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손자 임종한

한정이 없는 욕심에 제동장치를 달자 ('삶의 미립'에 중복)

거북이3 2012. 4. 1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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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이 없는 욕심에 제동장치를 달자

 

 

                                                                                                                                                                                이 웅 재

 

 

지난번 아내와 함께 딸네 식구들과 캐나다엘 다녀온 적이 있었다. 절경이라는 루이스 호수 앞에 있는 샤토 루이스 호텔의 내부 구경을 하고 로비에 있는 식당에서 일부러 맛을 보기 위해서 아이스크림, 커피, 녹차 등을 시켜서 먹고 마시고 흐르는 시간을 즐기면서 앞쪽으로 바라다보이는 호수와 눈 덮인 산들의 승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녹차를 마셔보던 외손자 종한이가 말한다.

“보리차 맛이네.”

그런 걸 돈 주고 사 먹느냐는 핀잔같이 들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위 임서방과 딸내미가 지도를 보면서 여기는 무슨 산, 여기는 무슨 호수 하면서 종한이에게 가르쳐 주었더니, 종한이 다시 왈,

“난 그런 거 몰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성철 스님이 환생을 한 걸까? 그러는 종한이에게 외할머니가 말한다.

“아이스크림, 할머니 좀 주지.”

“너무 차가워서 못 먹어.”

성철 스님 치곤 욕심이 과하신 것은 아닌지?

 

‘욕심’이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욕심에 눈이 멀어’, ‘더 많은 돈을 가지려는 욕심’과 같은 말에서 그런 부정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욕심 또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동기가 생기고 열정을 바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며 그것 때문에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인데, 어째서 부정적 측면이 강한 말로 치부되는 것일까?

‘과욕’이란 말이 있다. 한자로 바꾸어 쓰면 ‘寡慾’과 ‘過慾’이다. ‘寡慾’은 ‘욕심이 적음을 가리키거나 그 적은 욕심’을 지칭하는 말이요, ‘過慾’은 ‘욕심이 지나침을 말하거나 또는 그 지나친 욕심’을 의미하는 말이다. ‘過慾’은 분명 부정적인 말이지만, ‘寡慾’은 오히려 긍정적인 말이다. 문제는 ‘寡慾’이란 말은 그 사용 빈도가 아주 낮은 데 비해서 ‘過慾’이란 말은 그 사용 빈도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하듯 ‘過慾’이 ‘寡慾’을 몰아내 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慾心’은 ‘過慾’을 낳고, ‘過慾’은 다시 ‘탐욕(貪慾)’을 불러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욕심’이라는 것은 제동장치가 없다. 욕심은 한정이 없는 것이다. 99만 원 가진 놈이 1만 원 가진 놈에게 100만 원 채우게 그 1만 원을 달라고 한다지 않는가?

우리가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흥부전』, 그 근원설화(根源說話)인 도깨비 방망이 얘기를 생각해 보자. 이 설화는 당나라 단성식(段成式)이 지은 『유양잡조속집(酉陽雜俎續集)』에 나온다. 설화의 명칭은 「방이설화(旁㐌說話)」. 이 설화는 『흥부전』과는 달리 형인 방이(旁㐌)가 착하다.

누에와 곡식의 씨를 좀 달라는 형 방이에게 동생은 그것을 삶아서 준다. 어쩌다 곡식의 씨 하나가 살아남아 이삭이 한 자가 넘게 자란다. 방이가 지키고 있었더니,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 이삭을 쪼아 물고 갔다. 방이가 새를 따라 산속 깊이 들어갔는데 새는 바위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방이가 그 옆에서 지키고 있자니, 밤이 되자 붉은 옷을 입은 도깨비들이 나타나 금방망이를 가지고 저희들이 가지고 실은 것들을 ‘×× 나와라, 뚝딱!’ 하면 그것들이 ‘펑!’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다. 나중 그들은 떡과 술을 차려 먹더니 금방망이를 잊어버린 채 두고 가 버린다. 방이는 그 방망이를 가지고 와서 큰 부자가 된다. 그것을 본 방이의 아우, 설화에서조차 지나치게 욕심이 많은 놈이라 그런지 이름마저도 언급하지 않는, 그 아우는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잘 살고 있는데도 방이를 따라 하다가 그만 코를 뽑혀 코끼리코처럼 되고 말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만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끙끙 앓다가 죽고 만다.

그런 게 욕심이다. 한정이 없는 욕심, 그것이 문제이다. 터무니없는 욕심은 사행심(射倖心)을 낳는다. 바로 그러한 심리를 이용한 것이 도박(賭博)이다.

필자의 대학생 때 경험 하나를 들춰보자. 대부분의 강의가 오전 중으로 끝나는 요일에, 교양과목 하나가 오후 그것도 맨 끝 시간에 들어 있었다. 그때까지 빈둥빈둥 지내기가 힘들어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는 친구네 집으로 몇 명이 몰려갔는데, 그만 거기서 노름판이 벌어졌다. 아마도 ‘섰다’였던 것 같다. 나는 마침 등록금을 가지고 갔던 날인데, 우루루 몰려가는 바람에 그냥 따라갔었고, 결국은 그 등록금이 홀랑 날아갈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의 등록금은 만 원, 그런데 남은 건 백 원이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이것을 마저 잃고 다시는 노름의 ‘노’자도 쳐다보지 않겠다고.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 백 원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등록금을 몽땅 찾고도 남게 되는 것이 아닌가? 노름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맛때문에 한 번 빠지면 벗어나기가 힘드는 것이다.

‘바람피우는 남편은 옷이라도 남지만, 노름하는 남편은 마누라 팔아먹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욕심은 도박을 낳고 도박은 쪽박을 낳는다지 않은가? 욕심에 제동장치를 달도록 하자. 그렇게 해서 ‘過慾’, ‘貪慾’으로 달리려는 욕심을 ‘寡慾’으로 묶어두자. 어떻게? 어떤 제동장치를 달아야 하는가 말이다. 그 제동장치란 바로 ‘지족(知足)’이라는 낱말이다. ‘知足’이란 ‘분수(分數)를 지키며 만족할 줄을 안다’는 뜻이 아니던가?

 

(2012. 원고지 1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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