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수필 순례 26) 이규보 뇌서(李奎報誄書).hwp
(고전수필 순례 26)
이규보 뇌서(李奎報誄書)
정 지 지음
이웅재 해설
신축년(1241) 가을 9월 2일에 수태보 문하시랑 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 이공이 병으로 졸하니 이내 사제(私第)에 빈소를 차리고, 달을 건너 11월 6일 경인에 진강산(鎭江山) 동쪽 기슭에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그 기간이 2개월이 넘는다.) 공의 휘는 규보(奎報)요, 자는 춘경(春卿)인데, 황려현(黃驪縣; 지금의 驪州) 사람이다.… 공이 처음 났을 때에… 어떤 늙은이가 지나가다 보고 말하기를, “이 애기는 천금과 같은 아들이니, 잘 보호하고 길러야 하겠다.” 하거늘…,아홉 살에 능히 글을 지으니, 그때 사람들이 기동(奇童)이라고 불렀다. 모든 경사(經史)와 백가(百家)를 한번 보면 문득 기억하고 시 짓기에 빠르다고 일컬으니, 소먹이는 아이들과 말 끄는 하인들까지도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임술년에 동도(東都)가 반역하므로, 조정에서 삼군을 보내어 이것을 치게 할 때 막하의 장수를 산관(散官) 중에서 급제한 사람으로 수제직(修製職; 왕복 문자를 맡은 직무)에 충당하려 하여, 세 사람을 채용하려 하였으나 모두 꾀로 회피하는데, 공이 홀로 말하기를, “신하가 되어 나라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회피함이 옳겠는가.” 하고, 드디어 종군하였다.…벼슬이 올라가 추밀원부사 좌산기상시 한림학사 승지(樞密院副使左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다.…얼마 안 되어 정당문학 참지정사(政堂文學參知政事)를 제수받았다. 공이 나이 많으므로 인하여 늙음을 고하고 물러가기를 원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정유년에 또 표(表)를 올려 물러가기를 굳이 간절하게 청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로 치사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너그럽고 우아하여 정직한 대신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지목하여 말하기를, “사람 가운데 용이다.” 하였으며, 경사(經史)를 궁구(窮究)하였을 뿐만 아니라, 드물고 궁벽한 문자[幽文僻說]와 불서(佛書)ㆍ도질(道帙 도교의 서적)에 이르기까지도 두루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전고(典誥; 「서경의 요전(堯典), 탕고(湯誥) 등 제왕의 언행 기록)로부터 경상(卿相)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모든 왕의 전교[王言]와 임금의 조서[帝誥]의 고문(高文)과 대책(大冊)이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다. 비록 현거(懸車 늙어서 벼슬을 사면함)에 이르렀으나, 외국과 교빙하는 표장(表狀)ㆍ징고(徵誥)의 글은 역시 공이 지은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임금께서 돌보아 대우하심이 더욱 중하여 월봉(月俸)을 줄 때마다 상부(相府)에 벼슬 살 때와 같이 하였다. 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이 저작한 전후 문집 53권을 가져다가 공인(工人)을 모아 판에 새겨 인쇄하여 세상에 전하였으며, 이름이 중국과 오랑캐에 떨쳐서 총애함이 전고(前古)에 없었다. 슬픔과 영광으로 시종을 마쳤으니, 결함이 없었다 하겠다. 공의 처음 휘는 인저(仁底)인데, 장차 사마시(司馬試 진사 시험)에 나아가려 할 때 꿈에 규성(奎星)이 이상한 상서를 보(報)한 까닭으로 규보(奎報)라 고치었는데, 과연 과거보아 제1등에 합격하였다. 아직 약관(弱冠 20살)이 되지 않았을 때 오세재(吳世才) 선생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 칭찬하기를 신중하였으나 선생을 한번 보고 기특히 여겨서 말하기를, “자네는 비상한 사람이다. 반드시 먼 곳까지 갈 사람이다.” 하였다.…벼슬을 내놓고 집에 있으면서는 항상 시와 술로써 즐겼다.…임금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여 유사에게 명해서 상사를 갖추게 하고, 사흘 동안 조회를 보지 아니하며, 시호를 문순공(文順公)이라고 내리었다. 그리하여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뇌사를 지어서 덕을 선양하게 하였다. 사(詞)는 다음과 같다.
“뛰어나고 뛰어나신 공이시여, 한 세대의 유종(儒宗)이십니다. 형체 타고난 것이 특이하시니, 사람 가운데 용이라고 말하겠습니다.…시(詩)로 이름이 자자하시어 중화(中華)에까지 들렸고 나아가서 한 고을 수령이 되니, 정사의 업적을 짝할 자가 없었습니다.…글을 지어 서술(敍述)하면 굳센 오랑캐도 믿어서 복종하였습니다.…어찌하여 하루아침에 하늘이 유학을 망하게 하였습니까. 벼슬아치와 뭇 선비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나이다. 봉황의 날개에 어떻게 붙으오며, 용의 비늘을 어떻게 더위잡으리오. 태산(泰山)이 무너지오니(孔子가 죽은 것을 태산이 무너졌다고 한 고사를 인용한 말) 사림(士林)이 슬프옵니다. 상감님 마음 슬프시어 전례에 없이 은총으로 장사지내시고, 신에게 명하시어 뇌사(誄辭)를 짓게 하시어 구천(九泉)에 빛나게 하였습니다. 아, 슬프도다.
♣해설:
*이글은『동문선』제116권에 실린 서(書)이다. 서(書)를 수필로 다루었음은 이미 ‘고전수필 순례 12. ‘격황소서(檄黃巢書)’에서 밝혔다.
지은이 정지(鄭芝) ?∼1264(원종 5)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1259년(고종 46) 서북면병마사를 거쳐 1260년(원종 1) 추밀원부사, 이듬해에는 예부상서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 과거 시험관)가 되었고, 126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시호는 장헌(章憲)으로 자세한 이력은 알 수가 없다. 이규보 뇌서(李奎報誄書)는 그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글로서 원래 동국이상국집 후집 12권의 책 끝에 실려 있었다. 이 뇌서로 인하여 그의 글은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뇌서란 죽은 이의 살았을 적의 덕행을 적은 글로, 시호(諡號)를 짓는 근거로 삼았다.
**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의 것을 따랐으나 띄어쓰기 등은 해설자가 보충하였다.
'우리의 고전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전수필 순례 27) 기 기(記碁) (0) | 2009.05.03 |
---|---|
(고전수필 순례 28) 남령전(南靈傳) (0) | 2009.05.03 |
(고전수필 순례 25) 비 내리기를 비는 태일 초례 청사문 (0) | 2009.03.22 |
(고전수필 순례 24) 색유(色喩) (0) | 2008.11.25 |
(고전수필 순례 23) 사우재 기(四友齋記) (0) | 2008.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