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43)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막지 못한 최영(崔瑩) 장군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尙道 慶州府 名宦 條]
이 웅 재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명환’조의 기록을 보면, 최영(1316~1388)은 그곳의 부윤(府尹)으로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는 평장사(平章事) 최유청(崔惟淸)의 5세손이고, 사헌부 규정(糾正)을 지낸 최원직(崔元直)의 아들이다. 풍채가 헌칠하고 의기가 당당하며 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양광도(楊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의 휘하에 있으면서 여러 번 왜구를 사로잡아 그 무용(武勇)이 널리 알려졌다. 공민왕 원년(1352)에는 조일신(趙日新)의 반란을 평정하여 호군이 되었고, 이어서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하였다. 이때에 류탁(柳濯)과 함께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을 따라 고우(高郵) 등지를 정벌하여 전후 27회나 싸우기도 하고, 왜선(倭船) 400여 척이 오예포(吾乂浦: 長淵)를 침입하였을 때나 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평양)을 쳐들어왔을 때에도 큰 전공을 세웠다. 이런 전쟁으로 인하여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였는데, 그는 양식과 종자를 나누어주고 농사를 장려하는 한편, 전사자들의 시체를 정성껏 묻어주기도 하였다.
공민왕 11년에는 경도(京都)를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고,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이듬해 김용(金鏞)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모두 격퇴함 으로써 다시 공훈 및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이때 어떤 사람이 김용의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 새끼의 눈동자를 가지고 구슬을 만들어 도당(都堂: 議政府)에 바치자,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돌려가며 가지고 즐겼는데, 오직 최영만이 “김용의 뜻이 이 물건 속에 들어 있을 텐데, 어찌 이를 가지고 즐기겠는가?”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공민왕 13년에는 반역자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 충선왕의 3남. 왕이 내쫓은 宮人이 원나라 白文擧와 결혼해 낳았다고도 하나, 불확실하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원나라로 도망하였다.)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와 승승장구하니, 안팎 인심이 흉흉했다. 최영이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임명되어 나가 싸워 크게 이기자, 왕은 기뻐하여 그에게 말 한 필과 은 두 덩이를 하사하였다.
그는 일찍이 밀직(密直) 김란(金蘭)이 그 딸을 신돈(辛旽)에게 준 것을 책망한 일이 있어서 신돈이 그를 미워했는데, 그로 인하여 좌천, 관직 삭탈에다가 노비들이 몰수되고 귀양을 가기까지 하였다. 왕 20년에야 소환되어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왕 23년에는 양광경상전라도통사(楊廣慶尙全羅都統使)가 되어 제주를 토벌하고 돌아오니 왕이 이미 붕어(崩御)하여 재궁(梓宮) 앞에서 통곡하며 복명하였다.
남공철(南公轍)의 『고려명신전』을 보면, 최영은 도통사(都統使)가 되어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므로 그 권세가 온 나라를 뒤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청렴 검소하였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법을 지키기를 매우 엄격하게 하여 누구도 함부로 그를 범하지 못하였으나, 학술에 힘쓰지 않아 모든 것을 혼자 생각하여 결단함으로써 화를 자초하는 일이 있었으니 이것이 애석하다고 하였다.
신우(辛禑:『고려명신전』에서의 지칭)는 경도(京都)가 바다에 가깝다는 이유로 왜구를 염려하여 궁성을 내지(內地)인 철원(鐵原)에 건축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최영이 말하였다.
“지금 수도를 옮기면 백성을 괴롭힐 뿐 아니라 해적이 노리는 기회를 열어주는 결과가 되어 장차 나라가 더욱 궁박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궁성을 옮기는 일은 중지되었다. 최영은 신우 7년(1381)에 수시중(守侍中: 守職은 품계가 낮은 관원에게 높은 관직을 행하는 것으로서, 그 반대는 行職이다.), 그리고 14년에는 시중(侍中)이 되었다. 신우는 최영의 딸을 아내로 삼고자 하였는데,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영비(寧妃)로 봉해졌다.
이때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고 북방 일대를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했다. 여러 재상들은 화친을 주장하였지만, 신우는 최영과 비밀히 요동을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사냥을 칭탁하고 군사를 내어 평양에 가서 군사를 조련하고,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조민수(曺敏修)와 이성계(李成桂)를 좌우군도통사로 임명하고 평양을 출발하여 위화도(威化島)에 집결하였는데, 그만 이성계가 회군(回軍)함으로써 이 요동 정벌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성계의 군사가 평양에 들어가자, 최영은 이와 항전하여 안소(安沼) 등에게 방어하게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이를 당하지 못하고 도망하여 신우가 있는 화원(花園)으로 들어갔다.
이성계의 군사가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최영을 내어줄 것을 신우에게 청했으나 최영이 팔각전(八角殿)에 있으면서 종시 나가지 않자, 군사들이 일제히 담을 헐고 들어가 곽충보(郭忠輔) 등이 최영을 묶었다. 신우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며 작별하자 최영은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나왔다. 이성계가 그에게 말했다.
“일이 여기까지 이른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그러나 요동 공략 계획은 비단 대의(大義)에 거슬릴 뿐만 아니라 장차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게 하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었다.”
마침내 고봉(高峰)으로 귀양 보내고, 그와 친했던 사람들을 합포(合浦)로 귀양 보냈다. 신창(辛昌)이 즉위하자 다시 충주로 귀양 보냈다가 문하부낭사(門下府郎舍) 허응(許應) 등의 상소로 인해서 신창은 그를 죽였다. 처형될 때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73세 때였다. 그가 형을 받던 날은 온 서울 사람들이 저자를 닫았고, 어디서나 이를 듣는 이들은 거리의 아이들이나 집안의 부녀들까지도 눈물을 흘렸으며, 시체가 길가에 있었는데 오고가는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고려사』최영전을 보면, “간대부(諫大夫) 윤소종(尹沼宗)이 최영을 비평하기를, ‘공은 한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고 하였는데 세상에서 이를 명언이라고 하였다.’고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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