기록하는 공신)을 더하여 받고 벼슬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치사(致仕) 후에는 거문고와 바둑으로써 스스로 즐기다가 78세 때인 17년(1230)에 졸(卒)하였다. 왕이 심히 슬퍼하며 유사(有司; 관계관)에게 명하여 장례를 후하게 치르게 해 주고 영렬(英烈)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는 사람과 상대할 때 면전에서 상대의 허물을 책하여 꺼리는 바가 없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비문은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가 지었는데, 비문 중에 바둑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우리나라 바둑 역사상[國棋史上] 최초의 비문으로 손꼽히고 있다.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 문계서원(文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었는데, 1868년(조선 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뒤 복원되지 못하였으며, 강당인 문계정사(文溪精舍)만 남아 있다.
봉화 추원재(追遠齋) 재사 입구에는 1987년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이 해서(楷書)로 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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